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순국(殉國)

[순국] 충정공 민영환, 동포에게 사죄하고 자결하다

by 낮달2018 2023. 11. 30.
728x90

1905년 11월 30일, 시종무관장 민영환 망국의 책임을 사죄하고 자결

▲ 대한제국의 시종무관장 민영환 ( 閔泳煥 , 1861~1905)

1905년 11월 30일 오전 6시께, 시종무관장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은 전동(典洞)에 있는 중추원 의관(醫官) 이완식의 집에서 단도로 자신의 배와 목을 찔러 목숨을 끊었다. 그의 죽음은 망국에 대해 신료(臣僚)의 책임을 지고 속죄하는 것이었다. 향년 44세.

 

을사늑약이 체결된 것은 열사흘 전인 11월 17일이었다. 용인에서 이 소식을 들은 민영환은 서울로 돌아와 전 좌의정 조병세(1827~1905,1962 대한민국장) 등과 대궐로 나아가 5적의 처단과 조약의 폐기를 청원하였다.

 

11월 28일, 칠순 노인 조병세가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자 그는 궁중으로 들어가 소두(疏頭: 상소의 대표)가 되어 연일 상소하며 참정대신(한규설)의 인준이 없는 조약은 무효라고 주장하며, 5적의 처단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친 상소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그는 마침내 죽음으로써 자기 뜻을 관철한 것이었다. 다음날, 서구식 명함 앞뒷면에 깨알처럼 적힌 유서 세 통이 그의 옷소매에서 발견되었다. 각각 동포와 황제, 그리고 외국 사절들에게 남긴 글이었는데 동포들에게 남긴 글은 울림이 남달랐다.

 

“오호! 나라의 치욕과 백성의 욕됨이 이에 이르렀으니 우리 인민은 장차 생존 경쟁 가운데서 진멸하리라. 대개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반드시 죽고, 죽기를 기약하는 사람은 도리어 삶을 얻나니 제공(諸公)은 어찌 이것을 알지 못하는가.

단지 (민)영환은 한번 죽음으로 황은(皇恩)에 보답하고 우리 2천만 동포 형제에게 사죄하려 하노라. 그러나 영환은 죽어도 죽지 않고 저승에서라도 제공을 기어이 도우리니 다행히 동포 형제들은 천만 배 더욱 분려(奮勵)하여 지기(志氣)를 굳게 하고 학문에 힘쓰며 한마음으로 힘을 다하여 우리의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어서라도 마땅히 저세상에서 기뻐 웃으리라.

오호! 조금도 실망하지 말지어다. 대한제국 2천만 동포에게 죽음을 고하노라.”

▲ 민영환은 서구식 명함 앞뒷면에 동포, 황제, 각국 공사 앞으로 세 통의 유서를 남겼다 .

민영환은 서울에서 민치구의 손자, 호조판서 민겸호의 친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문약(文若), 호는 계정(桂庭).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부인 민씨가 그의 고모여서 고종에게는 외사촌 동생이다. 명성황후 민씨의 친정 조카로 알려지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13촌쯤 되는 먼 친척에 불과하다.

 

1877년(고종 14)에 출사하여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였고 1881년 동부승지, 이듬해 성균관 대사성에 발탁되었다. 임오군란(1882)의 발발로 아버지 겸호가 살해되자 사직하였다. 1884년 이조참의에 임명된 이래 1887년에 호조판서에 올랐고 이후 병조판서, 한성부윤 등을 거쳐 1895년 주미 전권대사가 되었다.

 

그러나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1895)을 일으키자, 그는 주미 전권대사에 부임하지 않고 낙향했다. 1897년 1월 영국·독일·러시아·프랑스·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6개국 특명 전권공사가 되었으며, 영국 여왕의 즉위 60년 축하식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해외여행으로 구미(歐美) 제국의 발전된 문물제도와 근대화 모습을 직접 체험한 그는 독립협회의 취지에 찬동, 이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독립협회 간부 정교가 정부 요인 중 국민이 신임할 수 있는 인물은 한규설과 민영환밖에 없으므로 민영환을 군부대신과 경무사에 임명하면 민심이 수습될 것이라고 고종에게 진언할 정도였다.

 

민영환은 러일전쟁 후 내부대신·군법교정총재(軍法校正總裁)·학부대신을 역임하였으나 일본의 내정 간섭에 항거하여 친일 내각과 대립하다가 한직인 시종무관으로 좌천되었다. 1905년 잠시 참정대신·외무대신을 역임하였으나, 다시 시종무관으로 밀려난 뒤 외교권 강탈을 우려하여 무장이었던 한규설을 총리대신으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었다. [관련 글 : 일본의 강압으로 불평등 을사늑약(한일협상조약) 체결] 외교권까지 빼앗기자 민영환은 조병세와 함께 조약에 찬동한 5적의 처형과 조약의 파기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황제의 비답(批答: 상소에 대한 임금의 답변)이 있기도 전에 일본 헌병에 의해 조병세는 구금되고 백관들은 해산되었다.

 

민영환은 스스로 소두가 되어 두 차례 상소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제의 협박으로 왕명 거역죄로 구속되어 평리원(平理院: 재판소)에 갔다가 풀려났다. 민영환은 국운이 이미 기운 것을 깨달았고 죽음으로써 이에 항거하고자 했다.

 

언론을 통해 민영환의 죽음이 알려지자, 삽시간에 온 장안 사람들이 민영환의 집에 몰려들어 통곡하였다. 그가 남긴 유서는 <대한매일신보>에 실려 온 국민에게 읽히면서 국민의 반일 민족의식도 드높아졌다. 그의 자결 소식이 전해지자, 지사들의 자정(自靖) 순국이 이어졌다.

 

지사들의 자정 순국이 이어지다

▲ 앞서거니 뒤서거니 자정 순국한 지사들. 이한응은 5월은 조병세와 송병선은 각각 12월에 스스로 목숨을 거두었다.

다음 날인 12월 1일에는 원임(原任: 전직) 대신 조병세(1827~1905)가 고종에게 드리는 유소(遺疏) 등을 남기고 음독 자결했다. 향년 78세. 그는 유서에서 적신(賊臣) 5인의 처단과 국권 회복을 요구했다.

 

“신이 역신(逆臣)을 제거하지 못하고 늑약을 취소시키지 못한즉 부득불 한 번 죽음으로써 국가에 보답하려는 고로 폐하께 영결을 고하오니, 신이 죽은 후에라도 진실로 분발하시어 결단을 내리셔서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 등 5 역신을 대역부도한 죄로 처형하시어 천지 신인에게 사례하시고 각국 공사에게 교섭하여 위약(僞約)을 폐기하시고 국명(國命)을 회복하신다면 신은 비록 죽어 있다고는 하나 살아 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신의 말이 망령되었다고 하신다면 즉시 신의 몸을 절단하시어 여러 적신(賊臣)들에게 내려 주소서.”

 

같은 날, 전 참판 홍만식(1842~1905, 1962 독립장)이 여주 본가에서 아들에게 ‘처사례(處士禮: 처사는 출사하지 않은 선비)’로 장례 지낼 것을 당부한 다음 독약을 마시고 자결 순국하였다. 갑신정변(1884)의 주역이었던 홍영식의 형으로 을미사변(1895) 때에도 자결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그는 이후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상소 때마다 직함 대신 ‘미사신(未死臣: 죽지 못한 신하)’이라 쓴 이였다.

다음날인 12월 2일 오후 5시께 황해도 황주 출신의 김봉학(1871~1905, 1962 독립장)이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그는 의병 활동을 거쳐 군대에 들어와 평양 진위대에서 근무하다 부대가 서울로 올라오자 시위대(侍衛隊) 제3대대 상등병으로 서울에 주둔 중이었다.

 

민영환, 조병세의 자결 소식을 듣고 그는 “대대로 나라의 녹을 먹던 신하로서 순국함은 당연하다. 나 또한 군인으로서 6년이나 지내면서 나라를 지키지 못했으니 원수의 일제 무리를 죽이고 나도 죽겠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향년 34세.

 

12월 3일에는 늑약 체결 후 이에 대한 반대 운동을 벌이던 학부 주사(主事) 이상철(1876~1905, 1962 독립장)이 독약을 마시고 앞선 이들을 뒤따랐다. 이때 그는 고작 스물아홉 살이었다.

 

12월 30일에는 전 대사헌 송병선(1836~1905, 1962 독립장)이 황제와 국민과 유생들에게 드리는 유서를 남기고 독약을 마시고 자결 순국하였다. 그는 늑약 체결 이후 상경하여 고종을 알현하고 5적의 처단과 늑약의 파기를 건의하였으며, 늑약 반대 투쟁을 계속하다가 강제로 향리에 호송된 바 있었다.

 

늑약이 체결되기 전에 목숨을 버린 이도 있었다. 경기도 용인 사람 이한응(1874~1905, 1962 독립장)은 주영(駐英) 한국공사관의 서리공사였다. 1905년 4월, 일본은 한국 외교를 대리해 준다는 구실로 주(駐) 청국 한국공사관을 철수시켰고 5월 초에는 주영 한국공사관, 7월에는 주미 한국공사관을 철수시켰다.

 

이한응은 주영 한국공사관을 철수시킨다는 통보를 받자 이를 항의하고, 런던의 각국 공사들에게 한일관계와 한국이 아직 독립 국가임을 설득하고자 했으나 주영 한국공사관의 활동은 이미 외교권이 없다며 무시당했다. 이한응은 5월 12일, 런던에서 유서를 남기고 자결 순국하였다. 향년 31세.

 

민영환이 자결 순국하자 그의 인력거꾼도 목숨을 끊어 일제 침략에 항거하였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이 인력거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았다.

▲전동에서 한강에 이르기까지 겹겹이 인파로 뒤덮여 진을 친 것 같았다는 민영환의 장례식 .
▲조계사 경내에 있는 민영환 집터 표석

사후에 그는 의정대신(議政大臣)으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正), 고종이 사망한 뒤에는 고종 황제의 능원에 배향되었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 받았다. 1957년 서울 종로구 안국동 사거리에 세워진 그의 동상은 창덕궁 돈화문 앞으로 옮겨졌다가 선생의 생가터로 알려진 우정총국(사적 제213호) 옆으로 이전했다.

 

민영환, 척족들과 다른 길을 가다

▲민 충정공 동상(우정총국 옆)

민영환은 대한제국 말 외척 정치의 핵심이던 여흥 민씨 가문의 후광에 힘입어 출세 가도를 달렸다. 고작 스물에 당상관에 올랐고, 대신의 자리에 오른 것은 서른다섯 살이었다. 일찍이 해외의 선진 문물제도를 돌아보며 개혁에 눈뜬 그는 독립협회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그는 일족의 영화가 아니라 근대적인 개혁을 시도하려다가 수구세력인 민씨 일파에게 미운털이 박혀 요직에서 파직되었는데 이런 과정에서 반일 민족주의에 기울어졌다. 그리고 그 점이 역사적 평가에서 그가 민씨 일족과 갈라서는 계기가 되었다.

 

1894년 동학 농민전쟁 때 그는 민겸호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처단 대상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당시 민중들로부터 사갈시 된 민씨 척족(戚族)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녹두장군 전봉준도 그를 탐관오리의 대표로 지목하고 있었다.

 

경술국치 이후 자결한 매천 황현은 사람에 대한 평가가 아주 매서워서 ‘매천의 붓 아래 온전한 사람이 없다(梅泉筆下無完人)’란 평을 들었다. 그의 저서 <매천야록>에서는 민영환에 관한 기술이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데도 그의 장례 관련 기록에서 온 백성들이 그의 죽음을 애통해했다고 적고 있다.

 

21일에 민영환을 용인에 장사지냈다. 임금께서 친히 층계를 내려와 전송하면서 경례를 표시했다. 각국의 공사와 영사들도 모두 와서 조의를 표했고 관을 어루만지며 몹시 슬퍼했다. 위로는 고관에서부터 아래로는 시골의 종, 아낙네, 거지, 승려에 이르기까지 길을 메워 울며 보내니, 곡성이 언덕과 들판을 뒤흔들었다.

전동(典洞)에서 한강에 이르기까지 겹겹이 인파로 뒤덮여 진을 친 것 같았으니, 영구(靈柩)를 보내는 무리가 이렇게 많은 것은 근고(近古)에 없는 일이었다. 시골의 무인 한 아무개가 장지에서 민영휘를 보고 말하였다.

“자네도 호상(護喪)을 하러 왔는가? 자네는 민가가 아닌가? 어떤 민가는 죽고 어떤 민가는 죽지 않는 것인가? 자네가 나라를 망쳐 오늘에 이르렀으니 한 번 죽어도 속죄할 수 없거늘 충정공(忠正公)의 영구를 따라오다니 하늘이 두렵지 않은가? 빨리 가게나! 가지 않았다간 내 군화 끝에 채여 죽을 것일세.”

이에 민영휘가 잠자코 나왔다. 듣는 자들이 통쾌하게 여겼다.
      - 황현, <매천야록>(허경진 옮김, 서해문집) 제5권 ‘을사년’ 중에서

 

민영환에 대한 저간의 평가와 무관하게 당시 중앙 정계의 실세 중에서 국가를 망국의 길로 이끈 책임을 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황제와 백성에게 사죄한 인물은 그가 거의 유일했다는 점은 두고두고 곱씹어 볼 대목이다.

 

망국의 책임을 진 유일한 실세

 

정작 망국의 책임을 가장 크게 져야 했던 임금과 왕족들 가운데 그 책임의 일단이라도 지겠다는 이는 없었다. 이들은 5년 뒤 경술국치[관련 글 : 포의(布衣)의 선비 황현, 망국의 책임을 대신하여 자정하다] 뒤에 한일 강제병합에 협조한 매국의 대가로 일왕이 지급한 은사금을 받아 챙겼다. 가장 고액의 은사금은 고종의 친형 이재면이 받은 83만 엔(166억 원)이었다. [관련 글 : 후작에서 자작까지, 경술국치와 조선 귀족들]

 

더러 ‘자결 순국’이라는 민영환의 선택을 두고 현실 회피라거나,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저항했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대의명분에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점은 그보다 훨씬 분명한 일이다.

 

 

2017. 11. 29. 낮달

 

 

참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 <나무위키>

· 우리 역사넷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