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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역사 공부 「오늘」

[오늘] 1915년 연해주 13도의군 도총재 유인석 순국하다

by 낮달2018 2024.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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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 ‘오늘’] 1915년 1월 29일, 연해주 13도 의군 도총재 유인석 순국

▲ 유인석이 평정산에 거주하면서 펼친 의병활동을 기념하고자 조성한 공원. 요녕성 신빈현 평정산진.
▲ 유인석 초상. 조규환 그림

1915129, 중국 요녕성 관전현 방취구에서 국내외 의병의 단일 지휘계통을 지향한 연해주 13도의군(十三道義軍) 도총재를 지냈던 의병장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 1842~1915)이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1895년 을미의병의 최고 지도자로 호좌(湖左) 의병진()을 이끈 지 꼭 20년 만에 그는 망명지에서 쓸쓸하게 눈을 감았다. 향년 74.

 

 의암 유인석은 강원도 춘천 출신이다. 그는 일찍이 위정척사(衛正斥邪)사상의 원류인 화서(華西) 이항로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화서학파의 정통 도맥(道脈)을 이은 위정척사론자였다.

 

 그는 화서의 문하에서 김평묵과 유중교로부터 존화양이(尊華攘夷) 사상을 익혔는데 만동묘 철폐(1865)와 병인양요(1868)로 대내외적 위기가 고조될 무렵에 뼛속 깊이 화이론자(華夷論者)가 되어 있었다.

 

  강화도조약(1876) 체결을 앞두고 의암은 화이론을 기반으로 홍재구 등 강원도와 경기도 유생 46인과 함께 복합유생척양소(伏閤儒生斥洋疏)를 올려 조약 체결을 저지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의암은 김평묵과 유중교가 잇달아 세상을 떠나자 학파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어 유중교의 기반을 잇기 위해 1895년 제천으로 옮겨 활동하였다.

 

유인석이 의병항쟁의 뜻을 품게 된 것은 갑오개혁(1894) 이후 전통 복제(服制)를 서양식으로 바꾸는 의제(衣制) 개혁이 발단이었다. 이에 더하여 189510,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이 일어났고, 이에 분개한 문석봉이 유성에서 창의(倡義: 의병을 일으킴)하니 이것이 바로 을미의병의 효시다.

 

 김홍집 내각은 역법을 음력에서 양력으로 바꾸었고 12월에는 성인 남자의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령을 공포하였다. 개화 정부에게 단발은 구습개혁을 성공시키는 요체였지만 신체발부(身體髮膚)는 부모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유생들에게 효의 상징인 상투를 자르는 것은 인륜의 파멸로 인식되었다. 게다가 단발은 강제로 시행되었다.

 

“1115[신해], 임금이 먼저 단발하고 중외 신민들에게 단발령을 내렸다. 두루마기 착용을 발표한 뒤로 단발한다는 말이 차츰 퍼지더니, 10월 중에 왜국 공사가 빨리 단발하라고 임금을 위협했다. 이에 임금이 인산(因山) 뒤로 기한을 정했다.

 

이때 유길준과 조희연 등이 왜군을 인도하여 궁성을 포위하고 대포를 묻고는 이렇게 선언했다.

"머리를 깎지 않는 자는 죽이겠다."

임금이 길게 한숨을 쉬고는 정병하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대가 내 머리를 깎는 게 좋겠소."

정병하가 가위를 들고 임금의 머리를 직접 깎고 유길준이 태자의 머리를 깎았다.

단발령이 내리자 곡성이 하늘을 진동했고, 사람들이 분하고 노하여 숨이 끊어질 듯했다. 형세가 격변하자, 왜놈들이 군대를 동원하여 대기시켰고, 경무사 허진이 순검들을 이끌고 칼을 가지고 길을 막으며 만나는 사람마다 머리를 깎았다."

    - 황현, <매천야록>(허경진 옮김, 서해문집, 2009) 중에서

 

단발에 대한 반발은 개화 자체에 대한 반감으로 이어졌고 일본인화로 받아들여져 반일의식으로 발전했다. 척사파 유생들에게 단발은 곧 문명을 버리고 야만을 선택하는 행위였다. 을미년 세밑에 들불처럼 일어난 을미의병은 일본의 침략에 대한 저항이면서 동시에 봉건질서 해체에 대한 유생들의 위기의식을 가늠케 하는 것이었다.

▲ 말년의 주거지였던 만주 방취구에 세워진 의암 기념비.
▲ 유인석의 의병활동을 기념하고자 조성한 공원이 있는 요녕성 신빈현 평정산진 전

호좌 의병진, ‘복수보형’의 깃발 들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처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의암은 문인사우(門人士友) 수백 명을 모아 놓고 대규모의 강습례(講習禮)와 향음례(鄕飮禮)를 거행하였다. 이 행사는 대개 10일의 간격을 두고 정기적으로 열렸는데 이 행사가 곧 의병항쟁의 준비단계였다. 뒷날 창의에도 여기 참석한 인물들이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유인석 문인인 이춘영과 안승우가 18961월 경기도 지평(현 양평)에서 거의(擧義)한 뒤 제천으로 진격으로 군수 김익진을 축출하면서 이른바 호좌(湖左: 충청남도) 의병진이 시작되었다. 제천에서 서상렬, 이필희, 신지수, 이범직 등이 합류한 뒤 이들은 단양에서 관군과 일본군 혼성부대와 첫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의병들이 관군과 일본군의 반격에 밀려 경상도 풍기와 영동으로 퇴각하자 의암은 전력 분산을 막고자 이들을 영월로 모았다. 이필희 등의 간청으로 의암은 의병대장에 취임하여 복수보형(復讐保形: 국모의 원수를 갚고 의리를 지킨다)’의 깃발을 들고 격문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을 발표하고 의병항전에 나서니 189627(음력 1895.12.24.)이었다.

 

진실로 위급 존망의 때입니다. 각자 거적자리를 깔고 방패를 베개 삼아 물불을 가리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어렵고 위태한 곳이라도 뛰어들어 기어코 망해가는 나라와 천하의 도의(道義)를 다시 일으켜 하늘의 태양이 다시 밝도록 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한 나라만이 아니라 천하 만세에 전할 수 있는 공()이요, 업적이 될 것입니다.”

   - 격문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 중에서

 

▲ 유인석의 격문 '격고팔도열읍'

유인석의 호좌의병진은 18962, 충주성을 공략, 점령하여 친일 관찰사 김규식을 처단하고 격고내외백관을 발표하여 관리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호좌의병진은 한때 군사가 3천 명이 넘었으며 제천·충주·단양·원주 등지를 중심으로 한 중부지역 일대를 장악하여 친일 관찰사나 군수 등 토왜(土倭)’들을 처단하여 기세를 크게 떨쳤다.

 

 그러나 3, 충주성을 잃은 관군과 일본군이 성의 외곽을 포위하고 의병진의 보급로를 차단하자 의병진은 성을 포기하고 제천으로 돌아왔다. 호좌의병진이 제천에 집결해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문경의 이강년, 영춘의 권호선, 원주의 한동직, 횡성의 이명로 등 의병장들이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의병진에 합류해 왔다.

 

이후 호좌의병진은 5월 제천성이 함락될 때까지 약 3개월 동안 이곳을 중심으로 수안보, 가흥, 음성, 단양 등지에서 일본군 및 관군과 싸워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그 가운데서도 유격장에 임명된 이강년(18581908)의 활약이 특히 두드러졌다.

 

한편 그즈음 정부에서는 친일내각이 무너지고 친러내각이 들어섰다. 새 내각은 그동안 어수선해진 민심을 수습고자 단발령을 철회하는 한편, 각처의 의병을 해산하면서 호좌의병진에도 해산을 종용해 왔다. 관군과 함께 정부는 친일파들이 축출되고 단발령이 철회되어 명분이 없어졌으므로 의병은 해산되어야 한다고 압박해 왔다.

 

서간도로 망명했으나 의병을 해산하다

 

그러나 의암은 정부가 망국적 개화정책을 중단하지 않는 한, 일제 침략세력이 완전히 물러가지 않는 한 의병항전을 계속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관군의 대규모 공세가 시작되면서 의병진은 최후의 거점인 제천성을 잃어야 했다. 

▲ 의병들은 보잘것 없는 무기로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싸워야 했다. 주 무기인 화승총.ⓒ 독립기념관

제천전투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입은 의병진은 단양에 모여 전열을 가다듬었지만 전력의 손실이 컸다. 지속적 항쟁을 위해서는 새로운 전기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유인석은 의병진을 이끌고 서북행을 결심했다. .

 

의병진은 충주, 원주 등지를 전전하며 관군, 일본군과 소규모 전투를 벌이며 북상해 마침내 서북지방에 이르러 평안도 양덕, 맹산, 덕천 등지에 주둔하였다. 그러나 거기서도 의병진에 대한 관의 압박이 계속되었다. 더는 서북에 주둔하는 게 어렵게 되자 의암은 청()의 도움을 받아 재기를 준비코자 서간도로 망명했다.

 

 그러나 서간도도 약속의 땅은 되지 못했다.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 회인현에 들어갔으나 그곳의 관리들이 무기 소지 입국은 불법이라며 무장해제를 요구했던 것이다. 결국 유인석은 회인현 혼() 강변에서 219명의 의병을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의암의 을미의병 항쟁은 막을 내렸다.

▲ 춘천시 남면 가정리의 의암 유인석 묘역. 2005년 강원도에서 성역화하였다.

의병 해산 후 의암은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통화현 오도구에 정착했다. 이듬해(1897) 고종의 소명으로 일시 귀국했으나 곧 이곳으로 되돌아 왔다. 그의 문인사우들도 대거 서간도로 망명해 왔다. 이에 의암은 이들과 함께 원한을 품고 고통을 참으며 때가 오기를 기다릴 뿐이다.”라고 하면서 투쟁의 의지를 다졌다.

 

19007월 의암은 의화단의 난을 계기로 귀국하였다. 중국 북부지역이 열강의 각축장으로 변하게 되어 더는 거기 머무를 수가 없게 된 것이었다. 의암은 황해도 은율과 평안도 평산, 개천, 용천을 중심으로 제자들을 기르고 존화양이에 입각한 항일투쟁의식을 고취해 갔다.

 

1908년 연해주로 망명, 13도의군 도총재로 추대되다

 

고종의 강제퇴위와 정미7조약’(1907)을 계기로 유인석은 다시 연해주 망명길에 올랐다. 1908767세의 노구를 이끌고 그는 부산항에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간 것이다. 두 차례의 서간도 망명에 이은 세 번째 망명이었다. 배 안에서 선생은 자신의 비장한 심정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병든 한 몸 작기도 한데 휘달리는 범선 만리도 가볍구나.

국명(國命)은 지금 어떠한가. 천심(天心)이 이 길을 재촉하도다.

풍운은 수시로 변하고 일월만이 홀로 밝도다.

주위의 한가로운 소리에 나의 심정만 아득해진다.

▲ 13도의군을 결성한 주역들. 왼쪽부터 도총재 유인석, 이상설, 이범윤, 홍범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유인석은 이상설·이범윤 등과 함께 분산된 항일세력을 하나로 통합하고자 애썼다. 그 결과 19106, 연해주 의병세력의 통합체인 13도의군(十三道義軍)의 결성을 보게 되었으며, 이상설·이범윤·이남기 등의 추대로 도총재(都總裁)가 되었다.

 

13도의군 도총재란 지위는 의암이 을미년(1895)에 의병항전을 개시한 이래 일관되게 전개해 온 항일투쟁의 결과이며, 그의 항일투쟁의 대단원이었다. 유인석은 이때 통고13도대소동포(通告十三道大小同胞)’라는 포고문을 반포, 전 국민이 하나가 되어 마지막 항일 구국 전쟁을 벌이자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애써 통합한 조직인 13도의군이 본격적인 무력항쟁을 시작하기도 전에 경술국치’(1910)로 조국은 일제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일본이 러시아에 대한 외교적 교섭을 벌여 항일운동에 일대 탄압을 가하자 13도의군은 해체되는 과정을 밟았다.

▲ 의암 류인석 선생의 순국 100주년 기념 어록비. 묘소 입구

이에 유인석은 모든 지사와 사우(士友)들은 국내에 머물지 말고 간도로 건너와 함께 수의(守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연해주를 떠나 19143월 서간도의 봉천성 서풍현(西豊縣)에 정착했다. 같은 해 5월에는 마지막 여행을 떠나 관전현의 방취구(芳翠溝)에 도착하였고 마침내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하였다.

 

의암은 현지에 묻혔으나 1930년대 후손들이 그의 유해를 강원도 춘천으로 이장해 갔다. 춘천시 남면 가정리에 있는 그의 묘역은 2004년 강원의 얼 선양사업으로 사당과 기념관 등 공원으로 꾸며졌다. 정부에서는 의암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평민의병장 김백선의 처형

 

유인석은 일관하여 위정척사’, ‘존화양이정신을 바탕으로 철저하게 수구(守舊)적 자세를 견지하면서 일제에 저항하였다. 주자를 숭앙하는 유생으로서 그는 시대의 변화와 일제 침략에 맞서 흐트러짐이 없었지만 자신의 봉건적 가치관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대체로 의병부대에서는 지휘부와 병사들 간의 상호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는데 이는 양반 의병장들이 신분의식을 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유인석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는 양반 의병장 안승우에게 무례하게 굴었다는 이유로 평민 지휘관인 김백선(?~1896)을 처형했다. [관련 글 : 평민 의병장 김백선 군율로 처형되다]

 

김백선(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은 이춘영·안승우와 함께 전국에서 처음으로 지평(양평)의병을 일으켰고 400명의 포군(砲軍)을 이끌고 합류하여 제천의병에 실질적인 전투력을 제공한 용맹무쌍한 의병장이었다. 그는 호좌의병진의 충주성 전투에서도 선봉장으로 맹활약했다.

 

18963, 김백선은 가흥(영주)의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여 진지를 점령하던 중 본진에 요청한 원군이 오지 않아 점령에 실패하고 패퇴했다. 이에 김백선은 원군을 보내지 않은 중군장 안승우(1865~1896)에게 거세게 항의했다. 이에 유인석은 한낱 포수에 불과한 상민이었거늘 분수를 모른다며 군령위반죄로 다스렸다.

 

김백선의 처형은 휘하 의병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의진을 동요시켜, 제천의병의 급격한 쇠퇴를 가져왔다. 이 사건은 의병 내부에서 종종 발생하던 양반 유생과 평민·천민 간의 상하 신분 갈등이 표출된 대표적인 사건으로 이해되기도 하는데 이는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던 그 시대와 인물의 한계였다.

 

 

2018. 1. 27. 낮달

 

참고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나무위키>

· 한국사 콘텐츠

· 국가보훈처 대표 블로그 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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