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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에선 ‘욕보시게’도 인사다

by 낮달2018 2021.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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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의 관계학 ‘욕보시게’

경상도 말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게 몹시 투박하고 거칠다는 점이다. 그것은 선의나 긍정을 표현할 때도 마찬가지다. 요즘 한 시트콤에서도 소개된 ‘문디(문둥이)’라는 표현은 그 좋은 예다. 지금은 ‘한센병’, ‘한센인’으로 순화되었지만 ‘문디’는 천형으로까지 불리었던 무서운 병이었다.

 

당연히 그런 병을 앓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은 금기라야 마땅하다. 그런데 현실은 반대다. 경상도 사람들은 그 말을 쉬 입에 올린다. 그 말은 대상에 대한 미움을 드러내는 부정적인 상황에서 쓰이는 예도 있지만, 그보다는 상대방에 대한 애정을 확인하는 표현으로 더 많이 쓰인다.

 

경상도 말의 ‘문디’

 

무관한 사이에서 상대방이 다소 얄미운 말이나 행동을 한다. 그런데도 그게 그리 싫지 않고 오히려 두 사람이 나누는 친교의 두터움을 드러낼 때 ‘문디’는 쓰인다. 그것은 서울 사람들이라면 가볍게 상대방을 때리는 시늉을 하면서 내뱉는 ‘깍쟁이’라는 말과 통하는 말이다.

 

표준어에서는 부정적인 뜻으로 쓰이는 말이 경상도에선 멀쩡하게 긍정적으로 쓰이기도 한다. ‘욕보다’가 그렇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욕-보다01’이라는 표제어로 오른 이 말은 ‘수고하다’의 경남 방언으로 풀이되어 있다. 그러나 경북에서도 이 말은 같은 뜻이다.

 

그러나 ‘욕-보다02(辱--)’로 오른 이 말의 본뜻은 “①부끄러운 일을 당하다. ②몹시 고생스러운 일을 겪다. ③강간을 당하다.”다. 그 ‘욕’은 말 그대로 몹시 나쁜 상황을 이른다. 부끄럽고 고생스러운, 말 그대로 ‘봉욕(逢辱)’인 것이다.

 

그러나 ‘욕-보다01’은 ‘수고하다’의 뜻으로 쓰이면서 경상도에서 수고하다가 담지 못하는 더 깊고 찰진 의미를 더한다. 한자를 좋아하는 이들은 ‘手苦하다’로 쓰고 싶겠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고유어로 보는 듯하다. “일하느라고 힘을 들이고 애를 쓰다”라는 뜻을 경상도 사람들은 수고하다 대신 ‘욕보다’로 쓰는 것이다.

 

군에서 제대한 젊은이에게, 또는 황망한 일을 당하고 그걸 마무리해야 했던 이에게 던지는 이 경상도식 인사에 담긴 우정과 위로는 참으로 정겹다. 의례적인 인사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냥 쉽게 ‘수고했다’고 하지 않고 굳이 ‘욕-봤다’고 말하는 까닭은 서로가 나누는 공감 때문이다.

 

“욕봤네, 이 사람아…….”

 

일을 치른 것을 욕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그 일의 성격을 다르게 보기 때문이다. 단순히 일상의 일을 치렀을 때 같은 표현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이 말이 쓰이는 상황은 좀 다른 경우가 많다. 그것은 굳이 감당하지 않아도 되는 일인데 부득이할 수밖에 없었다든가, 원치 않은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했다는 가외의 뜻이 붙어 있는 것이다.

 

공감의 관계, ‘욕봤다’

 

그 인사 속에는 그런 일을 치러야 했던 상대방에 대한 연민과 함께 그래도 그 일을 무사히 치러낸 데 대한 격려와 위로의 마음이 자리 잡고 있다. 당연히 자신이 그 일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해 미안해하는 마음도 포함되어 있다. 결국 이 인사법에는 이 지역 사람들이 나누는 ‘공감의 관계학’이 들어 있는 셈이다.

 

85호 크레인을 내려온 김진숙 위원에게, 오늘 입감된다는 통합민주당의 정봉주 전 의원에게 건네는 인사라면 마땅히 경상도 사람들은 그렇게 말할 것이다. 그 초인적 용기와 인내에 대해서, 그 분노와 모순에 대해서 마땅히 나누어야 하지만 그러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하면서.

 

“……욕보셨습니다…….”

“……욕보시겠습니다…….”

 

 

2011. 12. 26. 낮달

 

 

*2019년 3월 11일에 사전을 개편하면서 북한어, 방언, 옛말을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제외하였다. 따라서 현재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위 첫 번째 그림에서와 같은 풀이를 볼 수 없다. 현재 방언을 보려면 ‘우리말 샘(https://opendict.korean.go.kr/main)’에서 찾아야 한다. 202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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