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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수원 ‘화성(華城) 행궁(行宮)’을 찾아서

by 낮달2018 2026. 6. 10.

주마간산의 ‘화성 행궁’ 초행기(初行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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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적으로 지정된 수원화성행궁은 모두 576칸이나 되는 국내 최대 규모의, '임금님의 행차 시 거처하던 임시 궁궐'(행궁)이다. ⓒ 수원문화재단
▲ 화성 행궁의 관람안내도. 수원문화재단의 안내도를 일부 재구성하였다.

예정에 없이 화성행궁을 찾다

 

수원에 화성(華城)이 있다는 진술은 좀 바보 같지만, 내게는 가 봐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아쉬움 때문에 두고두고 곱씹는 유적이다. 수원은 여든을 넘긴 내 작은누님이 사는 곳이기도 해서 나는 언젠가 누님 댁에 들를 때 화성을 돌아보리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그 기회가 좀처럼 오지 않았다.

 

물론 기회는 오는 게 아니라, 내가 만들어야 한다는 걸 모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웃 동네도 아닌 수원에 가려면 날을 받아서 큰맘 먹고 길을 나설 수밖에 없는 시골 사람이니, 그게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5월 초순에 울산에 사는 형님이 작은누나한테 함께 가보지 않겠느냐고 제의해 왔을 때, 나는 좀 시큰둥하게 글쎄, 하고 말꼬리를 흐렸었다.

 

그러나, 우리가 앞으로 (죽기 전에) 몇 번이나 누나를 보게 될 것 같냐던 형님의 반문이 오래 마음에 남아 있었다. 맞다. 두 분 다 여든을 넘긴 누님들이나, 일흔을 지난 형님과 나도 떠나는 날을 알 수 없게 되기는 매일반이다. 그나마 큰누님은 대구에 사시니 뵙기가 그리 어렵지 않지만, 수도권에 사는 작은누님은 작정하고 찾지 않으면 만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작정하고 동대구역에서 탄 형님과 구미역에서 탄 내가 새마을호 기차로 수원역에 닿은 건 5월 21일 오후 네 시께였다. 마중을 나온 누님을 만나서 반갑게 안부를 나누고 우리는 택시를 타고 화성 행궁을 향했다. 다음 날 정오 버스를 타고 돌아올 예정이라, 나는 아쉽지만, 화성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따로 카메라를 챙기지 않았었다.

▲ 화성행궁 정문인 신풍루 앞의 관람안내도. 왕의 골목을 알리는 안내판.
▲ 신풍루 앞마당에 세워진 정문. 오른쪽에 하마비가 서 있다.
▲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 행궁은 유수부의 관청으로 사용하고자 건립하였는데, 왕이 수원에 내려오면 머무는 행궁으로도 사용했다.

아이폰으로 담은 국내 최대 규모의 화성행궁

 

그러나 바로 집에 들어가기에는 이른 시각이라, 화성에 가보자는 누님의 제의를 따르기로 했다. 무거운 카메라 대신 주머니 속 아이폰을 쓰면 되리라고 생각하면서. 편견일 수도 있지만, 나는 스마트폰 카메라를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특히 요즘 스마트폰 카메라는 이미 DSLR 카메라를 대치하는 단계지만, 나는 어쩐지 입체감이 떨어지는 듯해서 폰 카메라를 마뜩잖게 여기기 때문이다.

 

택시는 10분도 지나지 않아 우리를 화성 행궁 앞에 내려주었다. 행궁 앞 광장에서 나는 처음으로 수원 화성의 관람은 궁궐인 ‘화성 행궁’과 성곽인 ‘수원 화성’으로 나뉘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는 행궁만 구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적으로 지정된 수원화성행궁은 모두 576칸이나 되는 국내 최대 규모의, ‘임금님의 행차 시 거처하던 임시 궁궐’(행궁)이다. 정조(1752~1800)는 1789년 10월, 양주 배봉산에 초라하게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경기도 화성 화산(지금의 융건릉)으로 이장하며 ‘현륭원’으로 명명한 이후, 유수부의 관청으로 사용하고자 건립하였는데, 왕이 수원에 내려오면 머무는 행궁으로도 사용했다.

 

정조는 수원 도호부(都護府)를 화성 유수부(留守府)로 승격하여 위상을 높인 한편, 1795년 화성행궁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치르기 위하여 건물의 이름을 바꾸거나 새로 지었다. 행궁은 1796년에 전체 600여 칸 규모로 완공되었는데, 정조는 1800년(정조 24년) 1월까지 12년간 13차례에 걸쳐 능행(陵幸)하였으며, 이때마다 여기 머물렀다. 1795년에는 화성행궁 봉수당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기념하는 진찬연을 여는 등 여러 가지 행사를 거행하였다.

 

비극의 가족사, 그 트라우마를 넘어선 능행과 행궁

 

원래 행궁(行宮)은 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을 이르는데, 그 용도에 따라서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위급함을 피하고 국사(國事)를 계속하기 위해 마련된 행궁으로는 강화행궁, 의주 행궁, 남한산성 행궁 등이 있고, 휴양을 목적으로 설치된 행궁으로는 온양행궁이 있다. 그리고 왕이 지방의 능원(陵園)에 참배할 때 머물던 행궁으로 수원의 화성행궁이 있다.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 1년(1801) 행궁 옆에 화령전(華寧殿)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眞影)을 봉안하였고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다. 화성행궁은 조선 시대 전국에 조성한 행궁 가운데서 가장 돋보이는 규모와 격식을 갖추었으며, 건립 당시의 모습이 <화성성역의궤>와 <정리의궤>에 그림으로 남아 있다.

▲ 화성행궁은 건립 당시의 모습이 <화성성역의궤>와 <정리의궤>에 그림으로 남아 있다.

19세기 말까지 궁실이자 관청으로 제 기능을 했던 화성행궁은 1905년 화성 유수부의 객사인 우화관에 수원 공립소학교가 들어서면서 훼손되기 시작했다. 1911년에는 봉수당은 자혜의원으로, 낙남헌은 수원군청으로, 북군영은 경찰서로 사용했다. 1923년에는 일제가 화성행궁 일원을 허물고 경기도립병원을 신축했다. 1919년 3월 29일에는 자혜의원에 검진받으러 가던 김향화를 비롯한 기생 30여 명이 경찰서(북군영)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다. [관련 글 : 기미년, 기생들도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광장 중앙의 정문(旌門)을 지나면 방문객을 맞는 누각이 행궁의 정문 신풍루(新豐樓)다. 조선 정조 13년(1789)에 수원 유수부의 관청 건물을 세우면서 그 정문으로 지었다. 처음에는 진남루(鎭南樓)라 부르다가 1795년에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면서 신풍루로 바꿨다.

 

정조의 13차례 능행과 행궁

 

건물은 2층의 누각 구조로 아래층은 출입문으로 쓰고, 위층에는 큰 북을 두어 군사들이 주변을 감시하고 신호를 보내는 용도로 사용했다. 문루 좌우에는 행랑(대문간에 붙어 있는 방)을 두었고, 양쪽 끝에는 군영을 배치해서 경호 체제를 갖췄다.

 

문루 좌우에 배치한 건물이 남군영(南軍營)과 북군영이다. 약 100명의 군사가 교대로 행궁을 지켰다. 남군영은 국왕 친위 부대인 장용영 외영(壯勇營外營 : 정조의 친위 군사 조직 중 화성을 지키는 부대) 군사들이 주둔하는 건물이다. 장용영 군사는 왕이 화성에 내려올 때는 물론 평소에도 화성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우리는 이 건물에는 따로 들어가 보지 못했다.

▲ 화성행궁의 중삼문(中三門)인 좌익문(左翊門). '좌익'이란 "곁에서 돕는다"는 뜻이다.
▲ 행궁의 외삼문인 중양문. 이 문으로 들면 행궁의 정전 봉수당이 나타난다.
▲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 화성행궁에서 가장 위상이 높은 건물로 정조 13년(1789)에 고을 수령이 나랏일을 살피는 동헌으로 지었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와도 관련 깊은 행궁

 

신풍루 안으로 들어 중삼문(中三門)인 좌익문(左翊門)을 거쳐 내삼문(內三門) 격인 중양문(中陽門)을 지나면 행궁의 정전(正殿)인 봉수당(奉壽堂)에 이른다. 화성행궁에서 가장 위상이 높은 건물로 정조 13년(1789)에 고을 수령이 나랏일을 살피는 동헌으로 지었다. 처음 이름은 장남헌(壯南軒)이었으나 1795년 혜경궁 홍씨(1735~1816)의 회갑연을 계기로 봉수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궁궐에서는 대비나 상왕이 머무는 건물에 ‘목숨 수(壽)’ 자나 ‘길 장(長)’ 자를 붙이는 전통이 있어, 혜경궁 홍씨의 장수를 기원하며 이름을 바꾼 것이다.

 

봉수당은 정면 7칸, 일반 동헌과 마찬가지로 대청과 방을 둔 구조이나, 마당 한가운데에는 왕이 지나는 길인 어로(御路)를 두었고 건물 앞에는 넓은 기단인 월대(月臺)를 갖추었다. 일반 동헌에는 없는 어로와 월대가 갖추어진 것은 봉수당이 임금이 머무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 봉수당과 장락당 뒤편은 언덕 축대 위에는 숲이 우거져 있다.
▲ 봉수당 뒤쪽의 언덕 석축에 작약이 피었다 지고 있다.
▲ 화성부 유수와 가족이 거처하는 건물인 복내당의 부엌에는 당시의 부엌 살림이 연출되어 있다.
▲ 복내당의 부엌 한쪽에는 드라마 <대장금> 속 수라간과 수라상이 전시되어 있다.
▲ 복내당 앞의 유여택은 정조가 여기서 신하들의 보고를 받고 과거 시험에 합격한 무사들에게 상을 내리기도 한 곳이다.
▲ 봉수당 오른쪽의 낙남헌(洛南軒)은 정조 18년(1794)에 창건한 건물로 화성행궁에서 공식 행사나 연회를 열 때 사용하는 공간이다.

정조와 혜경궁 홍씨가 머문 처소

 

봉수당 왼쪽에 경룡관, 봉수당과 연결되어 있어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한 뒤쪽 건물이 장락당(長樂堂)이다. 장락당은 혜경궁 홍씨가 머물 처소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건물로 임금이 화성에 내려오면 머무는 처소로도 사용되었다.

 

장락당 왼쪽의 복내당(福內堂)은 화성부 유수와 가족이 거처하는 건물인데, 정조 18년(1794) 화성행궁에 장락당을 만들기 전까지는 왕의 숙소로도 쓰였다. 복내당 부엌에는 당시의 부엌 살림이 연출되어 있고, 드라마 <대장금> 속 수라간과 임금의 수라상이 전시되어 있었다.

 

복내당 앞쪽의 유여택(維與宅)은 조선 정조 14년(1790)에 지은 건물로, 화성 축성을 시작하던 1794년 가을에 증축되었다. 정조는 여기서 신하들의 보고를 받고 과거 시험에 합격한 무사들에게 상을 내리기도 했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한 뒤에는 화령전이 완성되기 전까지 현륭원 재실과 창덕궁 주합루에 있던 정조의 초상화를 모시는 공간으로도 사용되었다.

 

봉수당 오른쪽의 낙남헌(洛南軒)은 정조 18년(1794)에 창건한 건물로 화성행궁에서 공식 행사나 연회를 열 때 사용하는 공간이다. 벽이 없는 개방된 구조로 많은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데, 건물 앞에는 넓은 월대를 두어 격식을 높였고, 월대로 오르는 계단 양옆에는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궁궐 전각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건물로 원형이 잘 보존되었는데, 일제강점기에는 수원군청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 낙남헌 오른쪽에 외따로 떨어진 공간의 화령전(華寧殿)은 정조의 어진(御眞) 즉 초상화를 모시고 제사 지내던 곳이다.
▲ 화령전 내에 자리한 풍화당은 일종의 기로소(耆老所)로 지금의 경로당과 유사한 친목 기구이다.
▲ 1801년(순조 1) 창건된 화령전은 정조 이후 모든 왕이 직접 방문하여 제사를 지냈다는 점에서 그 위상이 높다. 정전인 운한각(雲漢閣).
▲ 운한각에 모셔진 정조의 초상화(어진).
▲ 운한각 마당의 왼쪽 담에 전사청으로 이어진 협문. 용마루가 성큼 높고 쓰인 자재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외따로 떨어진 공간에 어진을 모시고 제사 지낸 화령전

 

낙남헌 오른쪽에 외따로 떨어진 공간에 정조의 어진(御眞) 즉 초상화를 모시고 제사 지내던 화령전(華寧殿)이 있다. 1801년(순조 1) 창건된 화령전은 정조 이후 모든 왕이 직접 방문하여 제사를 지냈다는 점에서 그 위상이 높다. 정전인 운한각(雲漢閣)을 중심으로 어진을 임시로 보관하는 이안청(移安廳), 정전과 이안청을 잇는 행각(行閣)인 복도각(複道閣), 재실, 전사청과 향대청 등을 갖추고 내삼문과 외삼문까지 갖추었다. 운한각과 이안청·복도각은 창건 당시의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인정되어 2019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정조는 1800년 6월 28일에 49세 나이로 승하하였다. 정조의 무덤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 가까이에 조성하기로 하자 11세의 순조를 수렴청정(임금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을 때,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정사를 돌보던 일)하던 정순왕후는 현륭원 재실에 모시고 있던 정조 어진을 화성행궁으로 옮기고 별도로 어진을 봉안할 전각을 짓도록 했다. 이 명에 따라 순조 1년인 1801년 4월 29일 화성행궁 옆에 화령전을 완성하고 현륭원 재실과 창덕궁 주합루에 모셔져 있던 어진을 옮겨와서 봉안했다.

▲ 정문 신풍루 앞에 '품' 자 형태로 심어진 느티나무 세 그루의 한 그루.
▲ 신풍루 앞의 세 그루 느티나무 가운데 아래 두 개 입 구(口)에 해당하는 느티나무들.

날이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우리는 발길을 돌려 다시 왔던 길을 되짚어 정문으로 나왔다. 반대 방향에서 바라보는 신풍루 앞마당 느티나무는 한층 새로워 보였다. 수령 350~400년에 이르는 세 그루의 느티나무는 ‘삼정승(三政丞) 나무’로 불리는데, 조선 시대 궁궐 조성 제도에 따라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을 상징하며 ‘품(品)’ 자 형태로 심어졌다.

 

 ‘품(品)’ 자 형태로 심어진 세 그루 느티나무에 담긴의 정조의 지향

 

삼정승이 이 나무 아래에서 어진 인재를 맞이하고 올바른 정치를 베푼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데 이는 행궁을 조성한 정조의 개혁 정치에 대한 지향과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정조는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죽이는, 조선 왕실에서 가장 극적이면서 가장 비극적인 가족사 트라우마를 넘어야 했다. 화성 행궁은 규장각 설치 등 강력한 개혁 정치를 통해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개혁의 군주 정조의 유산이었다.

 

화성행궁은 정조가 상왕이 되어 수원에서 살아가려고 건설한 궁전이기도 했다. 아들 순조가 성인이 되는 갑자년(1804년)에 왕위를 넘겨주고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에 내려와 아버지 사도세자 무덤을 돌보며 살고자 했으나 그는 1800년에 등창이 악화해 패혈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개혁은 강력한 왕권 강화와 탕평책을 바탕으로 붕당의 폐해를 극복하고 문화적, 사회경제적 중흥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 이후 조선은 개혁이 중단되고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치기로 접어들며 급격히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정조의 죽음 이후, 110년 뒤에 조선(대한제국)은 일제의 침탈로 패망했다. 조선의 궁궐은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총독정치의 행정 조직(수원군청)으로도 쓰이기도 했다. 다행히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수원 화성과 화성행궁은 조선시대 <화성성역의궤> 등 철저한 문헌 고증으로 2024년, 1905년 우화관에 수원 공립소학교가 들어선 때로부터 119년 만에 완전한 모습으로 복원됐다.

▲ 북문이자 정문인 장안문. 성곽 복원이진행되던 중, 1997년에 수원 화성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19년 만의 복원과 화성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성곽과 주요 시설도 1970년대부터 1990년대에 걸쳐 성곽 주변 정비와 훼손된 성곽, 장안문, 팔달문 등의 복원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성곽 복원이 활발히 진행되던 중, 1997년에 수원 화성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수박 겉핥기로나마 화성 행궁을 돌아본 것은 괜찮은 선택이었다. 다음 기회로 미루어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어디 있던가 말이다. 다음에는 돌아보지 못한 나머지, 화성 성곽 등 주요시설을 찾으리라. 어둠이 희미하게 깔리는 거리로 나와 우리 3남매는 행궁 앞 감자탕집에서 식사를 겸해 소주를 마시고 나서 누님 댁으로 향했다.

 

 

 

2026. 6. 1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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