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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야은 길재5

[전시] ‘지주중류’와 ‘백세청풍’으로 기린 야은 길재 구미 성리학역사관 개관 2주년 기념 특별기획전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2022.8.9.~12.4.) 구미 성리학역사관이 지난 8월 9일부터 12월 4일까지 개관 2주년 기념 특별 기획전, 를 열고 있음을 나는 뒤늦게 알았다. 지난해 이맘때 라는 제목으로 해동초성(海東草聖) 고산 황기로 특별전이 열렸음을 기억하고 역사관 누리집을 들렀다가 이 전시회 소식을 알게 된 것이다. [관련 글 : 금오산 둘레길 돌면서 해동초성의 ‘초서’를 만나는 법] 이번 전시는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의 살아생전 자취와 사후의 평가를 재조명하고 해평길씨 문중의 모습 등을 소개하고자 마련됐다. 그러나, 무려 600년 전에 이 고을에서 살다 간 인물의.. 2022. 9. 23.
야은 길재, 삼은 가운데 우뚝한 ‘절의의 상징’ [선산 톺아보기 ⑨] 야은 길재를 기리는, 오태동의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 야은 길재(1353~1419)를 기리는 빗돌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는 오태동, 남구미 나들목 근처에 있다. 경북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이 빗돌은 1587년(선조 20)에 인동 현감으로 있던 겸암(謙唵) 류운룡(1539~1601)이 길재의 묘역을 정비한 뒤 주변에 사당과 오산서원(吳山書院)을 창건하고 그 앞에 세운 비석이다. 인동현감으로 있던 류운룡이 세운 낙동강 강변의 지주중류비 1585년에 인동 현감으로 부임한 류운룡은 3년 차인 1587년(선조 20)에 길재의 높은 충절을 기리기 위한 역사(役事)를 벌였는데 이 빗돌은 그것을 매조지는 일이었다. 지금은 터만 남은 오산서원은 1609년(광해군 1)에 사액 되었으나, 대원군의 서.. 2022. 3. 11.
서원과 향교 앞 송덕비의 목민관, ‘조선 귀족’이 되다 금오서원과 선산향교 앞 송덕비로 남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김사철 며칠 전 선산읍 원리에 있는 금오서원(金烏書院)을 들렀다가 돌비 하나를 만났었다. 읍청루 오른쪽 담장 아래 금오서원 안내판 옆의 이 빗돌은 ‘부백김공사철송공비(府伯金公思轍頌功碑)’다. 부백(府伯), 그러니까 선산 부사 김사철(金思轍, 1847~1935)의 송덕비다. 금오서원 앞 송덕비의 주인공 선산부사 김사철 고을마다 줄지어 선 숱한 송덕비 중 하나겠거니 하고 지나쳤다가 나중에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선산향교 앞에 그의 빗돌이 하나 더 있다. 1892년 7월에 세운 ‘부사 김사철 교중유혜비(校中遺惠碑)’니, 이는 그가 ‘향교에 끼친 은혜’를 기린 비다. 선산 부사로 재임할 적에 선정을 베푼데다가 향교에도 적잖은 이바지를 했다는 얘기다. 혹시나.. 2022. 2. 19.
[선산 톺아보기 ⑥] 절의의 도학자 야은 모신 서원과 조선 귀족 김사철 [선산 톺아보기 ⑥] 선산읍 원리 금오서원(金烏書院) 처음 금오서원(金烏書院)을 찾은 건 2013년 2월이다. 2012년 구미로 학교를 옮기고 1년 후였다. 선산읍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금오서원 이정표를 보고 망설이지 않고 차를 돌린 것이다. 서원에 관해 최소한의 정보도 없는 상태의 깜짝 방문이었는데, 나는 서원을 한 바퀴 빙 둘러보고 애걔걔, 하고 서둘러 발길을 돌렸었다. 오래 안동에 살면서 인근의 서원과 정자를 적잖이 돌아본 터수라, 내게는 고건축물에 대한 어떤 정형의 이미지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은 도산서원이나 병산서원, 소수서원 등의 유명 서원 건축이 보여준, 여러 차례에 걸친 보수에도 지울 수 없는 ‘퇴락’의 이미지다. 나는 서까래나 추녀, 대청과 툇마루, 분합문과 문설주 따위에 묻은 손때처.. 2022. 2. 14.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 야은(冶隱) 길재(吉再)와 구미 금오산 채미정(採薇亭) 구미에 들어와 산 지 어느새 4년째다. 선산 골짝을 골골샅샅 훑는 데만 족히 서너 해가 걸릴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왔건만, 골골샅샅은커녕 아직 금오산에도 오르지 못했다. 블로그의 ‘선산 톺아보기’에 쓴 글도 8편이 고작이니 ‘개점휴업’이라 해도 할 말이 없다. 금오산 어귀의 채미정(採薇亭)을 지날 때마다 자신의 게으름을 돌이켜보곤 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善山)에 있다.”()고 할 때 그 인맥의 출발점이 곧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이기 때문이다. 야은은 목은(牧隱) 이색(1328~1396), 포은(圃隱) 정몽주(1338~1392)와 함께 여말 삼은(三隱)으로 불리는 이다.(.. 2019. 5.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