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 ‘오늘’] 1598년 12월 16일, 노량 바다에서 이충무공 전사
1598년 12월 16일,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이 노량 앞바다에서 펼쳐진 해전에서 왜군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게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향년 53세. 일곱 해에 걸친 일본과의 전쟁, 임진왜란(1592~1598)에서 바다를 지켜낸 장수의 최후는 장렬했다.
이순신은 한성 마른내[건천(乾川)]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내고 소년기에는 외가인 아산에서 자랐다. 1576년(선조 9년), 무과에 급제한 이래 그 벼슬이 동구비보 권관, 훈련원 봉사, 발포진 수군만호, 조산보 만호,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거쳐 정헌대부 삼도수군통제사에 이르렀다.
이충무공, 무술년 노량 바다에서 지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것은 1592년 5월 23일에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끄는 왜군 함대 700척이 부산포를 침략하면서다. 전라 좌수사 이순신은 6월 16일, 옥포(玉浦)와 합포(合浦)에서 왜선 30여 척을 격파하고 잡혀 있던 포로들을 구해낸 옥포 해전으로 첫 승리를 거두었다.
7월 8일에는 거북선으로 사천(泗川) 선창에 있던 왜군을 공격하여 적선 30여 척을 쳐부순 사천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8월 14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육전에서 사용되던 포위 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펼쳐 일본 수군을 크게 무찔렀으니 이 전투가 한산도 대첩이다.
1593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면서 경상 우수사 원균과의 불화가 깊어졌고 1597년에는 출정의 명을 거부하였다 하여 투옥되어 혹독한 문초를 받았고, 권율의 진영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8월에 칠천량(漆川梁) 해전에서 왜군에 대패하여 전사하게 되자 선조는 수군을 폐지하려고도 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그 유명한 장계를 올려 수군 폐지가 불가함을 아뢰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남아 있나이다. 죽을힘을 다하여 막아 싸운다면 능히 대적할 수 있사옵니다. 비록 전선의 수는 적지만 신이 죽지 않은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순신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어 남아 있는 전선을 수습하여 무너진 조선 수군을 재건했다. 적의 정세를 탐지한 이순신은 명량(鳴梁)을 등 뒤에 두고 싸우는 게 매우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조선 수군을 우수영(右水營)으로 옮겼다.
10월 25일, 진도 울돌목에서 13척의 배로 130여 척의 왜군에 맞선 명량해전이 시작되었다. 이른 아침 일본 수군이 명량으로 진입하였는데 전투는 초반에는 조선 수군에 불리하였다. 그러나 조류(潮流)가 바뀌면서 133척의 전선을 거느린 왜군의 대오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격전 중에 안골포해전 때의 일본 수군 장수 구루시마(來島通總)를 잡아서 그 목을 베어 높이 매달자, 왜군의 사기도 무너졌다. 조선 수군은 현자총통과 각종 화전(火箭)을 쏘면서 맹렬하게 공격하여 적선 31척을 분파하자 일본 수군은 물러나 도주하고 말았다.
이 해전의 승리는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10배 이상의 적을 맞아 협수로(狹水路)의 조건을 최대한으로 이용해 얻은 것이었다. 명량대첩으로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제해권을 다시 장악했으며, 왜군의 수륙 병진 작전을 무산시켜 정유재란(1597~1598)의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1598년 12월 15일, 조선 수군 70여 척, 명나라 수군 400척, 군사 1만5천 명이 노량으로 진군했다. 이튿날 새벽부터 이순신은 명나라 진린(陳璘)과 함께 노량해협에 모여 있는 왜군을 공격하였다. 조선-명나라 연합함대는 일본으로 빠져나가려던 왜군 500여 척과 싸워 하룻밤 새 그 절반가량인 200여 척을 격파했다.
패색이 짙어진 일본 수군은 남은 배 150여 척을 이끌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연합함대는 정오까지 잔적을 소탕하며 추격을 시작하였다. 관음포로 달아나는 왜군을 추적하던 이순신은 왼쪽 겨드랑이에 적탄을 맞았는데 치명상이었다.
“일곱 해 만에 뭍과 바다가 처음으로 맑았다”
위당 정인보의 ‘이충무공 사적 비문’은 이 노량해전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18일 밤, 사천, 곤양으로부터 적선 500여 척이 남해 앞바다로 들어오니, 노량을 넘으면 순천이다. 공이 순천서 나올 도적들의 길에 복병을 늘어놓고 몸소 마주 나와, 들어오는 적을 노량에서 만났다. 그 밤에 달이 밝았다.
“이 원수가 없어진다면 죽어 한이 없겠나이다.” 하늘을 우러러 빌고 나서, 적선 200여 척을 무찌르는 동안에 먼동이 트기 시작하였다. 한창 독전하는 가운데 적탄이 좌액(左腋 : 왼쪽 겨드랑이)에 박혀 쓰러지면서, “싸움이 급하다. 나 죽었다고 말하지 말라.” 하고는 그만 숨이 끊기었다.
공의 아들 회와 조카 완이 옆에 있었다. 그대로 기를 두르고 북을 쳐, 한낮이 다 되기 전에 적선을 거의 다 깨뜨렸다.
만일 명군의 내통이 없었던들 순천 있던 적마저 살아가지 못하였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싸움이 지난 뒤는 여러 군데의 적이 한 번에 씻은 듯이 없어져서, 일곱 해 만에 뭍과 바다가 처음으로 맑았다.
- 위당 정인보,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충무공 사적 비문)’ 중에서
당시 도주하던 150여 척의 왜선 가운데 100여 척을 나포하니 왜군은 겨우 50여 척의 전선만이 도주했다고 한다. 이순신의 마지막 해전이 된 이 ‘노량해전’을 끝으로 일곱 해 동안 이어진 왜란은 끝나고 피폐해진 나라에 마침내 평화가 찾아왔다.
그의 부음을 들은 조정은 이순신에게 우의정을 추증했다. 이순신은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1등으로 녹훈되었으며, 좌의정이 추증되었고 덕풍 부원군으로 봉해졌다. 1643년(인조 21)에는 ‘충무(忠武)’의 시호를 받았고, 1659년(효종 10)에는 남해의 전적지에 그의 비석이 세워졌다.
1688년(숙종 14년)에는 명량대첩비가 세워졌고, 1793년(정조 17)에 이순신은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그는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기려져 통영 충렬사(1614년 건립, 사적 제236호), 여수 충민사(1601년 건립, 사적 제381호), 아산 현충사(1706년 건립, 사적 제155호) 등에 배향되었다.
이순신은 시문(詩文)에도 능하여 시조와 한시, <난중일기(亂中日記)> 등을 남겼다. 그의 유품 가운데 ‘이순신 난중일기 및 서간첩 임진장초’는 국보 제76호로,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고 있는 유물들은 보물 제326호로 지정되어 있다. 명나라 신종이 그에게 준 8종 15개 유물, 통영의 ‘충렬사 팔사품(八賜品)’은 보물 제44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순신은 자신에게 엄격하고 청렴하며 효심 깊은 선비의 모범이었다. 무장으로서도 그는 뛰어난 지도력과 지략을 갖추어 해전마다 승리를 거두어 적에 바다를 내어주지 않았다. 그가 세종 임금과 함께 가장 존경받는 역사적 인물이 된 것은 이 때문이다.
2016. 12. 1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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