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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벌떡 교사’의 추억

by 낮달2018 2020.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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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의 ‘평조합원’들을 생각한다

▲ 1989년 5월, 연행되는 교사들. 이들은 대부분 평조합원이었다 .

구미로 전입한 지 일주일이 채 안 되어서 지회(전교조의 시군단위 조직)에서 전입 교사 환영회를 알리는 편지가 도착했다. 한지로 된 화사한 편지지에 이철수 판화까지 넣은 아주 깔끔한 안내장이었다. 여교사임이 분명한 얼굴도 모르는 송신인의 마음씨가 느껴져 기분이 매우 좋았다.

 

어렵고 바쁜 때인데도 지회의 기본업무를 챙기는 후배 교사들을 바라보는 기분은 좀 각별하다. 이십수 년 전, 해직되어 상근하던 시절에 비슷한 일을 감당했던 기억이 새로운 까닭이다. 유달리 인사이동이 많은 교육계니만큼 조합원의 전출입 등 조직업무가 적지 않다. 당연히 이동하는 조합원들을 챙기는 일도 만만찮은 일이라는 말이다.

 

얼마 전 분회 모임이 있었다. 점심시간에 인근 음식점에서 모여 식사를 같이 했다. 약식으로 분회장과 총무를 뽑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그런 이야기를 했다.

 

……특별히 교직 생활에 피부로 느끼는 도움을 받지도 못하면서 늘 서명과 집회다 요구만 넘치는 조직을 지켜주는 평조합원이야말로 참 대단한 이들이다. 내게 어떤 대표성도 없지만 1989년 전교조 출범에 힘을 보탠 원년 구성원으로서 그들에게 각별한 경의를 표하고 싶다…….

 

요즘이야 전교조 소속 교사라고 해서 눈에 띄는 차별을 받는 것은 아니다. 학교마다 주요 업무를 맡은 보직 교사들 가운데 일정 비율 이상은 전교조 소속 교사다. 창립된 지 20년이 훌쩍 지나면서 당시 한창때였던 원년 구성원들은 이제 거의 서서히 원로 교사의 반열에 들어선 것이다.

 

가물에 콩 나듯 하지만 조합원 가운데 교감으로 승진하는 이, 전문직으로 진출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교사들에게 ‘전교조’라는 이름은 멍에로 인식되는 듯하다. 승진을 염두에 두거나, 보직을 맡고 싶은 교사들이 슬그머니 조합을 떠나는 이유가 거기 있다.

 

평조합원, 조직의 든든한 버팀목

 

‘전교조’ 소속이라는 존재 조건은 어떤 형식으로든 불이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승진이나 직무에서의 불이익뿐 아니라 편협한 관리자에게 미운털이 박힐 수 있는, ‘별로 편안하지 못한’ 자리가 바로 ‘전교조’인 것이다. 약삭빠른 사람들이 일찌감치 떠난 자리를 무던히 지키고 있는 이들이 바로 우리의 평조합원들이다. 나는 이들에 대한 우리의 경의가 충분히 이유 있다고 생각한다.

 

수십만의 회원을 자랑한다는 기왕의 교직단체가 조직적 동일성 따위와는 무관한 것과는 달리 여러 어려움을 거쳐 온 전교조 교사들은 일정한 가치나 신념을 공유하고 있는 이들이다. 몇 번의 조정기를 거치면서 보험 들 듯 전교조에 참여한 교사들이 조직을 떠나면서 거품이 빠진 결과다.

 

이들 평조합원은 조직 활동에 참여하는 활동가도 아니요, 분회(단위학교)의 책임을 맡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들도 ‘참교육’으로 상징되는 ‘교사로서의 자기 성찰’과 온존하고 있는 ‘교육모순에 대한 저항’이라는 ‘동질성’을 공유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한때 열혈 활동가로서 살았던 전교조 원년 일꾼으로서 내가 이들에게 기우는 애정을 감당치 못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교단에는 ‘벌떡 교사’라는 이름으로 불린 한 무리의 교사들이 있었다. 교무회의에서 요긴한 순간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때로는 사자후로, 때로는 더듬대며 현장의 모순을 미주알고주알 뇌던 정말 부지런하기도 했던 젊은 교사들. 그러나 그들은 ‘개혁론자’가 아니라 ‘불평분자’로 더 많이 매도되었다.

 

그들은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비관주의자로 몰리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트위터리안의 견해를 빌어서 말하면 “‘비판’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그들은 ‘낙관주의자’였다. 오히려 비판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지 않기에 침묵했던 사람들이 비관주의자였다.”

 

그들도 애당초 침묵하고 있었던 여느 교사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완고한 현존 질서 앞에 그들은 무력했고 그 견고한 벽과 맞서야 한다는 것을 두려워했고, 자신의 미력한 저항이 그 벽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걸 확신하지 못했다. 오랜 고민 끝에, 밤잠을 설치면서 수십 번 외고 왼 말을 회의 시간에 쏟아붓고 나서야 그들은 새롭게 태어났다.

 

이들 벌떡 교사들은 싸움꾼이 되어야 했다. 벌떡 교사들이 쏟아부은 고발과 제언을 기존의 질서가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적지 않은 수의 동료 교사로부터 ‘트러블 메이커’라는 눈총을 받으면서도 학교도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 애썼고 결과적으론 그것을 훌륭히 증명했다.

▲전교조 사태를 다룬 영화 <닫힌 교문을 열며>의 한 장면

이들에게 힘이 되었던 이들이 주변의 동료들이었다. 이 동료 교사들은 전면에 나서지 못했지만, 현장의 모순적 관행, 교육 관료들과 지루하고 답답한 싸움을 계속해야 했던 벌떡 교사들의 강력한 지원군이었다. 이들은 전국교사협의회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거치는 동안 후원회원을 거쳐서 조합원이 되었다.

 

벌떡 교사, 그 시대와 사람들

 

벌떡 교사들의 저항(그 제도화, 조직화의 결과물인 전국교사협의회,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오늘날 학교 민주화의 바탕을 닦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했고, 대안을 제시하였으며, 완고한 관행과 관료적 행정의 벽에 온몸으로 부딪쳤다. 그런 과정에서 전교조 창립으로 전국에서 1천5백여 교사가 교단에서 배제되었다.

 

이 주요 활동가들이 교단에서 배제되면서 현장에는 ‘후원회’라는 이름의 지원 조직이 생겨났다. 이들 후원회원이 활동가들이 맡았던 역할을 이어받으면서 대량해직으로 인해 무너졌던 학내 조직은 재건될 수 있었다. 이들이 전교조의 든든한 버팀목인 일당백의 동지들, 평조합원들이다.

 

▲ 학교 뒤뜰에 홍매화가 수줍게 피었다 .

그리고 10년, 전교조가 합법화되면서 벌떡 교사의 존재 가치는 반감되었던 것 같다. 지역별, 학교별 편차가 있고 미흡하긴 하지만 평교사들이 학교 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경로가 마련되었던 까닭이다. 이제 예전처럼 벌떡 교사들과 학교 관리자의 불꽃 튀는 공방 보기가 쉽지 않아졌다.

 

얼굴을 붉히거나 고성을 지르는 형식이 아닌 조곤조곤히 의견을 나누는 것으로도 현안의 실마리를 풀어갈 수 있게 된 변화는 쉬 믿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런 일련의 변화와 함께 ‘벌떡 교사’는 이제 ‘전설’이 되었다. 예전처럼 학내 문제로 잔뜩 핏대를 올리거나 격정을 토하는 교사는 잘 눈에 띄지 않는다.

 

물론 학교 민주화가 착실히 이루어져서 그런 건 결코 아니다. 절차적 민주화가 일정하게 이루어지긴 했다. 예전과 달리 막 돼먹은 스타일의 관리자가 줄어든 덕분인 탓도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학교에 예전과 같은 ‘열정’을 찾아보는 게 쉽지 않은 탓이 아닐까 싶다.

 

교사들은 예전처럼 분개하지도 고민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인다. 교직은 숱한 직업들 가운데 선망의 적이 된 직업들 가운데 하나다. 교육적 퇴행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터무니없는 교육정책이 줄을 이어도 교사들은 콧방귀를 뀔 뿐, 예전처럼 분노하거나 이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는다.

 

그런 ‘감추어진 평화’에 익숙해진 탓일까. 교사들은 예전처럼 교사들과 관리자들의 충돌에 대해서 그리 너그럽지 못한 것 같다. 전임교에서의 일이다. 평소 처신이 점잖을 뿐 아니라 드물긴 하지만 매우 온건한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곤 했던 한 교사를 두고 어떤 여교사는 그렇게 말했다. 전교조에는 정말 ㄱ선생님 같은 합리적인 분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나는 바로 알아챘다. 그것은 한 단위 집단이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카드일 수 있다. 다툼이 아니라 건설적으로 의견을 나누는 일은 저 ‘일상의 평화’를 깨뜨릴 일이 없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튀어나오려 하는 말을 삼켜버렸다.

 

좋지요. 나긋나긋한 태도로 얼굴을 붉힐 일도 없고, 핏대를 세울 일도 없이 하고 싶은 말을 아주 공손하게 나누는 건.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런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게 되는데 얼마나 많은 교사가 핏대를 올렸고 싸움꾼 대접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부딪치며 깨어졌는가, 얼마나 많이 피 흘렸는가 하는 점이지요….

 

어두웠던 시절의 교무회의 풍경이 어제처럼 떠오른다. 학교장의 전횡과 상식과 어긋난 학사 운영을 지적하는 교사의 발언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만 끝내요!” 교장의 주문이 떨어지고 서둘러 회의를 마치는 풍경. 우루루 교사들이 밖으로 나가고, 닭 쫓던 개 꼬락서니가 된 교사의 탄식과 허탈이 여운처럼 남는 그 진공의 시간들.

 

의사(擬似) 민주화의 ‘마법’은 불과 십수 년 전의 기억을 거세해 버렸다. 세상은 태평하고 우리의 젊음도 영원하다! 고민도 열정도 사라져 버린 듯이 전대미문의 풍요를 누리는 이 21세기의 학교와 교사들은 이 나라 자본주의의 완성 태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무심한 세월 속에서도 얼음장 밑을 흐르는 물소리처럼 다가올 봄을 예비하는 교사들, 또 다른 벌떡 교사들을 생각한다. 모두가 그렇다, 그렇다고 외치는 사람들 속에서 아니다, 아니다를 외롭게 뇌고 있는 교사들을. 그리고 그들에게 힘을 나누기 위해 묵묵히 뒷바라지하고 있는 평조합원들을 생각한다.

 

봄이건만 봄 같지 않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봄을 가져오는 것이 어찌 봄바람만이겠는가. 그 언 땅을 누비던 삭풍 속에 자라던 봄의 훈기 같은 것, 그 사소한 조짐이 온 누리를 화풍 난만의 세월로 다시 세우는 것을. 교정에 핀 홍매화 그늘에서 나는 꽃샘바람 속에 무르익은 이 ‘기정사실의 봄’을 다시 생각한다.

 

 

2012. 3. 2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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