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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반민족행위 처벌법’을 공포했지만…

by 낮달2018 2023. 9.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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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 ‘오늘’] 1948년 9월 22일,  반민족행위처벌법’ 공포

▲ 반민특위에 의해 친일 부역자들이 속속 체포되었다. 사진은 연행되고 있는 김연수와 최린.

1948년 오늘,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족행위처벌법’을 법률 제3호로 공포하였다. 제헌국회에서 ‘국권강탈에 적극 협력한 자, 일제 치하의 독립 운동가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박해한 자 등을 처벌하는 목적’으로 제정한 반민족행위처벌법(안)을 통과(9월 7일)시킨 지 15일 만이었다.

 

해방 공간에서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력한 친일 부역(附逆)세력에 대한 반감과 함께 이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미 군정 하의 한국 사회에 그러한 권한과 재량은 주어지지 않았다. 미 군정은 국가 관리에 필요한 인적 자원이 모자라는 상황에서 친일파 제거에 반대하였을 뿐 아니라, 군정에도 행정 경험을 가진 친일파를 폭넓게 고용하였기 때문이다.

 

친일파 단죄 여론, ‘반민족행위처벌법’으로

 

이들 친일파에 대한 제재가 처음 시도된 것은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미군정 시대의 입법기관)에서 입법의원 선거법에 ‘친일파의 공민권을 제한’하고자 하면서였다. 1946년에 치러진 선거에서 친일파 상당수가 입법의원으로 당선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1947년 3월 13일, 입법의원에서는 ‘부일(附日)협력자·민족반역자·전범·간상배(奸商輩)에 대한 특별조례법률’의 초안을 상정하였다.

 

여러 차례의 수정을 거쳐 전문 4장 12조의 이 법안이 제정(7월 2일)되면서 반민족 행위자들에 대한 숙청 문제가 다시 현안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과도입법의원은 군정의 자문기구에 불과했고 과도입법의원에서 제정한 법률의 인준권은 군정장관이 갖고 있었다. 미 군정은 결국 이 특별조례를 거부함으로써 이 법은 공포되지 못하였다.

▲ 반민족행위 조사특별위원회의 재판정. 방청객의 수가 유난히 많은 것이 특징이다.
▲ 친일파 명단 공개를 요청하며 시위를 하고 있는 이북5도민회 중앙연합회원들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8.15.) 후, 제헌의회 안에서 다시 친일파 처리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국회의 결의로 긴급 구성된 기초특별위원회는 군정시대의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모리간상배에 관한 특별법률 조례’안을 참고해 만든 전문 32조로 된 ‘반민족행위처벌법’ 초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심의 과정에서 일부 내용을 수정한 이 법안은 9월 7일 제59차 본회의에서 절대다수의 찬성으로 가결되었다. 일제에 부역한 친일파들을 조사하기 위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약칭 반민특위)’ 구성이 담긴 이른바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반민법이 공포된 뒤, 관련 사무는 급속도로 진전되어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자는 동의안이 가결(9.29.)되고 이를 바탕으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약칭 ‘반민특위’, 위원장 김상덕)가 정식 발족(10.23.)하였다. 특별재판부 재판장은 대법원장 김병로가 맡았다.

▲ 특별재판부 재판장 김병로(왼쪽)과 특위 위원장 김상덕
▲ 반민특위 조사관 김철호 임명장. 위원장 김상덕 명의다.

일제 강점기 동안 반민족행위로 민족에게 해를 끼친 자를 처벌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반민법은 ‘형벌불소급의 원칙’을 적용받지 않는다. 이 법의 제1장은 죄목과 형량을 규정하고, 제2장은 특별조사위원회, 제3장은 특별재판부 구성과 절차를 다루고 있다. [그림 참조]

법이 공포되면서 특별조사위원회가 설치되어 조사에 들어갔으나 방대한 업무를 처리하기에 단 10명의 국회의원으로는 역부족이었다. 특히 이 법의 표적이 된 친일세력이 노골적으로 저항하면서 조사를 방해하는 데다가 이승만 정부의 비협조 때문에 조사 활동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 정권을 중심으로 한 친일파 비호 세력과 반민특위 추진세력이 맞부딪친 첫 사례가 일제의 고등계 형사 출신의 노덕술 사건이었다. 노덕술이 체포된 지 사흘 만에 이승만은 국무회의에서 노덕술을 ‘정부가 보증’해서라도 석방할 것을 지시했고 그를 체포한 특위 관계자를 ‘의법 처리’하라고 지시하기까지 한 것이다.

 

반민특위, 혹은 역사청산의 좌절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1949년 6월 6일에는 내무차관과 치안국장, 시경 국장의 주도로 경찰이 반민특위 사무국을 습격하여 특별경찰대장과 대원들을 폭행하고 경찰서로 분산 감금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특위의 활동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특별경찰대가 강제해산 당하게 되어 반민특위는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이후 특위의 업무는 대법관과 대검찰청에서 행하고 반민족 행위자에 대한 기소는 1949년 8월 31일까지 해야 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다. 결국 ‘식민지 역사청산’이라는 ‘민족적 과제’에 갈음되는 반민족 행위자 처벌은 서둘러 종결되었다.

▲ 일제 고등계 형사 출신의 노덕술에게 이승만은 모두 세 차례에 걸쳐서 훈장을 수여했다.

이승만으로부터 ‘반공 투사’라고 비호를 받았던 노덕술은 반민특위 해체로 풀려나 경찰직으로 복귀했고, 이후 고위간부로 영전을 거듭했다. 최근 <뉴스타파>의 보도에 따르면 이승만은 그에게 세 차례에 걸쳐 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1951년 반민법 폐지, 친일파 복권의 역사로

 

특위 해체 이후에도 대법원과 대검찰청에서 반민족 행위자에 대한 공판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사람은 10여 명에 불과했다. 식민지 역사청산이라는 민족적 과제로 제정, 시행되었던 반민족행위처벌법은 1951년 2월 14일 법률 제176호로 폐지되었다. 제정된 지 불과 29개월 만이었다.

 

결국, 일제 강점기의 친일 부역자를 단죄하여 식민통치의 치욕스러운 과거와 단절하고자 한 반민족행위 조사특별위원회의 노력은 좌절되었다. 그리고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 적극 협력하고 민족을 등졌던 이들 반민족 행위자들은 여전히 주류 계급으로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 <진상> 1957년 12월호,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증언하는 김상돈 반민특위 부위원장. ⓒ 민족문제연구소

그리하여, 우리 역사의 행간에서나 배우는 광복 이후의 역사는 바로 그 반민족 행위자들 ‘복권의 역사’다. 그것은 또 국권을 빼앗긴 통한과 치욕의 역사에 풍찬노숙으로 맞서 싸워온 유·무명 선열들의 자취를 지우고 분칠하는 ‘국정화’의 전사(前史)가 되었다.

 

 

2016. 9. 21. 쓰고

2023.9.20. 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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