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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역사 공부 「오늘」

[오늘] 러시아 혁명 69년 만에 소비에트 연방 해산

by 낮달2018 2022.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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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 ‘오늘’] 1991년 12월 26일, 소비에트 연방 최고 회의 소련의 공식 해체 선언

▲ 1991년 12월 26일 소비에트 연방 최고 회의는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의 공식 해체를 선언했다 .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 69년 만에

 

1991년 12월 26일, 소비에트 연방 최고 회의는 소련의 공식 해체를 선언했다. 1917년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 이후 내전에서 승리한 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이 이끈 볼셰비키들이 러시아 연방에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을 합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 USSR)을 수립한 지 69년 만이었다.

 

이로써 세계 최초이자 최대의 사회주의 국가로 냉전 시대 공산주의 진영의 맹주로 군림했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것은 제 1세계와 제 2세계 간의 이념 대결로 점철되었던 냉전 시대의 종언이었으며 동시에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열다섯 개의 신생 공화국이 국제사회에 새롭게 등장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의 상징인 낫과 망치, 그리고 블라디미르 레닌

소비에트 연방의 해산은 1991년 12월 8일부터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그날, 벨라루스의 비아워비에자숲에서 이루어진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의 정상들은 다음 사항을 전제로 연방의 해체와 독립국가연합(CIS)의 창설을 합의한 벨라베자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국제법의 내용과 지정학적 상황으로 인하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은 더는 실존하지 않는다.”

 

12월 21일, 발트 3국과 그루지야 공화국을 제외한 11개 공화국은 카자흐공화국의 수도 알마아타에서 독립국가연합(CIS: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 결성에 관한 6개 협정에 서명했다. 이로써 소비에트 연방은 완전히 소멸하고 1992년 1일 1일부터 러시아를 비롯한 각 공화국은 완전한 정치적 독립 국가가 되었다.

 

고르바초프는 연방의 존속을, 옐친은 해체를 원했다

 

사회주의 혁명과 공산주의 종주국 소비에트 연방의 변화는 1985년 고르바초프의 등장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경제침체와 외교적 고립이라는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내적으로 페레스트로이카(개혁), 대외적으로는 글라스노스트(개방)라는 실용적인 정책을 펼쳤다.

 

그는 국내 경제발전을 위해 국가통제체제를 완화하고 기업과 지방의 자율권을 확대하며, 시장경제 제도 도입과 무역 확대를 추진하였다. 또 관료주의의 축소, 권력의 지방분산, 인민대표회의 창설, 대통령제의 도입 등 일련의 정치개혁을 시행하였다.

 

1989년 최초로 다당제 선거가 시행되었고 1990년 그는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국내 개혁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그는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철수, 군축회담, 동유럽 민주화에 대한 불개입, 미소 정상회담 등을 통해 새로운 데탕트를 형성하는 등 외교적 부담을 줄이려 했다.

 

그러나 그의 개혁은 외교 면에서는 성공적이었지만 국내정치와 경제에서 혼란과 연방 내 공화국 간 갈등이 심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개혁과 개방, 동유럽 민주화 등에 이바지한 공으로 199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지만, 고르바초프는 결국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1980년대부터 싹터온 개별 공화국의 민족주의와 자립 요구가 비등하면서 공산당 일당독재는 부정되고 당과 국가가 분리되기에 이른 것이었다. 연방을 구성하는 각 공화국의 주권선언과 독립 선언이 줄을 이었다.

 

발트 3국(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이 독립 의미의 주권선언을 한 것은 1989년이었고, 이듬해 리투아니아는 독립을 선언했다. 마침내 러시아가 주권선언을 하고 독자적 러시아 공산당을 출범(러시아는 자체 공산당이 없고, 소련 공산당이 직속으로 통치했다.)시키면서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는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1991년 3월, 연방은 연방 존속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시행했는데 발트 3국과 몰도바, 그루지야, 아르메니아는 이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 투표 결과는 찬성 77.85%, 반대 22.15%로 연방 유지가 압도적이었지만 그것이 대세를 멈추게 할 수는 없었다.

 

1991년 8월, 보수파가 쿠데타를 시도했다가 러시아공화국 대통령 옐친에 의해 진압되면서 연방 유지는 동력을 잃게 되었고 옐친의 정치적 입지는 한층 강화되었다. 옐친은 연방정부를 무력화하고 러시아의 독립을 성취하기 위하여 1991년 10월 러시아의 독자적인 경제개혁을 추구할 수 있는 3개 법안을 통과시켰다.

▲ 1991년 8월 보수파의 쿠데타는 시민들의 시위로 좌절되었다. 탱크 위에서 승리를 선언하고 있는 시민들.

상황은 연방 해체로 귀결

 

이 법안들은 대통령 포고령이 헌법 및 기타 법률과 동등한 권한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것을 무효화 할 수 있도록 하여 옐친의 정치적 권한을 크게 확대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것은 공화국 간 거래에 국제가격을 적용하고 연방에 대한 러시아의 재정지원을 대폭 삭감함으로써 연방정부를 기능 불능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소비에트 연방을 주도하는 가장 큰 공화국인 러시아의 압박 앞에 마침내 소비에트 연방은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1991년 12월 8일, 러시아가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와 함께 연방 해체와 독립국가연합 창설을 합의한 벨라베자 조약이 체결된 것은 이 같은 상황의 귀결점이었다.

▲ 독립국가연합은 소비에트 연방을 구성하던 15개 공화국 가운데 11개 나라가 참여했다. ⓒ 두피디아

끝까지 연방 해체에 반대했지만 12월 21일 독립국가연합이 발족하자 대세를 막을 수 없음을 확인한 고르바초프는 12월 25일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소비에트 연방 의회인 최고 회의는 이튿날 공식적으로 소련의 해체를 선언했다. 1922년에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던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소비에트 연방을 구성하던 공화국들은 말할 것도 없고, 동유럽의 이른바 ‘위성국가’들도 일찌감치 소비에트 블록(Soviet bloc)에서 벗어나 있었다. 이제 지구상의 공산주의 국가는 중국, 쿠바, 북한, 베트남, 라오스밖에 남지 않게 된 것이다.

 

사회주의 종주국의 붕괴는 자본주의 체제의 승리로 이해될 수도, ‘사회주의’라는 인류의 실험이 허망한 실패로 끝나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로 전화되는 기회를 놓친 것을 인류의 불운이라고 여길 수도 있으리라.

 

귀화 소련인으로 반파시즘을 대표하는 지식인 박노자(블라디미르 티호노프)는 한국 유학 중에 조국이 해체되는 비극을 겪었다. 소련 해체를 회고하는 그의 진술은 현지인의 인식과 정서를 얼마나 드러내고 있는 것일까.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에 연출된 역사적 비극의 결말을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자본가가 되려고 안달이었던 관료들에 의해서 현실 사회주의가 자멸하고 그 영토는 중심부 내지 준 중심부 산업 자본을 위한 자원 공급지이자 상품 시장으로 전락했습니다.

혁명의 유산을 지켜내지 못한 과거의 ‘인민’들은 계급적 적 앞에서 너무나 약했던 죄로 새로운 과두재벌의 권리 없는 머슴이 되거나 저처럼 자기 자신을 중심부에 팔아야 하는 망국노적 신세가 된 것입니다.”

        - 박노자, <비굴의 시대>(한겨레출판, 2014) 중에서

 

 

2017. 12. 23. 낮달

 

참고

· <두피디아>

· <나무위키>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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