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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술, 79년 만의 명예 회복, 이제 독립운동가로 ‘복권’만 남았다

by 낮달2018 2025. 12. 27.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의 이관술 선생, 재심에서 무죄 선고

▲ 1946년 5월 조선정판사 지폐위조 사건 재판이 열리는 법정 밖 담장에 올라선 시민들. ⓒ 서울중앙도서관
▲ <한겨레> 이관술 관련 기사(2025.12.22.)의 PDF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의 주범으로 몰려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한국전쟁 중에 처형된 독립운동가 이관술 선생(1902~1950)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1947년에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난 뒤 무려 79년 만이다. 이례적으로 검찰도 무죄를 구형했고, 재판부도 이를 받아들여 무죄를 선고했다. [관련 기사 : 79년 만의 명예 회복조선정판사 사건이관술 선생 재심서 무죄]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의 이관술, 재심에서 무죄 선고

 

지난 12월 22일,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재판장 이현복)는 이관술의 ‘통화위조’ 등 혐의 재심 사건 선고공판에서 선생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조선공산당 간부였던 이관술 선생은 1945년 말에서 1946년 초 조선공산당 자금 마련을 위해 조선정판사에서 인쇄 시설을 이용해 지폐를 위조했다는, 이른바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에서 주범으로 몰려 유죄 판결을 받았다.

▲ <이관술, 1902-1950> 표지의 이관술 . 1933년 수감되었을 때의 사진.

조선정판사는 일제가 조선은행권을 인쇄하던 곳인데, 해방 후 조선공산당이 접수하면서 공산당 본부로 쓰이고 있었다. 이 사건으로 해방 직후 38선 이남에서도 자유롭게 활동하던 공산당은 불법화되었다. 이관술은 1947년 무기징역이 확정됐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고 있었다.

 

1950년 6·25전쟁의 개전 초기인 7월 8일, 이관술은 대전 골령골 뒷산 계곡에서 2천여 명의 좌익 사범과 함께 처형되었다. 향년 48세, 15년간의 항일 투쟁, 9년여의 징역과 10년여의 수배 등으로 점철된 파란 많은 혁명가의 삶은 비극으로 끝났다.

▲ 이관술 무죄에 이르는 여정에 큰 도움이 되었던 임성욱 교수의 저서.

선생의 외손녀(막내딸 이경환의 딸) 손옥희는 제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에 이 사건을 접수했으나, 진화위는 지난 5월 조사 중지를 결정했다. 그러나 10월 13일, 수사기관의 불법 구금 등 위법한 증거 수집 등을 이유로, 손옥희가 2023년 7월에 청구했던 ‘재심의 개시’가 결정됐다.

 

검찰도 무죄 구형, 재판부도 유족들 주장 수용해 무죄 선고

 

검찰은 지난 15일 결심 공판에서 “판결문과 현존하는 일부 재판 기록, 당시 언론 기사와 연구 서적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했다”라며 무죄를 구형했고 재판부도 유죄의 증거로 사용된 공동 피고인들의 자백 진술이 부당하게 장기화한 신체 구속 상태에서 이뤄졌다는 유족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현행 대한민국 헌법과 형사소송법을 기초로 형성된 인신구속에 관한 조항을 이 사건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고 판단된다”라며 “공동 피고인의 진술은 수사에 관여한 사법경찰관이 자행한 불법 구금 등 직권남용죄 범행을 통해 이뤄진 것으로 위법수집 증거에 해당함이 명백히 인정된다”라고 밝혔다.

 

재판부는 선고에 앞서 “험난하고 지난한 과정이었을 텐데 본안 심리를 거쳐 판결 절차에 이를 수 있도록 노력해 주신 청구인과 변호인 쪽에 경의를 표한다. 중립적 입장에서 협조해 준 검찰에도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라며 “이 판결이 이 선생과 유족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길 희망한다”라고 밝혔다. 법정을 가득 메운 방청객들은 무죄 선고에 박수로 화답했다.[이상 위 <한겨레> 기사 참조]

▲ 22일 오전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고 이관술 선생 외손녀 손옥희(65)씨가 재심 선고를 마치고 나온 뒤 눈물을 흘리고 있다. 한겨레 사진

이날 선고 뒤,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손옥희는 눈물을 흘리며 소회를 밝혔다고 한다. 무죄 선고는, 2005년부터 어머니를 대신하여 외조부의 신원을 위한, 손옥희의 20년에 이르는 긴 여정이 마침내 마무리된다는 의미에서 그를 격동시켰을 것이다.

 

2021년 4월, 우연히 그가 이관술 선생의 외조부라는 사실을 알고 울산을 찾아 그의 안내로 선생의 자취를 돌아본 나는 <오마이뉴스>에 ‘국내파 사회주의자들의 최후 집결체’ 경성콤그룹의 핵심 이관술과 그 유족 이야기를 썼다. [관련 글 : 그 딸의 좌익 아버지 찾기와 역사적 진실]

 

2015년 손해배상소송의 대법원 승소가 명예 회복의 첫걸음

 

그가 2013년에 이종사촌과 함께 제기한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소송이 2015년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에 이른 게 그가 전력투구해 온 외조부 명예 회복의 첫 단추였다면, 이번 재심에서 무죄 선고는 그 마무리로 들어가는 절차일지도 모른다.

▲ 경성콤그룹 성원들. 이재유는 옥사, 박헌영은 북에서 처형, 이현상은 지리산에서 사살, 김태준은 총살되었다.

1930년대 국내 저항운동의 중심, 경성콤그룹을 이끈 핵심 인물 이관술

 

학암 이관술은 경성 트로이카(조선공산당 경성 재건 그룹, 1933)의 일원이었던 이재유(1905~1944)가 서대문경찰서에서 탈출한 뒤 잠행 시기를 함께한 동지로 경성 트로이카를 계승한 경성콤그룹(1939)을 이끈 핵심 인물이었다.

 

해방 때까지 일제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 ‘변장술의 귀재’라 불릴 정도의 도피술로 일경을 농락하며 조직을 이끌었고, 고문왕 노덕술의 고문에도 굴하지 않은 불사조라는 칭호를 받았으며, 해방 후 첫 정치 여론조사에서 여운형, 이승만, 김구, 박헌영에 이어 5위에 오를 만큼 존경받은 인물이었다.

▲ 주변 보수세력의 반발로 땅속에 묻혔다가 22년 만에 지상으로 나온 학암 이관술 유적비.

비록 억울한 누명을 벗긴 했지만, 자신이 선택한 이념 때문에, 이관술은 여전히 고향인 울산에서조차 경계 받는 인물이다. 1992년 문민정부에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서훈 방침을 발표하자 고무된 유족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1996년 사촌 동생 소유의 주유소 안쪽에 세웠던 빗돌은 지역 반공 보수 성향 단체의 반발과 강제 철거 협박, 경찰과 안기부의 압력 등 탓에 이듬해 자진 철거되어 땅속에 파묻혀야 했다.

 

파묻혔다가 다시 세워진 학암의 빗돌은 언제쯤 이웃들의 기림을 받을 수 있을까

 

빗돌 ‘우국지사 학암 이관술 유적비’가 근처에 다시 세워진 것은. 그로부터 22년 뒤인 2019년이 되어서였다. 4년 전 손옥희와 함께 찾은 학성 이씨 집성촌,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면 입암리에 들렀을 때, 이미 남의 소유가 된 생가 부근에 다시 세운 빗돌이 화사한 벚꽃 사이로 외로웠던 까닭이 거기 있다.

 

재심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모바일 메신저로 전해 받았지만, 까맣게 잊고 있다가, 어저께 그 전날에 못 읽은 <한겨레>를 읽다가 이관술 선생의 재심 무죄 선고 기사를 보았다. 바로 통화를 했는데, 그의 목소리는 뜻밖에 차분했다. 그도 불과 석 달에 걸친 이 급격한 반전이 잘 믿기지 않았던 모양인지 다음 날 아침 일어나 볼을 꼬집어보기도 했다면서 그는 티 없이 웃었다.

 

학암은 1930년대 사실상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 등으로 명맥을 이은 국내 저항운동의 핵심 인물로, 일제 식민 통치에 맞섰다. 그러나 동시대에 함께한 동지인 이재유(2006 독립장)와 달리 해방 후 중범죄자로 몰려 투옥되었다가 학살됨으로써 지금껏 서훈에서도 제외되었었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주역이었지만, 남북분단에 반대해 북을 오갔다는 이유로 1948년 징역 7년 형을 선고받아 광주형무소에 수감돼 있다가 1950년 7월 20일께 무등산으로 끌려가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총살된 장재성(1908~1950) 선생에게 서훈이 이루어지지 않은 사례와 견주어진다.

 

외조부의 무죄에 이어 외손녀는 <민족문학사상>의 신인상 수상

 

그가 느끼기에 검찰도 매우 협조적이었고, 재판부도 유족에게 여러 차례 발언 기회를 주고, 발언을 경청하면서 공감하는 듯했다고 했다. 나는 남은 건 이제 서훈을 신청하는 일이라고 했더니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포스터 하나를 모바일 메신저로 보내왔는데, 그건 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학연구회에서 펴내는 <민족문학사상> 출판기념회 소식이었다.

▲ 외조부 신원을 위해 싸워온 외손녀는 민족문학사상의 신인상을 받았다.

전혀 모르는 내용도 아니고 해서 훑어보다가 신인상 시상식이 겸해지는데, 거기 수상자 이름에서 그의 이름을 찾아냈다. 손옥희는 수필 부분 신인상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책이 아직 시판 전이어서 작품을 읽어보지는 못했으나, 미루어 짐작하건대, 외조부의 명예 회복을 위한 여정을 그린 게 아닐까 싶다.

 

나는 “재판부가 무죄 선고를 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마땅한 일인데 그게 이루어지는 데 78년이 걸렸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외조부의 신원을 이루어낸 똑똑하고 야무진 외손녀를 둔 이관술 선생도 아마 대견하고 기특해하실 겁니다”하고 진심으로 치하했다.

 

비록 정신이 맑지는 않지만, 이로써 한스러운 일생의 아퀴를 지을 수 있게 된 모친도 행복해하실 듯하다는 인사도 놓치지 않았다. 모친의 병세는 더욱 깊어졌으나, 마음에 한 가닥 부친의 무죄 선고를 거둘 공간이 있을 거라며 그는 말꼬리를 흐렸다.

 

학암의 서훈, 독립운동가로 온전히 ‘복권’되는 시간을 응원

 

무관한 범죄의 주범으로 몰려 감옥에 갇혔다가 학살당한 외조부는 무죄 선고로 명예를 회복했고, 20년간 일념으로 달려온 외손녀는 수필가로 등단하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라며 나는 덕담을 건넸다.

 

그가 무죄 선고 후 법원 앞에서 밝힌 소회는, 그 20년 여정을 함축하고 있는 듯 보인다. 평범한 중등 교사로 살아오면서 그가 체화한 영남 지방 특유의 보수적 정서는 외조부의 삶과 투쟁을 돌아보고, 분단과 전쟁을 낳은 역사를 살피면서 깨어졌고, 삶과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도 반전을 겪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전 가족이, 마을 전체가 풍비박산되고 어머니 영혼마저도 풍비박산된 상태에서 힘들게 살아왔지만 80년 가까이 된 지금 대한민국 정부가 무죄를 내려준 것에 대해 무척 감사드린다. (……) 이 사건은 미군정이 정치적인 입장을 지키기 위해서 민중을 탄압하기 위한 첫 번째 사건(이다). 오늘, 이 사건을 계기로 그와 관련된 모든 사건이, 미군정이 만든 흔적들을 모두 지울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그가 다시 들메끈을 고쳐 매고 떠나는,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선생의 서훈, 독립운동가로 복권되는 여정을 응원해 마지않는다.

 

 

2025. 12. 2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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