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역사 공부 「오늘」

[오늘] 42명의 죽음 … 실미도의 비극

by 낮달2018 2023. 8. 23.
728x90

[역사 공부 ‘오늘’] 1971년 8월 23일, 실미도 사건-군사모험주의의 파국

▲ 흔히 684부대라 불린 실미도 부대의 정식 명칭은 '2325전대 209 파견대'(1968.4~1971.8)였다 .

1971년 8월 23일은 월요일이었다. 이날 새벽 신원 미상의 무장 군인 23명이 인천에서 탈취한 버스로 서울로 진입하여 대방동 유한양행 대로에서 군경과 대치하다 수류탄으로 자폭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대부분의 일간지에서 ‘무장 공비 침투’로 보도한 이 사건이 바로 ‘실미도(實尾島) 사건’이다.

 

이들은 경기도 부천군 용유면 무의리(현 인천광역시 중구 무의동) 실미도 소재 공군 특수부대에서 훈련을 받고 있던 병사들이었다. 흔히 684부대라 불리는 이 부대의 정식 명칭은 ‘2325전대 209파견대(1968.4~1971.8)’였다.

 

1·21 사태에 대응해 만들어진 비밀부대

 

1968년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군 부대 무장 게릴라 31명이 휴전선을 넘어 청와대로 진격하다가 군경에 진압된 이른바 1·21 사태(김신조 사건)의 충격은 사회 전체를 반북 분위기로 몰아넣었다. 이에 박정희 정권은 ‘향토예비군’을 창설하고 고등학교 ‘교련’ 과목을 신설하는 등 ‘사회의 병영화’로 대응했다.

 

그해 4월, 총원 31명으로 김일성 주석궁 폭파부대가 인천 앞바다 무의도의 부속 섬인 실미도에 창설되어 북파공작원 훈련을 시작했다. 이들 부대원은 훈련 과정에서 7명이 사망할 만큼 혹독한 지옥훈련을 받았으나, 1970년대 들어 남북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작전 자체가 불확실해져 버렸다.

▲ 인천 앞바다 무의도의 부속 섬인 실미도에 총원 31명으로 김일성 주석궁 폭파부대가 세워졌다.

지옥훈련이 이루어지면서 자행된 인권 유린에도 불구하고 부대에 대한 지원은 형편없었다. 대원들의 사기는 떨어질 대로 떨어졌고 부대나 대원들의 미래는 전망하기 어려울 만큼 암울했다. 결국, 부대 창설 3년 4개월 만에 대원들은 자구책을 찾아 나섰는데, 그게 무장 난동으로 치닫게 된 것이었다.

 

1971년 8월 23일 6시께 부대원 24명은 교관과 기간병 18명을 살해하고 섬을 빠져나왔다. 그 과정에서 동료 1명을 잃은 부대원들은 12시 20분께 인천 옥련동 독부리(옹암) 해안에 상륙한 뒤 인천 시내버스를 탈취하여 ‘평양 대신 서울’로 향했다.

 

이들은 자신들을 북파공작원으로 양성하고자 한 주체가 박정희 정권이란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들은 인질로 잡혀 있던 시민들에게 ‘청와대로 간다’라는 사실을 명확히 밝혔었다. 그러나 당시 언론에 이러한 사실은 전혀 보도되지 않았다.

 

희망 잃은 대원들의 자폭으로 종료된 비극

 

인천을 미처 빠져나오기도 전에 육군과의 총격전으로 타이어가 터져서 버스가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이들은 수원-인천 간 시외버스를 다시 탈취했다. 이들 무장 부대원들이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현 동작구 대방동) 유한양행 건물 앞에 도착한 것은 오후 2시 15분께였다.

 

그러나 이들의 전진은 30사단 예하의 육군 병력에 포위, 저지되었고, 더는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부대원들은 버스 안에서 수류탄을 터뜨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생존 부대원 4명은 체포되어 군사재판을 받고 1972년 3월 10일 처형되었다.

▲ 실미도 대원들이 탈취한 서울-인천 간 시외버스

실미도 부대의 기간병력 18명과 탈출 부대원 20명이 목숨을 잃은 이 한여름 대낮의 참사가 일어나 종료되는 데에는 9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 어처구니없는 사건, 사고에 대한 보도는 지리멸렬했다. 군부 독재 시기였고, 반북 분위기가 팽배한 상황에서 대부분 언론은 당일, ‘대간첩대책본부’의 발표를 그대로 인용해 ‘무장공비의 침투’라고 보도하는 데 그쳤기 때문이다. [관련 기사 : 군부에 갇힌 언론 ‘실미도’는 없었다]

▲ 당시 언론 보도는 철저하게 대간첩대책본부의 발표를 인용했을 뿐이었다.

이튿날 언론들은 일제히 공군 관리하에 있던 ‘군 특수범’, 즉 복역 중인 범법 병사들이 처우에 불만을 품고 난동을 벌인 사건으로 정정 보도했다. 박정희 정부는 이 사건을 ‘실미도 난동 사건’으로 규정하고 부대의 진상을 은폐하였다.

 

30여 년간 묻혀와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졌던 실미도 사건의 실상이 다시 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1999년 684부대의 실상을 소재로 하는 백동호의 소설 <실미도>가 발표되고 이 소설을 바탕으로 한, 강우석 감독의 영화 <실미도>가 개봉(2003)되면서다. (영화는 이들의 절망에서 비롯한 실존적 선택을 마치 액션 드라마처럼 그리고 있다.)

▲ 영화 <실미도>(2003)는 대원들을 범죄자로 그리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영화 <실미도>에서는 북파공작원 선발 과정에서 사형수, 조폭, 흉악범 등을 포섭해 특수부대를 만든 것으로 그려지고 있으나 실상 부대원들은 평범한 농민, 일용직 노동자들이었다. 당시 이 사건을 수사했던 공군 감찰부장 김중권은 ‘부대에 범죄자 출신은 없었다’라고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빈손으로 끝난 군사모험주의

 

영화가 나온 지 13년, 사건 발생으로부터 45년이 훌쩍 흘렀다. 그러나 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유족들에 대한 보상 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사건 수사기록과 공소장, 판결문 등은 여전히 군사기밀로 묶여 있고 관련자들의 증언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1968년의 청와대 습격 사건(1·21사태)이 분단 20년을 넘기면서 초조해진 북한 정권이 감행한 군사모험주의의 산물이라면 실미도 사건은 남쪽이 기획했으나 미수에 그친 박정희 정권의 군사모험주의적 대응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 무모한 군사 대결은 삼엄한 남북 대치상황에 어떤 돌파구도 마련하지 못한 채 파국으로 마감되었을 뿐이다.

 

 

2016. 8. 22. 낮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