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9월 28일, 유관순 열사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
1920년 9월 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3·1운동 당시 만세시위를 벌여 ‘소요· 보안법 위반’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유관순(柳寬順, 1902~1920)이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의 후유증과 영양실조로 숨을 거두었다. 향년 18세. 1919년 4월 1일, 고향인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체포된 지 546일 만이었다.
1919년 5월 9일, 유관순은 1심인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 형을,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는 3년 형을 선고받았다. 함께 재판받은 사람들은 모두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유관순은 일제의 재판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상고하지 않았다.
복심법원서 징역 3년 선고, 상고하지 않다
유관순은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지금의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사이의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조부 유윤기와 숙부 유중무가 일찍이 개신교를 받아들인 바 있어 유관순도 개신교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다.
지역의 흥호학교(興湖學校) 운영에 참여하여 인재 양성에 힘쓴 아버지 유중권은 자녀 교육에도 적극적이었다. 아버지 덕분에 큰아들 유우석이 공주 영명학교에서, 둘째 딸인 유관순이 서울로 유학하여 이화학당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유관순의 고향은 철도 부설 전에 서울과 충남 공주를 연결하는 교통로로서 선교사들이 집중적으로 개신교를 전파하던 곳이어서 많은 교회가 세워진 곳이었다. 지령리에도 1901년경 이미 교회가 들어섰으나, 1907년 8월 국채보상운동에 이 교회가 동참하는 등 애국 활동을 펼치자, 일본군의 방화로 소실되었다.
유관순의 일가인 유빈기가 선교사 케이블(E. M. Cable), 조인원 등과 함께 지령리에 교회를 다시 세운 것은 1908년이었다. 이후 숙부 유중무가 선교사로 교회를 이끌면서 유관순도 5∼6세를 전후하여 개신교를 접하게 되었다.
이화학당과 3.1운동
공주 영명여학교에서 수학한 유관순이 교비 유학생으로 이화학당 보통과에 편입한 것은 1916년이었다. 지령리 교회에 자주 들르던 기독교 감리교 충청도 교구 본부의 미국인 여자 선교사 샤프(Alice Hammond Sharp)의 추천을 받아서였다. 유관순은 사촌 언니 유예도 등과 기숙사 생활을 하며 1918년 3월 18일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1일 고등과 1학년에 진학하였다.
이화학당에서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오후 3시만 되면 모두 수업을 중단하고, 조국 독립을 기원하는 기도회와 시국 토론회 및 외부인사 초청 시국강연회 등을 개최하고 있었다. 1916년 무렵 학생들은 이문회, 유신회, 공주회 등 학생회를 조직해 활동했다. 특히 학생 자치단체인 ‘이문회(以文會)’에서는 당시 학생들에게 민족이 처한 현실과 세계정세를 가르치고 있었다.
1919년 1월 22일, 고종이 서거하자 학생들은 자진해서 상복을 입고, 휴교에 들어갔고, 2월 28일에는 정기모임을 통해 전교생이 적극적으로 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신특실(2014 건국포장), 노예달(2014 대통령 표창) 등은 탑골공원에서 벌어진 3·1 만세운동에 직접 참가했다.
3월 5일에는 학생 연합 시위가 벌어졌는데, 이화학당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정보를 알아낸 학교 측은 교문을 잠그고, 교사들에게 교정 곳곳을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많은 학생이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중 신특실·유점선(2014 대통령 표창)·노예달 등은 붙잡혔고 시위에 동참한 교사 김독실(2007 대통령 표창) 등은 투옥되었다. 이날 유관순도 만세를 부르다가 일경에게 붙잡혔으나 곧 석방되었다.
학생들의 시위가 고조되자 일제는 3월 10일 전국적으로 휴교령을 내렸고, 유관순은 13일 귀향했다. 이때 기차에서 친구들이 기차 소리를 두고, ‘동전 한 푼, 동전 한 푼’ 하는 소리로 들린다고 하자, 유관순은 ‘대한 독립, 대한 독립’ 하는 소리로 들린다고 했다고 한다. 이 열일곱 소녀의 가슴 속에 독립의 꿈이 오롯이 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유관순은 부친 유중권과 조인원 등 마을 어른들에게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고, 숨겨온 독립선언서를 내놓으며, 병천 시장에서의 독립 만세운동 계획을 상의하였다.
‘아우내 독립 만세운동’
유관순과 사촌 언니 유예도(1990 애족장)는 주민들이 만세운동에 쓸 태극기를 만드는 등 시위를 준비하였다. 3월 31일 밤, 자정에 병천 시장을 중심으로 천안 길목과 수신면 산마루 및 진천 고갯마루에 거사를 알리는 봉홧불을 올렸다.
4월 1일, 유관순은 조인원·유중권·유중무 등과 함께 병천(竝川)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오후 1시께 조인원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 독립 만세’를 선창하였다. 이에 장터에 모인 군중들이 크게 따라 외쳤다.
장터에서 가까운 병천 헌병주재소장 고야마(小山) 등 일경 5명이 시장으로 출동하여 해산을 요구하였으나 시위대가 불응하자 이들은 즉시 발포하였다. 총에 맞은 이들이 쓰러지자, 사람들은 사망자의 시신을 헌병주재소에 옮기고 항의하기 시작했다.
김교선(1990 애족장) 등이 군중 100여 명과 함께 주재소로 가서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부르며 사망자에 대한 조치와 구금자 석방을 요구하였다.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1991 애국장)은 헌병에게 총검으로 옆구리와 머리를 찔려 빈사 상태에 이르렀는데 동생 유중무(1990 애족장)는 형을 업고 주재소로 가서 치료를 요구하였다.
군중이 점차 늘어나서 1500명에 이르자, 헌병들이 권총을 쏘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조선인 헌병보조원에게 동족을 어찌 죽일 수 있느냐고 항의하였고, 격분한 유관순은 주재소장을 붙잡고 항의하였다.
지역 유지들과 젊은 청년, 학생들과 함께 참여한, 성공회 병천교회에서 운영하던 진명학교 교사 김구응(1991 애국장)은 일경의 총에 맞아 숨졌다. 비보를 듣고 온 모친이 아들의 시신을 안고 통곡하자 일경은 노모마저 창과 칼로 찔러 살해하였다.
이날 헌병의 발포와 칼에 찔려 유관순의 부모를 포함하여 19명이 시위 현장에서 숨졌으며 30명이 중상을 입었다. 모두 3천여 명이 참여한 이 시위가 바로 ‘아우내 독립 만세운동’이다. 유관순은 주도자로 체포되어 공주교도소에 갇혔고, 이곳에서 공주 영명학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구속된 오빠 유우석(1990 애국장)을 만나기도 하였다.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유관순은 이신애(1963 독립장), 어윤희(1995 애족장), 박인덕 등과 함께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를 기해 3·1운동 1주년 기념식을 치르고,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3천여 명의 수감자들이 크게 호응하여 만세 소리가 밖으로까지 퍼져나가면서 형무소 주위로 인파가 몰려들어 전차 통행이 마비되고, 경찰 기마대가 출동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으로 유관순은 물론, 많은 애국지사가 심한 고초를 당하였다.
1920년 4월 28일 영친왕의 결혼 기념 특사령(特赦令)으로 유관순의 형기도 1년 6개월로 단축되었다. 그러나 이날, 열여덟의 소녀 투사는 감기지 않는 눈을 감아야 했다. 직접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수형 기록표의 사진으로 보아 심한 구타와 영양실조 등의 부작용에 따른 갑상샘 기능저하증이 주된 원인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화학당은 형무소 당국에 시신의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이화학당 교장 월터(Miss Jeanette Walter)는 이를 미국 신문에 알려 세계 여론에 호소하겠다고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결국, 일제는 해외 언론에 알리지 않고, 조용히 장례를 치른다는 조건을 붙여 시신을 인도하였다.
1920년 10월 12일, 이화학당으로 돌아온 유관순의 시신은 수위실에 안치하였고, 세브란스 교의를 불러 수습하였다. 이틀 후, 이화학당 측은 정동교회 김종우 목사의 주례로 이태원 공동묘지에서 조촐히 장례를 지냈다.
이후 일제가 이태원 공동묘지를 군용기지로 개발하면서, 유관순의 묘는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되었으나 실전(失傳)되었고, 현재 유관순 생가 뒷산인 매봉산에는 초혼묘(招魂墓)가 봉안되어 있다.
광복은 유관순이 순국한 지 25년 뒤에야 이루어졌다. 1947년 유관순 열사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고, 유관순은 1951년 순국 의열사(義烈士) 심사위원회에서 순국 의열사로 선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72년에는 유관순이 생전에 살았던 천안시 병천면 탑원리에 추모각이 건립되었고, 1990년에는 1만5000평 대지 위에 열사 유적지가 완성되었다. 1974년 서울 이화여자고등학교에 유관순 기념관이 준공되었다. 1991년에는 고향인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 생가가 복원되었으며, 1996년에는 이화여자고등학교 명예 졸업장이 수여되었다.
유관순, ‘누나’와 ‘열사’ 사이
유관순은 열여덟에 순국함으로써 오랫동안 뒷사람들에게 ‘누나’로 남았다. 그를 누나로 부르게 된 데는 강소천(1915~1963)의 동요 「유관순」과 박두진(1916~1998)의 시 「3월 1일의 하늘」에서 비롯하였다고 보는 모양인데, 글쎄, 그 노래와 상관없이 우리는 교과서에서 유관순을 누나로 배웠던 것 같다.
좀 친근하고 정겹게 부른 호칭이라고 볼 수도 있긴 하지만 기실, 이 호칭은 관행적인 남성 위주의 시각을 대변한다. 스물 이전에 순국한 소년이었다고 한들 우리 사회에서 그를 ‘○○○ 형’이라 부를까. ‘○○○ 오빠’는 언감생심이다. 호명의 주체로 여성을 상정하는 일도 아예 없었다는 얘기다. 공적 호칭으로 ‘유관순 언니’가 없는 것도 같은 이유다.
강소천이나 박두진에게는 1902년생인 유관순이 ‘누나’임 직하지만 이미 그가 태어난 지 100년이 훨씬 지났다. 그런데도 여전히 ‘누나’로 불리는 것은 그를 온전한 한 사람의 독립운동가로 바라보는 걸 방해할 수도 있다. ‘유관순 열사’라 부를 때 그는 ‘이준 열사’와 같은 위상의 공적 영역의 존재하는 인물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 독립운동에 참여해 헌신한 여성들은 2천여 명에 이른다. 그러나 최근까지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1만5052명 가운데 여성은 겨우 324명, 2.2% 남짓이다. 독립운동에서도 여성을 독립된 존재로서가 아니라 남성을 보조하는 역할로만 자리매김하여 온 까닭이다.
다행히 국가보훈처에서 ‘여성독립운동가 발굴 및 포상 확대방안 연구 용역’을 발주했고 이를 수행한 대한민국역사문화원이 여성 독립운동가 202명을 새롭게 발굴해 발표했다. 이 가운데 우당 이회영 선생의 부인 이은숙 등 26명이 올 8·15에 포상을 받았다.
훈격 논란과 5만 원권 지폐 도안 인물 탈락
유관순 열사가 받은 서훈의 훈격(勳格)도 논란의 대상이다. ‘3·1운동의 상징 운동가’로서 그의 공적이 저평가되었다는 것이다. 유관순의 서훈(1962년) 건국훈장 5등급 가운데 3등급인 독립장이다. 서훈 추서 당시의 규정으로는 등급이 3개뿐이었는데 그중 가장 낮은 3등급이었다.
1등급인 대한민국장은 30명이 받았는데 도산 안창호, 백범 김구, 안중근, 윤봉길, 강우규, 허위 등과 함께 독재로 쫓겨난 초대 대통령 이승만도 수훈자다. 심지어 최근 친일 부역 사실의 확인되어 서훈이 박탈된 인촌 김성수도 2등급인 대통령장을 받았음을 견주어보면 유관순의 서훈은 합리적이지 않은 것이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건 2007년 노무현 정부 때 논란과 화제를 부른 고액권 화폐의 도안 인물로 유관순(5만 원권) 열사가 추천되었다가 탈락
한 사실이다. 10만 원권 초상 인물로는 백범 김구가 결정되었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슬그머니 이 화폐의 발행 계획이 취소되면서 없던 일이 되었다.
여성단체들이 연대해 여성계가 추천한 여성 초상 인물로 유관순을 지지했는데도 불구하고 신사임당이 뽑힌 이유는 역으로 유관순이 탈락한 까닭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유관순 열사가 열여덟의 처녀가 아니라 한 가정을 이룬 어머니였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적어도 어머니가 아닌 여성이 미완의 존재로 인식되는 것은 이 땅에선 여전히 관습인 것이다. [관련 글 : 다시 난설헌을 생각한다]
유관순을 누나로 불렀다는 강소천의 동요는 기억에 없는데 박두진의 시는 초임 시절에 고교 국어 교과서에서 처음 만났다. 「3월 1일의 하늘」은 어느 신문 요청에 따라 쓴 기념 목적시다. 시인은 ‘자작시 해설’에서 “영원하고 불멸의 정신이며 그 실천자인 유관순의 불멸의 아름다움과 장렬함을 시적 체험을 통한 보편적인 체험이고자 한 것이 이 시의 의도였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스물아홉, 혈기 방장한 풋내기 교사였던 나는 좀 심드렁하게 그 시를 가르쳤다. 시편 전체에 빈번하게 울리는 자유, 비겁, 불의, 순수, 악, 민족애, 꽃넋 따위의 시어가 차라리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새로 「3월 1일의 하늘」을 읽는다. 시골 여학교에서 소녀들에게 시를 가르치던 병아리 교사가 예순을 넘기고 교직을 떠난 초로의 은퇴자가 되어서 읽는 ‘유관순’은 다르다. 그 부담스러웠던 시어들의 상찬이 부담스럽지 않을뿐더러, 유관순이라는 한 인간의 전인격을 표현하는 데는 모자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2018. 9. 27. 낮달
참고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위키백과>
· 유관순 ‘국민누나’의 탄생, <한겨레{(2009.02.26)
· 이화교정 너머 울려 퍼진 ‘대한 독립 만세’, <이대학보>(2012.3.5.)
· 이승만 1등급, 유관순은 3등급… 이상한 서훈 등급, <국민일보>(201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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