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감옥에서 왕산 허위(許蔿, 1854~1908) 선생 교수형으로 순국

10월 21일, 운강 이강년에 이어 경성감옥에서 왕산 허위(許蔿, 1854~1908) 선생이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지난 6월 11일, 경기도 양평군의 산중 마을 유동(柳洞)에서 일본군 헌병에게 붙잡혀 온 지 133일 만이었다. 향년 54세.
왕산은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 출신이다. 그의 항일투쟁은 창의(倡義)로부터 시작된다. 그가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킨 것은 1896년, 1년 전의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 반포로 전국에서 창의가 이어지던 때의 이른바 '을미의병'이었다. 인근 유생들과 김천에 수백의 장정을 모아 군사를 일으키니 이때 그의 나이 마흔하나였다. [관련 글 : ‘구미’ 하면 박정희? 이 사람도 기억하라]
처음, 김산(金山) 의진은 이기찬(1993 애국장)을 대장으로 김산(김천)과 성주를 거점으로 하여 대구부로 진격하려 했다. 그러나 대구의 관군이 출동하고 경군(京軍)이 합세하여 공격해와 성주가 무너지고 일부 장령이 붙잡혔다.
의진에서는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여 재반격을 준비했으나, 이때 고종이 내밀봉서(內密封書)로 내린 해산 명령을 받은 허위는 그만 자진하여 의진을 해산하여 귀향하고 말았다.

1899년 2월, 왕산은 조정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여 원구단 참봉을 시작으로 관계에 진출했다. 곧 성균관 박사, 1904년 중추원 의관·평리원 수반판사·평리원 재판장·의정부 참찬 등을 역임하고, 1905년 비서원승이 되었다.
이때 그는 일본의 국정 간섭에 대한 죄상을 열거한 격문을 살포하여 찬정 최익현(1834~1907), 판서 김학진과 함께 체포되었다가 4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그 뒤 일본인들이 회유책으로 그를 칙임관 2등으로 서품하였으나 거절하였다.
1905년 11월(양력)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경상·충청·경기·강원·전라도 등지를 돌아다니며 유인석 등 여러 지사와 만나 의거를 결의하였다.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9월 민긍호·이강년 등의 의병부대와 서로 연락하면서 경기도 연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십삼도창의군 군사장, 뒤에 총대장으로 서울 진격
1907년 가을에 전국 각지의 의병들이 양주로 집결하여 13도 의병 연합부대를 편성하니 이가 곧 십삼도창의군이다. 이때 이인영이 원수부 십삼도총대장이 되고 진동(鎭東:경기·황해)창의대장 허위는 군사장(軍師長)이 되었다.
연합부대가 대오를 정비, 서울로 진격할 때, 정예병사 300명의 선두에 서서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진출하여 전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이 부근 동대문 주변의 도로가 뒷날 ‘왕산로(旺山路)’가 된 까닭이다.

그러나 서울 진공 작전은 두 개의 난관과 맞닥뜨린다. 총대장 이인영의 부친상을 당해 문경으로 귀향하면서 지도부의 문제로 전력을 한곳에 집중하기 어려워진 것이 그 하나다. 두 번째 난관은 창의군의 서울 진공 계획이 누설되어 일제가 이미 방어책을 마련해두고 있다는 점이다.
<대한매일신보>와 같은 언론에서도 이미 두 달 반 전에 의병의 서울 진공 작전을 보도하고 있던 터라 일제는 서울 외곽의 방어태세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일본군은 의병의 진출로를 차단하고 한강의 선박 운항을 금지하고 동대문에 기관총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결국, 동대문 밖 30리 앞 지점까지 진격했던 왕산의 선발대는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전력의 열세로 패하고 말았다. 뒤늦게 도착한 본대 역시 작전을 펼치지도 못한 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13도 연합부대의 진공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고 각 부대는 흩어져 독자적인 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왕산은 의병들을 수습한 뒤, 임진강 방면으로 나아가 박종한·김수민(1962 독립장)·김응두·이은찬(1962 대통령장)의 의병부대들과 함께 새로운 임진강의병연합부대 편성하였다. 의병들은 정신무장을 가지런히 하고 군율을 엄하게 하여 민폐를 끼치는 일이 없었다. 일대에 군정(軍政)을 실시하여 의병부대에 쓰이는 모든 군수물자는 군표(軍票)를 발행하여 조달하였다.

의병연합부대는 유격 전술로 소단위의 게릴라 부대를 편성하여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연합부대를 지휘하면서 1908년 2월 가평·적성 방면의 의병 5천여 명을 집결시키고, 군사훈련을 시행하고 무기를 제조하였다.
4월에는 보다 각지 의병들의 힘을 모으기 위해 이강년 등과 함께 전국의 의병부대에 통문을 보내고, 5월에는 박노천(朴魯天)·이기학(李基學) 등에게 30개 조에 달하는 한국민의 기본 요구 조건을 통감부에 제출하게 하기도 하였다.
새로운 항일전을 준비하고 있던 6월 11일, 왕산은 경기도 양평군의 산중 마을 유동(柳洞)에서 일본군 헌병에게 붙잡혔다. 의병 한 사람을 붙잡아 회유와 협박으로 은신처를 알아낸 헌병들이 급습한 것이었다.
왕산은 한때 1899년 설치된 최초의 근대 사법기관 평리원(平理院)의 수반판사·평리원 재판장을 지냈다. 평리원 재판장은 오늘의 대법원장에 해당하는 자리였다.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3년 만에 그는 일본인 재판관에게 재판을 받는 처지가 된 것이었다.
구한말 대법원장 지낸 왕산, 일제의 법정에 서다
재판에서 일본 재판관이 “의병을 일으키게 한 것은 누구이며 대장은 누구냐”고 묻자, 왕산은 웃으면서 “의병이 일어나게 한 것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며 대장은 바로 나다”라고 대답했다. “왜냐”고 묻자 “이토가 우리나라를 뒤집어 놓지 않았다면 의병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이토가 아니고 누구겠냐?”고 반문했다.
10월 21일 정오에 왕산은 경성감옥의 교수대에 올라갔다. 죽음 앞에서도 그는 의연하고 대담했다. 왜승(倭僧)이 불경을 읽으며 명복을 빌어 주려 하자 그는 “충의(忠義)의 귀신은 스스로 마땅히 하늘로 올라갈 것이요, 혹 지옥으로 떨어진 대도 어찌 너희의 도움을 받아 복을 얻겠느냐”고 꾸짖었다.
검사가 시신을 거둘 친족이 있느냐고 물었다. 선생은 “죽은 뒤의 염시(殮屍 : 시신을 염하는 일)를 어찌 괘념하겠느냐. 옥중에서 썩어 문드러져도 좋으니 속히 형을 집행하라”고 꾸짖었다.

왕산의 죽음을 <대한매일신보>는 ‘天日無光’(천일무광 : 하늘의 태양이 빛을 잃었다)이라며 애도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겼다.
“국치민욕(國恥民辱)이 이에 이르렀으니 죽지 않고 어이하리오.
아버지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나라의 주권도 회복하지 못했으니 불충 불효한 몸이 죽은들 어찌 눈을 감으리오.”
[국치민욕 내지어차 불사하위 부장미성 국권미복 불충불효 사하명목
(國恥民辱 乃至於此 不死何爲 父葬未成 國權未復 不忠不孝 死何瞑目)]
죄수들은 물론 도성 안팎의 백성이 통곡했다. 시신을 수습한 사람은 뒷날 대한광복회 총사령을 지낸 제자 박상진(1884~1921, 1963 독립장)이었다. 박상진은 스승의 시신을 수습하여 금오산 아래에 모셔 장례를 치르고 난 뒤, 무덤 옆에 묘막을 지어 1년간 생활하며 스승을 그리워했다.
왕산 허위 선생께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고향인 구미시 임은동 산 중턱에는 순국 101주년이 되는 2009년 9월 왕산 허위 선생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아래 생가터에도 기념공원이 생겼고, 그의 호를 딴 왕산초등학교와 왕산로가 생겼다.

그러나 경부선 철길 건너 상모동에서 태어난 박정희(1917~1979)의 후광이 너무 커 지금도 왕산을 알지 못하는 이가 구미에도 적지 않다. 이제 24년 지방 권력이 교체되면서 새로 시장이 된 이는 박정희의 신화를 걷어내겠다고 하는데, 아직 눈에 띄는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2018. 10. 11. 낮달
참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 대법원장 출신 의병장 허위… 日헌병사령관도 존경한 기개, <서울신문>(2018.8.6.)
· 국가보훈처 대표 블로그 – 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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