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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역사 공부 「오늘」

[오늘] 국군, 산청·함양 양민 705명을 학살하다

by 낮달2018 2024. 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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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 ‘오늘’] 1951년 2월 7일,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 산청·함양 양민 학살

▲추모공원에 조성된 합동묘역. 정부가 공식 인정한 386기의 묘비가 세워져 있다.ⓒ 두피디아

1951년 2월 7일은 음력 신묘(辛卯)년 정월 초이틀이었다. 전년도에 발발한 전쟁이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1·4후퇴로 이어지고 있던 때였다. 이날, 지리산 줄기의 두메산골인 가현, 방곡(산청군 금서면), 점촌마을(함양군 휴천면)과 서주리(함양군 유림면) 등 네 개 마을의 양민 705명은 느닷없이 들이닥친 국군 병사들에게 떼죽음을 당하고 세 마을 133가구가 잿더미가 되었다.

 

이 끔찍한 범죄는 이틀 후에 거창군 신원면 일대에서 자행된 ‘거창 양민 학살사건’의 서막이었다. 산청·함양을 거쳐 거창군으로 이동한 같은 부대는 1951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사흘 동안 거창 지역의 양민 719명을 무차별 학살한 것이다. [관련 글 : 국군, 거창에서 양민 719명을 학살하다]

 

정월 초이틀, 두메산골에서 자행된 참극

 

정월 초하룻날 차례를 모시고 난 다음 날이라, 집집이 떡국으로 아침상을 차리느라 부산했던 가현 마을에 총성이 울리기 시작한 것은 이날 아침 7시께였다. 지리산 일대의 공비 토벌 작전을 벌이던 11사단 9연대 3대대의 1개 중대 병력이 마을에 들이닥쳤다.

 

군인들이 마을을 돌며 닥치는 대로 불을 지르자 40여 가구는 삽시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군인들은 놀라 뛰쳐나온 마을 사람들을 마을 앞 산제당 골짜기로 끌고 가 논바닥에 4열 횡대로 꿇어 앉힌 뒤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영문도 모르고 골짜기에 끌려갔던 마을 사람들 123명은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군인들은 학살을 끝낸 뒤 시신에도 불을 질렀다.

 

서둘러 이웃 방곡마을로 이동한 부대는 마을에 들어온 다른 중대 병력과 함께 학살을 진행했다. 이들은 마을의 72개 가옥에 불을 지르고 마을 사람들을 논두렁에 앉힌 후 기관총을 난사했다. 순식간에 212명이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고, 살아난 이는 채 10명도 되지 않았다.

 

이들은 다시 아랫마을 함양군 휴천면 동강리 점촌마을로 내려갔다. 군인들은 가현, 방곡에서 한 것처럼 귀중한 물건과 가축들을 빼낸 다음, 21가구 60명 주민을 동네 우물가로 모이게 한 뒤 집을 모두 불태우고 주민들을 몰살했다.

 

이후 군인들은 학살 방식을 바꾸어 여러 개 마을의 주민을 한 장소로 모아 학살하기 시작했다. 산청군 금서면 화계, 화산, 주상, 자혜마을과 함양군 유림면의 지곡, 손곡 등의 마을 사람들은 유림면 서주리로 모이라는 지시를 받았다.

 

겁에 질린 주민들은 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유림면의 지곡과 손곡마을 사람들은 쉽게 서주리로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강 건너 산청군 금서면의 마을 사람들은 죽음이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얼어 있는 강을 건너야 했다.

 

박격포까지 동원한 학살, 10시간 만에 705명 희생

 

7개 마을 사람들을 서주리 엄천강 강가에 모은 후, 군인들은 젊은 장정을 끌어내 교실 넓이만 한 구덩이를 두 군데 팠다. 군인들은 주민 310명을 구덩이에 몰아넣은 뒤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총을 난사했다. 군인들이 조준해 박격포를 쏘자 구덩이는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불과 10여 시간 동안에 산청과 함양 지역의 양민들 705명이 제 나라 군대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학살을 마친 9연대 3대대 군인들은 2월 8일 밤 생초국민학교에서 숙영(宿營)하면서 학살한 마을에서 끌어온 가축을 잡아 작전 축하 잔치를 벌였다.

▲ 산청군 금서면 화계오봉로에는 2001 년 합동묘역과 위령탑을 갖춘 산청 함양사건 추모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

당시, 소백산맥 끝자락인 산청·함양 지역의 지리산 등 산악에는 퇴로를 차단당한 빨치산들이 거점을 이루고 있었다. 이승만 정부는 이들 ‘공비토벌’을 목적으로 11사단을 일대에 배치했다. 11사단 9연대 3대대는 공비와 내통하는 ‘통비(通匪) 분자’를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을 폈다.

 

‘견벽청야’는 주변에 적이 쓸 만한 모든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없애 적군을 지치게 만드는 전술이다. 그러나 3대대는 작전의 본령과 동떨어진 무고한 양민을 대상으로 한 초토화 작전을 벌인 것이었다. 희생된 산청·함양 주민 705명 가운데 10세 미만 어린이와 노인, 부녀자가 무려 6백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인근 거창으로 이동한 11사단은 2월 9일부터 11일까지 사흘 동안 신원면 일대에서 무려 719명의 양민을 학살했다. 세 지역의 학살 현장은 한동안 군경의 삼엄한 통제로 외부인 출입이 일절 금지됐기 때문에 학살사건은 전쟁통에 시나브로 묻히는 듯했다.

 

이 양민 학살사건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세상에 드러났다. 1951년 2월 말, 임시수도 부산에 있던 거창 출신의 야당 국회의원 신중목에게 지역구인 거창군 신원면 대현리에 한번 가보라는 익명의 투서가 날아들었다. 신 의원은 즉시 거창으로 달려가 현지 경찰로부터 신원면의 학살 사실을 전해 듣고 3월 29일 열린 제54회 국회 본회의장에서 이를 폭로한 것이었다.

 

군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야당 지도자 신익희가 폭로를 적극적으로 도와 국회는 곧장 특위를 구성하고 4월 6일 조사단을 거창 현지로 보냈다. 그러나 이에 당황한 계엄사 민사부장 김종원은 조사단이 지날 신원면 길목에 공비로 위장한 군 병력을 배치해 총격을 가했다.

 

의원들은 조사를 포기한 채 되돌아와야 했지만, 이 무렵 미국의 <뉴욕타임스>가 이 사실을 대서특필하여 이승만 정권의 부도덕성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결국, 정부는 사건 발생 5개월이 지난 7월 27일 양민 학살 사실을 거창군 신원면만으로 축소한 채 11사단의 지휘관들을 법정에 세울 수밖에 없었다.

대구고등군법회의 재판부는 거창 학살은 9연대장 오익경과 3대대장 한동석에게, 국회 조사단 방해 사건은 김종원 계엄민사부장에게 각각 책임을 물었다. 오익경은 무기징역, 한동석은 징역 10년, 김종원은 징역 3년이 각각 선고되었다.

 

진상은 은폐되고 학살자들은 풀려나고

 

그러나 재판은 사건의 축소 은폐를 위한 형식적 절차에 지나지 않았다. 재판과정에서도 학살의 진상은 규명되지 않았고 피고인들은 1년 만에 특사로 풀려나와 군에 복귀하여 승진을 거듭했고 퇴역 후에도 정부의 요직을 거쳤다.

 

사건 후 거창 지역 유족들은 1954년 과정리에 합동 묘를 마련했다. 2월 11일 희생된 5백여 명의 뼈를 추슬러 큰 것은 남자, 작은 것은 여자, 아주 작은 것은 어린아이 유골로 나누어 보통 봉분보다 다섯 배가량 큰 묘 2개를 만든 것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서글퍼 슬픈 무덤이었다.

 

유족들의 분노와 피맺힌 한은 4·19혁명과 함께 분출되기 시작했지만, 이듬해 5·16 쿠데타로 물거품이 되었다. 산청·함양 지역의 경우 당시 2명의 유족이 대표로 피해 상황을 국회에 진정했다 하여 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당한 것이다.

 

군사정권은 박 면장(학살 당시 주민선별에 참여한 자) 생매장 사건과 유족회 결성을 문제 삼아 거창 지역 유족 18명을 군법회의에 넘겼고 합동 묘는 헌병이 산산이 파헤쳐 버렸다. 양민은 ‘두 번째 학살’을 당한 것이었다.

 

이후 유족들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부에 끊임없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요구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번번이 “이해는 가지만 불순 세력이 군을 악선전할 소지가 있으므로 양해하기 바란다.”는 답변만 돌아왔을 뿐이었다.

 

유족들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요구는 1980년대 말 여소야대 상황에서 진전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다. 유족회의 활동이 알려지고 여러 매체에서 학살의 진상을 보도하게 되면서 지방의회에 이어 문민정부 때에 비로소 특별 입법이 이루어진 것이다.

▲ 거창사건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따라 산청 함양사건 추모공원이 조성되었다 .

1996년 1월에 ‘거창사건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법률 제5148호)이, 4월에는 특별조치법의 시행령(대통령령 제14970호)이 공포되었다. 그리고 지난해 11월 11일, 민주당 김병욱 의원이 대표 발의한 ‘거창사건 등 관련자 배상 등에 관한 특별법’은 지금 국회에 계류 중이다.

 

학살 사건 희생자와 유족에게 배상금과 의료지원금, 생활지원금 등을 지급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이 법이 통과되면 저 학살의 상처와 아픔은 치유될 수 있을까. 그러나 문제는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우려하고 있는 정부의 태도이니 전망을 낙관할 수 없다.

 

아픈 우리 현대사의 트라우마

 

학살의 현장이었던 경남 산청군 금서면 화계오봉로에는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추모공원은 2001년 합동묘역 조성 사업이 착공된 지 4년에 걸친 공사로 준공되었다. 이는 거창사건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과 거창사건 등 관련자 명예회복 심의의원회의 사망자 및 유족 결정(1998.2.17.)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산청 함양사건 추모공원 바로 가기 ☞]

 

이데올로기를 좇아 분단과 전쟁의 역사를 감내해야 했던 고단하고 아픈 우리 현대사의 트라우마는 여전히 깊고 넓다. 억울하게 희생된 이가 단 한 사람뿐이라 할지라도 그 죽음과 희생의 무게는 민주공화국만큼 무거워야 마땅하지만, 아직도 우리 역사는 그 형평(衡平)을 가누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7. 2. 6. 낮달

 

* 참고자료 :

· 산청 함양사건 추모공원 누리집

· 정희상 기자의 <시사저널> 기사

· <한국전쟁유족회> 누리집의 신기철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제공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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