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3년 뉴질랜드에서 최초로 여성에게 참정권이 부여된 후 122년 만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건국 83년 만에 ‘보통선거’를 통해 20명의 여성 지방의회 의원이 탄생했다. 올해 사우디아라비아는 여성들에게 투표권과 피선거권 등 참정권을 부여했는데 이는 1893년 뉴질랜드에서 처음으로 여성에게 참정권이 부여된 후 122년 만이다.
사우디 여성들 122년 만에 첫 투표
아닌 21세기에 웬 ‘여성참정권’이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기실 여성들이 참정권을 얻은 역사는 그리 오래지 않다. 그것도 일찌감치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온 구미 선진국에서는 이 가장 기본적인 시민권을 얻기 위해 적지 않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근대 민주주의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참정권이 제한되었던 것은 여성은 남성보다 능력이 떨어지고 또 가정을 지키는 것이 그의 본분이며 여성의 이익은 남성에 의해 대변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여성들이 참정권을 획득한 것은 거기 저항한 여성들의 투쟁을 통해서다.
근대의 여성참정권 운동은 프랑스 혁명 당시부터 주장되기 시작했지만, 그게 의미 있는 성과로 드러난 것은 1893년 영국의 자치령이었던 오세아니아의 섬나라 뉴질랜드에서였다. 뉴질랜드에서의 여성참정권 운동의 주역은 여성의 시각으로 알코올과 성 문제, 이혼 등 각종 사회문제의 해결을 모색했던 ‘뉴질랜드 여성절제회’를 만든 케이트 셰퍼드(Kate Sheppard, 1847~1934)였다.
영국에서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 이민해 온 이 용감한 여성은 여성절제회 활동으로 전 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여성참정권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세 차례의 실패를 거쳐 1893년 당시 여성 인구의 2/3에 해당하는 3만2천 명의 서명을 끌어내면서 마침내 이들은 참정권을 획득했다.
1883년 여성참정권 따낸 뉴질랜드
유럽에서 처음으로 여성참정권을 도입한 나라는 러시아제국 예하의 대공국 핀란드였다. 핀란드는 1906년 유럽에서 최초로 보통선거를 시행하면서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했다. 이듬해에는 19명의 여성의원을 선출함으로써 세계에서 처음으로 여성의원을 탄생시켰다.
이어 1910년대에 노르웨이(1913)와 덴마크(1915)에서도 여성이 참정권을 받았다. 1차 대전이 끝날 무렵, 소비에트 연방(1917), 캐나다(1918), 독일·네덜란드(1919)에서도 여성참정권이 도입되었다. 유럽 국가 가운데 흥미로운 곳은 영국이다.
영국, 에밀리 데이비슨의 희생
자타 공인하는 민주주의의 본산이라 할 이 나라에서 여성참정권이 주어진 것은 1918년이다. 그러나 이는 30세 이상의 여성에게만 주어진 것이었다. 21세 이상까지 참정권이 확대되기 위해서는 십 년의 세월이 더 필요했다. 영국에서 여성참정권이 온전하게 시행되게 된 것은 1928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제한적 참정권조차도 5년 전, 런던 남부의 경마대회에서 ‘여성에게 투표권을!’이라고 부르짖으며 몸을 던진 한 여성의 희생에 힘입어서였다. 국왕인 조지 5세 소유의 말이 결승점으로 들어오는 순간 질주하던 말을 향해 몸을 던진 이 여성이 바로 에밀리 데이비슨(Emily Wilding Davison, 1872~1913)이다.
매우 격렬한 형태로 진행되던 영국의 여성참정권 운동의 지도자는 에멀린 팽크허스트(Emmeline Pankhurst, 1858~1928)였다. 여성참정권이 매번 의회에서 부결되자 에멀린은 서명과 청원에 의존하던 방법을 버리고 여성사회정치연맹(WSPU)을 조직하여 과격하고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운동을 펼쳐나갔다.
런던 중심가에 있는 유리창을 모조리 박살 내는 것을 시작으로, 국립미술관의 작품을 훼손하고 전화선을 끊고 전철에 불을 지르는가 하면 유명 정치인의 집을 불태우는 등 이 운동은 격렬해졌다. 이 과정에서 체포·구금이 잇따랐고, 투옥된 운동가들은 정치범 대우를 요구하며 옥중 단식투쟁을 벌였다.
정부는 호스를 이용하여 이들에게 강제로 음식을 주입하다가 반대여론에 부딪히자, 이들을 석방하고 감시하다가 다시 잡아 가둘 수 있게 하는 법을 제정했다. 1908년 처음 갇혔던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이 법 덕분에 1913년에만 12차례나 석방과 체포를 되풀이해야 했다.
에밀리 데이비슨이 달리는 경주마에 뛰어든 것은 WSPU의 ‘말보다는 행동’이라는 구호가 절정을 이룬 사례였다. 현장에서 사망한 에밀리의 외투에는 ‘VOTES FOR WOMEN’이라 적혀 있었다. 이 사건으로 분노한 여성들은 장례식을 거대한 시위행렬로 만들었고 런던을 전쟁 상황으로 몰아갔다.
그러나 이러한 대치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팽크허스트가 영국의 참전을 지지하고 전시 체제에 협력할 것을 독려하면서 해소된다. 전쟁이 끝나자 1918년, 정부는 전시 여성들의 협조를 인정하고 30세 이상의 여성에게 참정권을 허용한 것이다. 팽크허스트는 남성과 동등한 여성의 참정권을 인정한 법률이 시행되기 한 달 전인 1928년 6월 세상을 떠났다.
미국에서의 여성참정권 운동
미국에서의 여성참정권 운동은 남북전쟁(1861~1865)이 끝나면서 노예제 폐지 운동이 활력을 잃게 되자 여성들이 ‘수정헌법 14조’에 자신들도 포함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수정헌법 14조는 흑인 남성들에게까지 참정권을 확대한 법률이었다. 노예들은 1870년에 참정권을 얻었다. 그러나 해방된 노예 문제가 급선무라는 정치인들에게 막혀 여성들은 또다시 기다려야 했다.
미국의 여성참정권·노예제도 폐지 운동가 수잔 B. 앤서니(Susan B. Anthony, 1820~1906)는 ‘여권 운동의 나폴레옹’으로 불린다. 그녀는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미국 대통령 선거 투표를 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100달러 벌금을 물게 되지만 이를 거부하고 재판에서 심판은 자신이 아닌 미국 정부가 받아야 함을 호소했다. [관련 글 : 수잔 앤서니, ‘역사적 투표’에 성공하다]
수전 이후 미국의 여권 운동가 엘리스 폴은 1913년 우드로 윌슨 대통령 취임식 때 1만 명의 시위대를 이끌기도 했다. 당시 대통령 윌슨은 여성참정권 반대론자였는데, 그녀는 여성참정권을 거부하는 집권당의 주의를 끄는 전법을 사용했다.
1916년 윌슨이 여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재선에 성공하자 여성들은 백악관 밖에서 쇠사슬 시위를 벌였다. 그러다가 경찰에게 체포당하자 이들은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이들이 여론의 호응을 얻고 1918년 공화당이 의회를 장악하면서 참정권에 대한 헌법 수정안이 하원에서 통과되었다.
그리하여 1920년 8월, 테네시주 비준을 끝으로 마침내 수정헌법 19조는 헌법에 추가되었다. 그것의 내용은 지극히 간단했다. 그러나 그 한 줄짜리 조문으로 인구의 절반이 ‘우리, 국민은(We the People)’ 속에 포함되기까지는 무려 130년 이상이 걸렸다.
“미 국민의 참정권은 미국이나 혹은 어떤 주에서도 성별을 이유로 거부될 수 없다.”
이어서 미얀마(1922), 에콰도르(1929)에서 여성참정권이 도입되었다. 1930년대엔 남아프리카공화국(1930), 태국·우루과이(1932), 터키·쿠바(1934), 필리핀(1937)에서 여성이 이 권리를 얻었다.
일찍이 프랑스 혁명(1789)으로 절대왕정의 앙시앙 레짐을 무너뜨린 프랑스에선 1848년 2월혁명 후 신분·재산과 관계없이 모든 성인 남성에게 투표권을 주는 ‘보통선거’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여성에게 동등한 권리가 허락되지 않았다. 프랑스 여성들이 참정권을 획득한 것은 거의 백 년 뒤인 1944년이었다.
1945년에 패전국 일본이, 이듬해(1946)에 북한·중국이, 1948년에 한국이, 1949년에 인도에 여성참정권이 주어진 것에 비기면 프랑스의 경우는 매우 늦은 것이었다. 하긴 스위스가 여성참정권을 허용한 것은 놀라지 마시라, 1971년이었다.
이제 남은 곳은 바티칸 시국뿐
1990년대에는 중동의 카타르(1999), 2000년대에는 오만(2003), 쿠웨이트(2005), 아랍에미리트(2006), 부탄(2008) 등에서 여성참정권이 도입되었다. 부탄은 2008년 첫 선거를 치르며 보통선거가 치러졌다.
그리고 이번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보통선거를 통해 여성의원들이 선출됨으로써 비로소 여성참정권이 보장된 나라가 되었다. 무슬림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여성참정권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월경이 정치적 판단을 흐리게 한다’는 이유에서다.
이로써 전 세계에서 여성의 참정권이 보장되지 않는 나라는 단 하나만 남았다. 로마 가톨릭의 수장 프란치스코 교황이 통치하는 유럽의 소국, 바티칸 시국이다. 바티칸은 가톨릭의 특수 영토 성격이 짙지만, 교황청 내 성직자와 봉사자 등 2013년 기준 839명의 국민을 둔 엄연한 국가다.
그러나 이들에겐 투표권이 없다. 교황은 임명이 아닌 투표를 통해 선출되지만, 투표권은 바티칸 주민들이 아니라 전 세계의 추기경에게 있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은 여성에게 사제 서품을 하지 않으므로 당연히 바티칸의 여성들에게도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없을 수밖에 없다.
특수 사례인 바티칸을 빼면 여성참정권은 오늘날 모든 나라의 여성들에게 골고루 주어져 있다. 후발 국가들의 경우는 저절로 주어졌지만, 일부 국가에서는 그것은 첨예한 투쟁을 통해서 힘겹게 얻은 것이었다. <여성신문>이 관련 ‘카드뉴스’의 제목을 ‘맨몸의 전사들, 여성참정권을 쟁취하다’로 쓴 까닭이 거기에 있다. [<여성신문> 기사 바로 가기]
그러나 참정권이라는 기본권의 보장과 실제 여성들의 정치 참여의 간극은 크고 깊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여성의원, 여성 각료 등 여성 정치인의 비율은 ‘세상의 절반’이라는 여성의 비중에 비기면 보잘것없다. 일부에서 여성 할당제 따위의 제도적 보완이 시도되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한국의 성평등지수 115위(하위 20%)
2015년 11월 현재 핀란드 장관의 62.5%가 여성이고 캐나다, 프랑스, 리히텐슈타인은 여성 장관이 50%로 남녀 동수다. 전 세계 여성장관 비율은 17. 7%인데 한국은 5.9%에 불과하다. 여성의원 비율도 전 세계 평균이 22.5%인데 한국은 10월 현재 15.5%에 머물러 세계 190개국 중 111위다. 스웨덴 여성의원 비율은 무려 43.6%다.
세계경제포럼(WEF)이 최근 발간한 세계 성 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성평등지수는 지난해보다 2계단 오른 115위로 하위 20%에 불과하다. 중국(91위)과 인도(108위)는 물론 케냐(48위) 짐바브웨(57위) 가나(63위) 등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보다도 순위가 떨어진다.
갈 길이 멀기만 한 게 아니다. 그걸 앞당길 방책도 그걸 모색하고자 하는 고민도 구체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여전히 ‘여성 징병=성 평등’으로 인식하는 방식으로 여성 혐오의 에너지가 소비되는 현실에서 양성평등 실현은 요원한 그 무엇일 뿐이다.
2015. 12. 1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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