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선산(구미) 이야기

선산 오일장 구경

by 낮달2018 2021. 9. 30.
728x90

 2일과 7일에 열리는 구미 선산장

▲ 선산 오일장은 매달 2, 7, 12, 17, 22, 27일에 서는 선산 지역에서 가장 큰 재래시장이다.

구미에 옮아와 살게 되면서 짬이 나는 대로 인근 오일장을 둘러보자고 아내와 약속했었다. 그러나 그놈의 짬이란……. 선산 오일장을 찾은 게 더위가 절정이던 지난달 17일이다. 오전 10시쯤 집을 나섰다. 가는데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선산읍은 구미시 통합 전의 선산 군청 소재지로서 신라시대에는 일선주(一善州), 숭선군(崇善郡), 고려시대에는 선주부(善州部), 조선시대에는 일선현, 선산군 등으로 불리었다. 선산이 면에서 읍으로 승격된 것은 1979년 5월이다.

 

선산, 군청 소재지에서 ‘구미시’의 소읍으로

 

1970년대 초 구미 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구미는 선산군 소속의 읍이었다. 읍으로 승격한 것은 구미보다 1년이나 늦지만, 선산은 어디까지나 군청 소재지로 구미를 거느린 대읍(大邑)이었다. 구미읍이 국가산업단지로 조성되면서 급격하게 인구가 늘어 시로 승격된 것은 1978년이었다.

 

구미시와 선산군을 다시 합쳐 도농복합형 구미시가 된 것은 1995년이다. ‘선산군 구미읍’이었던 시절이 옛말이 되면서 ‘선산(善山)’은 ‘구미시’의 조그만 소읍으로 떨어졌다. 인구도 선산과 구미시 사이에 낀 고아읍에 비기면 반밖에 되지 않는다.

▲ 선산읍의 전경. 한때는 대읍이었지만 지금은 구미의 조그만 소읍으로 전락했다. ⓒ 경북일보 사진
▲ 선산 읍성의 남문과 낙남루. 조선조 500년 동안 선산 도호부와 선산군의 관문 구실을 했다.

선산이 한때 인근의 대읍으로 행정, 경제의 중심이었던 흔적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읍 초입에 2002년 복원해 놓은 선산 읍성의 남문과 낙남루(洛南樓)만이 좀 생뚱맞게 방문객을 맞이할 뿐이다. 선산 읍성은 고려 때엔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고쳤다고 한다. 조선조 500년 동안 선산 도호부와 선산군의 관문 구실을 하다가 허물어진 것을 중창한 것이다.

 

낙남루를 돌아 1호 광장을 지나면 바로 이어지는 완전교가 장의 들머리다. 오일장이 열리는 매달 2, 7, 12, 17, 22, 27일이면 완전교에서부터 수문교까지 방천길을 따라 시장이 선다. 시간이 좀 일렀는지 수문교 근처에 차를 대고 시장을 거꾸로 거슬러 내려오는데 포장을 친 노점상들이 장사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평소엔 2차선 도로인데 장날에만 도로 대신 장이 서는 곳이다. 도로 한쪽으로만 상가가 이어지고 반대편에는 전부 천막과 포장을 치고 갖가지 임시 점포가 들어섰다. 들머리부터 옷가게들이 이어지는데 아직 장이 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한산하기 그지없다.

 

비록 임시 점포지만 갖가지 형태로 상품을 진열했다. 옷가게는 마네킹까지 동원해 상품을 전시했고 신발가게는 점포의 진열을 그대로 쏙 빼닮은 형태로 운동화를 진열했다. 군데군데 양념처럼 갖가지 액세서리들이 장꾼들을 유혹하며 진열대에 걸려 있었다.

 

재래시장의 소비 메커니즘

 

재래시장에 올 때마다 궁금한 것은 보기만 해도 허술해 뵈는 이런 옷가지들이 소비되는 시장의 메커니즘이다. 이른바 ‘비 메이커’라고 불리는, 유·무명의 상표를 단 저가의 의류들이 가장 활발하게 소비되는 곳이 바로 시골 오일장이다. 선산 골짝 골짝에서 나온 장꾼들의 입성을 살펴보면 누가 사 입겠나 싶은 옷가지들이 어떤 형식으로 소비되는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도시의 소비자들은 브랜드와 메이커를 따지고, 유행까지 좇아 세련되고 우아한 옷을 선택하지만, 그것은 시골 오일장에서 팔리는 의류에 비기면 너무 비싸다. 그리고 그 옷에는 그 브랜드의 가치를 드높이기 위해 투여된 광고료까지 포함되어 있지만, 소비자들은 그런 것 따위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다.

▲ 이 화사한 브래지어의 주인은 누구일까. 조부모와 사는 소녀일까. 시골 중년 아낙일까.
▲  이 냉장고 바지의 주인은 누가 될까 .

 

의류전이 이어지는 한쪽에 화사한 분홍빛이 아스라했다. 분홍빛 종이상자 속에 든 갖가지 빛깔의 브래지어였다. 도회의 쇼윈도에서 만나던 등신대의 마네킹이 걸치고 있는 고혹적인 모습의 그것과 달리 상자 속에 담긴 그 여성 전용의 속옷은 적당히 야해 보였다.

 

저 브라의 고객들은 누굴까? 나는 잠깐 고개를 갸웃했다. 좀 작은놈들은 조부모가 기르고 있는 초·중학에 다니는 손녀들이, 그리고 좀 큰 놈은 4, 50대의 시골 아낙들이 쓸 것이다. ‘사랑의 비너스’도 ‘내 여자는 비비안’이 아니어도 막 가슴이 나오기 시작한 어린 소녀든 크기가 거추장스러운 중년 아낙이든 단정한 옷맵시를 갖추는 데 지장이 없을 것이었다.

 

이어지는 가게에는 아랫도리 마네킹에 반바지를 입혀 놓았는데, 거기 ‘냉장고 바지 \5,000’이라는 종이가 붙어 있다. ‘냉장고’는 시원하다는 뜻이겠는데 글쎄 우리 보기에는 별로 시원해 보이지 않는다. 무릎 밑에까지 내려오는 길이로 보아 젊은 사람이 입는 옷은 아니겠고, 노인들이 과감하게 종아리를 드러내고 입으니 시원하다는 뜻이렷다.

 

이어지는 가게는 옹기전이었다. 옹기전이라니까 커다란 장독만 떠올리지만 진열된 상품은 그만그만한 크기의 소형 독과 솥, 사기 호롱, 뚝배기류들이 그득하다. 사기 호롱이 어쩐지 눈길을 붙잡았지만 지나친다. 그걸 어디다 모셔 놓을 것인가. 집안 장식 따위에는 워낙 손방이어서 그렇다.

 

과일도 제철이다. 큼직한 쟁반에 굵직한 복숭아 열두어 개를 진열해 놓으면서 복숭아 잎을 거기 고명처럼 얹어놓았다. 저건 말하자면 시골 장터용 장식인 셈이다. 굵직한 복숭아의 건강한 껍질과 거기 얹힌 복숭아 잎이 이루는 조화도 그만하면 장꾼을 지갑을 열만도 하겠다. 아니나 다를까 아내는 맛을 확인한 뒤 복숭아 한 접시를 샀다.

 

빨간 플라스틱 쟁반에 담겨 얌전하게 진열된 고구마와 감자도 먹음직하고 옥수수와 단호박도 넉넉했다. 그 옆은 도토리묵과 두부를 파는 가게다. 아내는 도토리묵 한 덩이와 비지를 조금 샀다. 전에 살던 지역에서는 생 비지를 팔지 않았다. 그러나 이곳은 경북 남부 지방이다. 고향 근처에 온다는 것은 익숙한 먹거리가 지척에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시골이다. 장꾼들도 젊은 사람은 드물다. 조그만 국화 빵틀을 앞에 두고 국화빵을 팔고 있는 이도 할머니고 과일전 앞에서 열심히 지폐를 세고 있는 이도 안노인이다. 돌아보면서 셔터를 눌렀는데 사진기가 흔들린 모양이다. 여전히 나는 사람들에게 렌즈를 들이대는 데에 젬병이다.

 

선산 오일장의 풍경을 시골의 그것으로 확인하게 해 준 것은 네모난 철제 새장에 갇혀 장터에 나온 닭이다. 몇 개의 새장에서 무심하게 모이를 쪼고 있는 것은 수탉 여러 마리와 암탉들이다. 아직도 시골 장터에선 저런 방식으로 닭들을 사고파는 것이다.

 

장터를 한 바퀴 돈 뒤,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나는 콩국수를 아내는 막국수를 먹었는데, 맛은 그저 그랬다. 사실은 어디 장터 국밥 같은 걸 먹고 싶었는데 그런 식당이 얼른 눈에 띄지 않아서였다. 우리는 식당을 나와 완전교 근처의 장꾼에게서 양파 한 자루를 샀다. 아내는 구미 시내의 마트보다 몇천 원은 싸다고 말했다.

 

차를 끌고 와 트렁크에 양파 자루를 싣고 우리는 이내 장터를 떠났다. 날씨만 좀 거들어 주었다면 나는 좀 더 오래 거기 머물고 싶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위가 너무 숨이 막혔다. 겨우 정오를 지났을 뿐이니 파장이 되려면 앞으로 서너 시간은 걸릴 것이었다. 그리고 진국의 시골 장터 풍경은 그때쯤 제대로 무르익을 것이었다.

 

시장을 완전히 빠져나오는데, 장을 보고 희거나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장을 빠져나가는 초로의 촌부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긴 선친이 살아계시던 시절만 해도 장터에는 여자만큼 남자들도 붐볐다. 오래전에는 장도 여자가 아니라 남자들이 보곤 했었다. 나는 나지막한 키의 그 장꾼의 모습에서 잠깐 선친의 모습을 겹쳐보고 있었다.

 

 

2012. 9. 11. 낮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