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2년 9월 25일, 독립 기원하며 25일 단식 끝 순국
1922년 9월 25일, 상해임시정부의 국무총리 대리와 외무총장을 지냈던 예관(睨觀) 신규식(申圭植, 1880~1922)이 자신이 선택했던 외교독립 노선의 좌절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임정과 삼천만 동포를 잘 보살펴줄 것’을 당부하고 대화조차 거부하고 단식에 들어간 지 25일 만이었다. 숨이 멎기 전에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정부! 정부’였다.
상하이 임정은 수립된 지 2년여 만에 이념과 출신 지역에 따른 파벌로 인한 내부적 갈등으로 심각한 분열에 처해 있었다. 독립운동의 방법론에 따라 외교독립론(이승만계), 무장독립론(박용만계), 실력양성론(안창호계)이 충돌했고 임정의 대표성 문제도 해소되지 않고 있었다.
이에 따라 제기된 국민대표회의안을 수습하지 못하고 대통령 이승만이 1921년 워싱턴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으로 가자, 신규식은 5월부터 국무총리 대리와 외무총장직을 겸임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10월, 신규식은 임정의 특사로 광둥 중화민국 정부의 북벌서사식(北伐誓詞式)에 참가했다.
이때 신규식은 신해혁명(1911)의 동지인 쑨원(孫文)을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가적 승인을 얻어냈는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호법(護法) 정부를 중국 정통정부로 승인하며 아울러 그 원수와 국권을 존중함.
· 대중화민국 호법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
· 한국 학생을 중화민국 군관학교에 수용할 것.
· 500만 원을 차관할 것.
· 조차(租借) 지대를 허락하여 한국 독립군을 양성하게 할 것.
*호법 정부 : 1917년 쑨원이 중화민국의 헌법을 지키기 위한 ‘호법군 정부’를 조직하여 호법 전쟁을 일으키고 1921년 광저우에서 호법 정부 대총통에 취임한 데서 비롯한 이름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현안을 논의하기 위한 워싱턴회의를 민족 자결주의에 근거한 외교 독립운동의 마지막 기회로 인식하고 있었던 임정은 초청을 받지 못했지만, 이승만을 단장으로 한 대표단을 파견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한국 대표단을 인정하지 않았고 한국 문제의 의제화는 실패했다.
이로써 임정에서의 이승만의 위상은 약화하였고 임정의 재편이 불가피해지면서 치열한 내부논쟁이 전개되자, 신규식 내각은 이에 책임을 지고 총사퇴했다. 이승만에 대한 불신임안이 통과된 뒤 임정의 분열을 자책하며 극심한 우울증과 죄책감에 시달렸던 신규식이 선택한 것은 단식 자결이었다.
대한제국군인에서 망명 독립지사로
신규식은 충북 청원 사람이다. 1898년 관립 한어학교(漢語學校)에 입학하여 중국어·한국사·지리 등을 배웠다. 1900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들어갔고, 학교 당국의 불합리한 처사와 부패에 대항해서 조성환과 함께 학교 당국의 부정에 반발하는 동맹휴학을 모의했다. 그러나 몸이 아파 귀향해 있을 때 모의가 실행되어 군법처형은 면했다.
1902년 무관학교 졸업하여 대한제국 육군 보병 참위(參尉)로 임관되어 부위(副尉)까지 진급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지방 진위대(鎭衛隊)와 손잡고 의병을 일으키려 했으나, 실패하자 음독자살을 시도했다.
이때 목숨은 건졌지만, 오른쪽 눈 시신경을 다쳐 시력을 잃었고, 겉보기에 흘겨보는 인상이 되어 사람들의 놀림을 받았다. 이에 그는 스스로 망가진 눈을 호로 삼아 ‘예관(睨觀 : 흘겨보다)’이라고 하였다. 예관은 상하이 망명 이후 그의 아호이자 가명으로도 쓰였다.
1907년 군대해산 후 애국계몽 운동에 투신하여 활동했다. 1909년 대종교에 입교했고 이듬해 경술국치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집에서 다시 음독을 시도했다가 마침 그의 집을 방문한 대종교 종사 나철에게 발견되어 목숨을 구했다.
예관은 1911년 중국(당시 청나라)으로 망명하여 쑨원과 천두슈(陳獨秀), 천치메이(陳其美) 등 중국의 혁명가들과 교유했다. 혁명의 성공이 한국의 독립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 그는 1911년 3월, 쑨원이 이끄는 중국동맹회에 가입했고 10월 우창(武昌) 봉기에 가담했다. 예관은 신해혁명에 참여한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1913년 7월에는 위안스카이(袁世凱)의 독재정치에 반대하기 위해 일어난 ‘제2차 혁명(봉기)’에도 참가했다. 1912년 망명자들과 함께 상하이 교민이 늘어나자 독립운동과 교민들의 상부상조를 위한 비밀결사로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했다. 동제사는 대종교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었는데 이 단체에는 박은식, 김규식, 홍명희, 신채호, 조소앙, 문일평, 여운형, 장건상 등이 참여했다.
상하이를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 만들다
그는 또 한인 학생이 중국과 구미의 각급 학교로 진학할 수 있도록 예비 교육기관 박달학원을 설립하고, 군사교육을 위해서 약 10년간 100여 명 학생을 바오딩(保定) 군관학교, 난징 해군학교, 톈진 군수학교 등에 입학시켰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서 상하이가 국외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면서 3·1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질 수 있었다.
임정 요인들의 사진 속에서 신규식은 카이저수염과 까만 선글라스를 낀 멋쟁이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가 쓴 검은 색안경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은 망국의 슬픔과 통한이었다. 나라가 망했는데 어찌 세상을 바로 볼 수 있겠냐며 그는 자신의 ‘망가진 눈’을 자호(自號)로 삼았다.
워싱턴회의에서의 독립 청원의 실패와 임정의 분열, 기대했던 외교 독립노선의 좌절 앞에 그는 자기 책임을 다하고자 했다. ‘정부! 정부’라는 외마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을 때 그는 고작 마흔셋의 장년이었다.
해방 후 정부는 그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그의 집안에서는 아우 건식(1977 독립장), 조카 순호(1990 애국장), 사위 민필호(1963 독립장), 외손녀 민영주(1990 애국장)까지 독립운동에 투신, 4대에 걸친 민족운동을 이어갔다. 외손녀 민영주의 남편인 김준엽(전 고려대 총장)은 그의 외손서다.
홍차우 만국공묘(萬國公墓)에 묻혀 있던 예관의 유해는 1993년 국립현충원 임정 요인 묘역으로 이장하였다. 망명의 땅에서 순국한 지 71년 만에 그는 한 줌의 재가 되어 고국으로 돌아왔다.
43년의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예관의 삶은 불꽃 같았다. 그는 나라를 되찾는 일을 자신의 삶과 동일시했다. 거기 어떤 사사로운 이해가 개재되지 않았다. 그의 삶 앞에서 새삼 국리민복을 이르면서도 자당과 자신의 정치적 이해에 골몰하는 이 시대 사이비 정치인들의 위선이 비겨지는 것은 그래서다.
2017. 9. 23. 낮달
* 참고
· <위키백과>
· 우리 역사넷
· 김혁의 역사 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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