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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가겨 찻집

‘역전’ - ‘용팔이’와 ‘전우’, 그리고 마라톤’

by 낮달2018 2024.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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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겨 찻집] ‘한자’가 다른 3개의 낱말, ‘역전’

▲ 한자어에는 유독 동음이의어가 많다. 역 앞, 많은 전쟁을 겪음, 여러 사람이 구간을 나누어 달린다는 '역전'이 그중 하나다.

예비군은 왜 ‘역전’의 용사인가

 

1968년 4월 1일에 향토예비군이 창설되었을 때 나는 초등학교 졸업반이었다. 향토예비군은 평상시에는 사회생활을 하다가 유사시에 소집되는 국군의 예비전력이다. 학교에서 ‘향토예비군의 노래’를 배웠는데, 1절의 첫 소절은 “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뭉쳤다”였지만, 3절의 첫 소절은 “역전의 전우들이 다시 뭉쳤다”였다.

▲ 4월의 첫 금요일인 2023년 4월 5일 예비군의 날 포스터.

1. 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뭉쳤다. 직장마다 피가 끓어 드높은 사기

총을 들고 건설하며 보람에 산다. 우리는 대한의 향토예비군.

나오라 붉은 무리 침략자들아, 예비군 가는 길에 승리뿐이다.

 

2. 반공의 투사들이 굳게 뭉쳤다. 마을마다 힘찬 고동 메아리 소리

서로 돕는 일터에서 나라 지킨다. 우리는 막강한 향토예비군.

나오라 붉은 무리 침략자들아, 예비군 가는 길에 승리뿐이다.

 

3. 역전전우들이 다시 뭉쳤다. 나라 위한 일편단심 뜨거운 핏줄

철통같은 제2전선 힘이 넘친다. 우리는 무적의 향토예비군.

나오라 붉은 무리 침략자들아, 예비군 가는 길에 승리뿐이다.

 

    - 향토예비군의 노래(전우 작사·이희목 작곡)

 

아무도 그게 무슨 뜻인지 말해주지 않아서 나는 ‘역전의 전우’가 무엇인지 오래 골몰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역전’은 ‘驛前(역전)’이었으니, 왜 거기 ‘역전’이 나오는지 알게 되기까지 적잖은 시간이 걸렸다. 모르긴 해도 그 의문점이 풀린 것은 대학에 진학해서였을 것이다.

 

여럿이 구간을 나누어 달리는 육상경기가 왜 ‘역전경주’인가

 

내가 한 번 더 ‘역전’의 고민에 빠진 것은 2000년대 이후 많이 없어졌으나,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성행한 ‘역전경주 대회’의 ‘역전’이었다. 여러 명의 선수가 일정한 구간을 릴레이 형식으로 달리는 건 알겠는데, 그게 왜 ‘역전경주’인지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건 모두에서 내가 떠올린 건 ‘기차 정거장’, ‘역(驛)’이었다. 우리는 역전하면 ‘역 앞’을 가리키는 ‘역전(驛前)’만 떠올리지만,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역전’을 찾으면 모두 12개의 낱말이 뜬다. 물론 모두 한자어다. 뜻글자인 한자어는 복잡한 뜻을 간명하게 나타낼 수 있지만, 이 가운데 실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낱말은 몇 되지 않는다.

▲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검색하면 '역전' 표제어는 모두 12개나 된다.
▲ 일제 강점기의 경성역. '역전'은 '역 앞'이라는 뜻이지만, 외자로 발음하는 게 익숙지 않아서 '역전 앞' 같은 중복표현이 쓰인다.

‘역전(驛前)’은 ‘역전 앞’처럼 쓰기 쉽다

 

제일 만만한 게 ‘역 앞’을 뜻하는 ‘역전11(驛前)’(표준국어대사전, 이하 같음)이다. 고유어가 아닌 데다 외자의 불안정감 때문에 ‘전’ 자를 습관적으로 붙이다 보니 ‘역전 앞’처럼 중복표현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한자어 쓰기에서 중복표현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뜻을 분명하게 나타내고자 하는 습관 때문이다. [관련 글 : 과반수(過半數)’를 넘는다?]

 

내 고향에는 기차가 다니지 않았으므로 나는 ‘역전’이라는 낱말을 쓸 일이 전혀 없었다. 내가 ‘역전’을 구체적 공간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도회의 중학교로 진학해서였다. 등굣길마다 버스로 대구역을 지나갔고, 그 무렵 박노식(1930~1995) 주연의 액션물인 ‘용팔이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 ‘역전 출신 용팔이’가 큰 인기를 누렸기 때문이다.

▲ 1970년에 히트한 액션 영화 '용팔이' 시리즈 제2탄은 '역전 출신 용팔이'였다. 용팔이 역에는 박노식이 열연했다. ⓒ나무위키
▲ 6.25전쟁. '베테랑'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역전의 용사'는 '많은 전쟁을 겪음'의 뜻이다.

‘역전의 전우’에서 역전이 “이곳저곳에서 많은 전쟁을 겪음”을 뜻하는 ‘역전9(歷戰)’임을 깨우치면서, 나는 한자어의 뜻을 한자의 훈(訓)을 통해서 이해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역전의 ‘역’은 ‘지낼 력’, ‘경력’과 ‘이력’에서 쓰는 한자다.

 

지금은 시들해졌지만, ‘역전12(驛傳)’경주는 여러 사람이 장거리를 릴레이 형식으로 달려 그 시간을 다투는 육상경기다. 도로에서 벌어지는 팀 경기로 일정한 거리를 몇 개의 작은 구간으로 나누어 달린 뒤, 각 구간의 통과시간을 합산하여 순위를 결정한다. ‘전할 전’ 자를 써서 ‘역으로 전해지는 경주’라는 뜻으로 새길 수 있겠다.

 

‘역전’의 동음이의어들

 

역전경주는 원래 일본에서 처음 시작된 육상경기로 일본어로는 ‘에키덴(駅伝)’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제 강점기인 1923년 6월에 첫 경기가 열렸고,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활발하게 열렸다. 우리나라의 주요 역전경주에는 서울-부산 간을 달리는 ‘중부 역전’, 서울-목포 간을 달리는 ‘경호(京湖) 역전’, 서울-자유의 다리 사이를 달리는 ‘통일 역전’ 경주 대회 등이 있었다.

▲ 2011년 전국통일역전경주대회의 참가자들. ⓒ 경향포토

나머지 역전 중에서 친근한 낱말로는 ‘역전7(逆轉)’이 있다. 주로 스포츠나 전쟁 등에서 형세가 뒤집히는 것을 이르는 말로 널리 쓰인다. 야구나 축구, 농구 등에서 ‘역전승(逆轉勝)’, ‘역전패(逆轉敗)’는 스포츠의 묘미를 제대로 드러내는 승부가 아니던가.

 

‘역전’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 새삼스럽게 한자를 배워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한자어라고 해서 한자를 모르면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원을 알지 못해도 외국어를 쓸 줄 알고, 한자를 몰라도 독서 경험을 통하여 한자어 어휘의 뜻을 구별할 수 있다. [관련 글 : 조선일보의 한자 교육타령, 이제 그만 좀 합시다]

 

이미 한자가 우리 언어의 일부가 아니라, 외국어로 인식하고 있는 한글 세대에게 새삼 한자의 새김을 참고하여 낱말 뜻을 이해하라고 주문하는 건 온당하지 않다. 맥락을 읽고 동음이의어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건 언어생활이나 독서 경험 등으로 그 낱말을 겪고 써보는 것으로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2024. 5. 9.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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