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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2139

[오늘] 조현병, 딸의 실종, 이혼...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의 삶 [역사 공부 ‘오늘’] 1962년 1월 26일, 덕혜옹주 38년 만의 환국 1962년 1월 26일, 소학교 5학년이던 1925년에 볼모로 일본에 끌려갔던 고종의 외동딸 덕혜옹주(1912~1989)가 3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외로움과 향수 때문에 조발성 치매증을 앓던 이덕혜는 대마도(對馬島) 번주(藩主)의 아들 소 다케시(宗武志)와 강제 결혼했다가 이혼당한 뒤에야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마지막 황녀, 38년 만에 귀국하다 나라를 잃은 왕족들의 삶은 그들 조국의 운명처럼 파란만장했다. 이들의 삶 앞에 ‘비운’이라는 형용이 관습적으로 쓰이는 이유다. 제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지만, 고종(1852~1919)은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강제퇴위 당했고, 그 아들 순종(1874~1926)은.. 2019. 1. 25.
“흩어지면 죽는다, 흔들려도 우린 죽는다” 이 노래가 서른 살이 됐다 ‘파업가’ 30주년 김호철 헌정음반 발매... 해직 교사 시절 만난 그의 노래 음반을 한 장 샀다. ‘음반’이라고 말하는 게 어색하기 짝이 없다. 지금껏 산 음반이 채 열 장이 되지 않을 만큼 음악과는 무관하게 살아온 탓이다. 음악애호가들이 소장을 자랑하곤 하는 엘피(LP)음반은 구경하지도 못했다. 왜냐하면, 그걸 걸고 돌릴 이른바 ‘오디오’를 소유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거의 수십 년 만에 음반을 샀다. 그것도 인터넷으로 판매처(노동의 소리)를 찾아서 두꺼운 책 한 권 값인 2만5천 원을 ‘지른’ 것이다. 1천 명의 공동제작자가 함께 만들었다는 ‘김호철 헌정 음반’이다. 음반의 발매 소식을 알게 된 것은 기사를 통해서였다. 1천 명 공동제작자가 만든 ‘김호철 헌정 음반’ 김호철은 윤민석과 함.. 2019. 1. 24.
‘무관심’, 혹은 ‘살인과 배신’ 부르노 야센스키(Bruno Yasenskii), ‘살인과 배신보다 무관심’을 경계 1988년, 학교를 옮기고 500만 원짜리 전셋집, 재래식의 '부엌이 깊은 집'에 들었다. 방은 두 칸.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데리고 잤는데, 삐딱한 사다리꼴의 작은방에 내 서재를 꾸몄다. 말이 서재지, 제재소에서 켜 온 합판을 구운 적벽돌로 받쳐놓은 간이 책장이 전부인 초라한 공간이었다. 오래 써 온 크로바 타자기를 그 즈음 막 나온 라이카 전자타자기로 바꾼 때였다. 헝겊 리본이 아닌, 교체할 수 있는 고급 리본으로 인자(印字)되는 선명한 글꼴이 아름다웠고, 한 줄 입력이 끝나면, 자동으로 줄이 바뀌면서 나는 묵직한 기계음이 새로운 물건을 쓰는 즐거움을 새록새록 환기해 주곤 했다. 위의 글은 그때 그 타자로 쳐서 내 보르.. 2019. 1. 24.
그리워도 뒤돌아보지 말자 김호철의 노래 ‘꽃다지’를 들으며 맥이 빠지기 시작한 것은 2학기 개학을 하면서부터다. 낯익은 자리에 다시 서긴 했는데, 어쩐지 그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고, 불현듯 정처를 잃어 버렸다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무언가에 마음을 붙이고 살아왔는데 어느 날, 그게 홀연히 사라진 것 같았다고나 할까. 대체 나는 무얼 바라고 지내왔던가. 내가 기다렸던 것은 이름뿐인 여름방학이었고, 마지막 남은 일주일의 휴식이었던 것일까. 방학 끝 무렵, 벗들과 함께 보낸 거제도에서의 2박 3일이 그나마 애틋한 시간으로 떠오른다. 오전엔 수업을 하고 오후엔 쉬던 방학 생활에 몸이 너무 편했던가. 다시 하루 5~6시간의 수업에 적응하는 게 여간 어렵지 않았다. 방학내 선선하더니 개학과 함께 반짝 더위가 찾아왔고, 다시 황망한 여름의 끝.. 2019. 1. 22.
2006 겨울과 봄 사이, 금강산 ‘피의 기억’을 되살리는 ‘해원(解寃)의 제의(祭儀)’ 한 차례 폭설이 지나갔다. 주변의 동료들이 겨레 하나 되기 운동본부의 금강산 산행에 묻어 다녀온 금강산도 설봉(雪峰)이 되었던 모양이다. 지난해 2월에 만난 개골(皆骨)의 추억 그들이 찍어 온 눈 덮인 설봉산에서 눈을 천천히 걷어내 보면서 날씨만큼이나 굳어 있는 남북 교류를 상기하고, 나는 지난해 2월 말에 만난 개골을 우울하게 추억했다. 그러나 미몽에 취한 듯 만난 개골산(皆骨山)의 황량한 골짜기와 금강산 호텔, 고성항 횟집에서 만난 볼 붉은 처녀들의 모습은 기억 한편에서 여전히 새록새록 살아 있다. 정부가 비용을 부담하는 관광성 연수와는 통 인연이 없었던지라, 연수 연락을 받고도 나는 “그런가, 금강산엘 간다고?” 하고 심드렁하기만 했다. 금강산.. 2019. 1. 21.
나의 블로그 편력기 에서 까지, 그리고 심상한 글쓰기 ‘여성 편력기’가 아니라 블로그 편력기라니 재미없는 이야기가 틀림없겠다. ‘여성 편력’은 없기도 하거니와 있은들 여기서 그걸 주절대는 것은 백주대로에 길 막아놓고 고함치는 격이니 더 입에 올릴 수도 없는 일이다. 오마이뉴스 블로그를 기웃거린 것은 제법 오래되지 않나 싶다. 의 블로그를 닫고 천리안 에 닻을 내리고 한참 지난 뒤였다. 하루에 여러 번 드나드는 데라서 그 친근감이 이웃집 같았으나 이왕 애플에 집을 지어 놓은 상태여서 시험 삼아 글 몇 개를 올렸다가 지워버렸다. 내 첫 블로그는 에서 문을 열었다. 약 여덟 달 동안 꾸려오던 블로그 를 지워 버린 것은 지난해 4월 중순께다. 모두 70여 편의 글을 썼는데, 마지막 글이 된 에서 나는 아래와 같이 썼다. 무어 어쩌.. 2019. 1. 20.
3·1운동과 임정 수립 100돌, 안익태의 ‘애국가’를 어찌할 것인가 에키타이 안, 일제에 이어 나치 파시즘에도 협력한 사실 확인 최근 이해영 한신대 교수(57·국제관계학부)가 (삼인)라는 책을 펴내면서 새삼 지난 10여 년 동안 논란이 되어 온 친일 음악가 안익태가 재소환되고 있다. 안익태는 우리 ‘애국가’의 작곡자이기 전에 일본의 침략전쟁을 선전하고 ‘일본 정신’이 담긴 음악을 만드는 등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한 친일 부역자로 에 오른 이다. 새롭게 소환되고 있는 안익태 우리 세대가 안익태(安益泰, 1906~1965)를 ‘애국가’의 작곡자로서 의식하기 시작한 것은 고교 시절이었던 듯하다. 어떤 노래를 즐겨 부르면서도 그 작사·작곡자가 궁금해지는 일은 좀체 없다. 그러나 그 시절, 애국가를 만든 이가 안익태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가 산 스페인의 어느 도시에 그의 이름.. 2019. 1. 15.
사진첩, 함께한 시간과 가족의 발견 오래된 사진첩에 만나는 가족과 세월 어느 날이었던가. 귀가하니 아내가 딸애와 함께 사진첩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몇 권의 사진첩 중 가족사진만 따로 모은, 좀 두꺼운 놈들이었다. 거의 모두 손수 찍은 사진인데도 새삼 그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까마득한 과거로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늘 사진을 바라보는 것은 그걸 찍을 때의 느낌을 되새기는, ‘감정의 복기(復碁)’ 같은 거라고 생각해 왔다. 10년이나 20년쯤의 시간이라면 그걸 되돌릴 수는 물론 없다. 그러나 사진이란 놈은 마치 주마등처럼 혹은 파노라마처럼 우리가 고단하게 밟아온 시간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펼쳐주기도 하는 것이다. 날이 갈수록 기억이 희미해지는 걸 어쩔 도리는 없다. 그러나 오래된 사진 한 장 한 장을 들여다볼.. 2019. 1. 14.
소년과 전화 안내원의 우정과 교유 - 빌라드 <안내를 부탁합니다> 빌라드의 단편 뜻밖에 폴 빌라드의 은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은 듯하다. 읽은 이는 물론이거니와 처음 이 글을 만난 이들도 잔잔한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 작품의 자연스런 전개와 진정성 탓이었으리라. 그의 유년 시절의 성장통을 그린 자전적 에세이 《Growing Pains》에 실린 단편 중 하나인 은 누구나 거치는 유년 시절, 그 성장의 민감한 순간을 스쳐 간 보편적 공감을 그리고 있는 글이다. (이 글을 굳이 장르로 구분할 필요는 없겠다. 소설이든 수필이든 아름답고 따뜻한 글이니 말이다. ) 댓글을 달아준 선배 교사가 이 ‘소설’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그이는 또 그의 수필 를 ‘강권’했다. 요샛말로 하면 ‘강추’다. 물론 나는 그 글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폴 빌라드’로 검색하면 어김없이 .. 2019. 1. 13.
모든 ‘인식’과 ‘삶의 전제’로 빛나는 - 폴 엘뤼아르 「자유(自由)」 폴 엘뤼아르,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프랑스 시인 폴 엘뤼아르(Paul Eluard, 1895~1952)의 ‘자유’는 고등학교 시절, 그 첫 연을 내 자취방 벽에 붉은 매직으로 휘갈겨 써 놓았던 시이다. 누구나 그렇듯 나는 제대로 된 문학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고, 이른바 ‘세계의 명시’ 따위는 싸구려 다이제스트 시집을 통해서 간신히 알게 되었다. 학교 도서관이나 형의 서가에 박혀 있던 흰색 장정판(하드 커버)의 그 시집들에서 그냥 겉멋으로(!) 하이네와 릴케, 워즈워스와 포의 시를 맛보고, 그것들 가운데 제법 멋있는 시구(詩句)들을 외우는 정도로 외국 시에 입문했었다.이후,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지만, 거기서 특별히 현대시를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다. 프랑스 시인들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학교에서 아이들에.. 2019. 1. 13.
‘문숙’, <삼포 가는 길>, 길 위의 사람들 문숙과 영화 그리고… 에 ‘자연치유’라는 책을 냈다는 기사가 언뜻 보이더니 에서는 배우 문숙의 인터뷰가 실렸다. 무심하게 기사를 읽는데, 문득 그녀가 나와 거의 동년배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서른몇 해 전 싱그러운 스무 살 처녀였던 이 배우는 이제 쉰여섯 초로의 여인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났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 야위었지만 풍성해진 표정 뒤편으로 나는 삼십오 년 전, 대구 만경관 극장에서 만났던 스물한 살의 문숙을 충분히 떠올릴 수 있었다. “몸을 낫게 하는 건 ‘취함’ 아닌 ‘비움’”이라며 그녀는 미국 생활 30년 만에 자연치유 전문가가 되어 돌아왔다고 기사는 전한다. 이만희 영화 의 백화 돌아오다 다른 기사는 뒤늦게 그녀가 2007년에 펴낸 책 ‘마지막 한해-이만희 감독과 함께한 시간들’을 중심으로.. 2019. 1. 13.
[오늘] 90년 전 오늘, 식민지 시기 최대규모 ‘원산총파업’ 돌입 [역사 공부 ‘오늘’] 1929년 1월 13일, 원산노동연합회 총파업 선언 1929년 1월 13일, 함경남도 원산에서 원산노동연합회(원산노련) 산하 노동조합원 2200여 명이 참여한, 일제 식민지기 최대 규모의 파업이 시작되었다. 1928년 9월에 있었던 문평제유공장 노동자의 파업에서 비롯된 이 대규모 연대 파업은 80일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지역의 모든 부문 노동자와 총자본이 맞붙은 유례없는 이 파업 투쟁은 일제의 노동정책은 물론 이후 노동운동의 활동 방식과 노선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일본인 감독의 노동자 구타로 촉발 원산총파업은 1928년 9월에 있었던 문평제유(製油)공장 노동자의 파업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함경남도 덕원군 문평리 소재, 영국인이 경영하는 문평 라이징 선(Rising Sun) 석유.. 2019. 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