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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선산(구미) 이야기

성주 성산, 옛 가야왕국의 자취, 고분군을 찾아서

by 낮달2018 2022. 1.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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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군 성주읍 성산리 ‘가야 고분군’

▲ 성산동 고분군은 고분 수와 봉분 규모, 출토유물의 질과 양 등을 고려할 때 으뜸으로 성주 최고 지배자 계층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지난 1월 9일 성주를 다녀왔다. 벽진 봉계리의 해동청풍(海東淸風)비를 찾았다가 돌아오는 길에 성주읍에 들른 것이다. 성주는 2019년 봄, 성밖숲에 세워진 백년설 노래비를 찍으러 왔다 가고 처음인 듯하니 그새 3년이 지났다.

 

시골은 잘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요즘은 예전과 같지 않다. 해마다 인구가 줄긴 해도 지자체들은 주민들의 생활 편의를 위한 시설 투자를 계속하고, 관광자원을 개발하는 데도 힘쓴다. 오랜만에 거길 찾아온 사람이 갑자기 달라진 시가의 모습에 헷갈리곤 하는 이유다.

 

요즘은 시골도 적잖이 변화한다

 

물론 무슨 상전벽해 같은 변화가 있지는 않다. 그러나 포장된 도로가 새로 나고, 낯선 건물 몇 채만 들어서도 달라지는 게 저잣거리의 풍경 아닌가. 2015년에 성밖숲에 와 보곤 깜짝 놀랐던 이유다. 그곳은 내 기억 속의 성밖숲과 너무 달라서 나는 내 기억이 의심스러워질 지경이었었다.

 

해동청풍비를 둘러보고 떠나려다가 성주에 들르기로 하고 ‘성주 관광’을 검색했더니, ‘성주읍성’과 ‘성산동 고분군 전시관’이 떴다. 그새 또 풍경이 달라진 것이다. 옛 성주읍성을 복원·재현한 성주역사테마공원을 둘러보고 바로 성산리의 고분군 전시관을 향했다.

 

성주는 내 고향 칠곡과 같은 선거구로 묶인 고을이지만, 내겐 친지 하나 살고 있지 않은 낯선 고을이었다. 그 성주가 내 삶과 이어진 것은 1988년에 성주·칠곡의 교사들이 함께 교사협의회를 꾸리면서다. 이름도 ‘성주·칠곡교사협의회’가 되었다. 교협은 이듬해 비합법 노조로 출범한 전교조의 성주·칠곡지회로 바뀌었다.

 

전교조 출범으로 성주와 칠곡에서 각각 교사가 두 명씩 해직되면서 우리는 지역에서 상근을 시작했다. 우리는 추렴하여 중고 승합차를 한 대 사서 이 차로 주중 2~3일 정도 지역의 학교를 방문하곤 했다. 그런 생활이 두어 해 이어지면서 사통팔달의 성주군 도로망을 골골샅샅 익힐 수 있었다.

▲ 성산동 고분군은 5~6세기 가야연맹체를 이룬 소국 중 성산가야의 실체에 대한 고고학적 자료다.

그런데 복직한 뒤, 1990년대 후반에 다시 성주를 찾았을 때는 방향조차 헷갈릴 만큼 성주는 변해 있었다. 그게 우리가 전혀 가늠하지 못한 시골의 변화였다. 인구는 줄어도 시가지는 번화해지는 등 도시를 닮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장을 끼고 있는 거리를 빼면 전형적인 소읍의 모습은 찾아보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2016년 사드 배치를 피한 ‘성산’의 고분군

 

1990년대에 성주에서 활동할 때만 해도 성산리에 가야 시대의 고분군이 있다는 건 나는 알고 있었다. 먼빛으로 바라보는 고분군은 고분이 드문드문 솟은 산기슭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거기 전시관이 세워졌다니 변화는 그 산기슭에도 온 것이었다.

 

고분군이 깃들인 성산(星山)은 성주읍 성산리와 선남면 성원리, 신부리에 걸쳐 있는 높이 384.3m의 나지막한 산이다. 성산가야(星山伽倻)의 중심지였던 이곳에 국가 사적 제86호인 성산동 고분군과 국가 사적 제91호였지만, 공군 방공포대로의 연결 도로로 사용되면서 문화재적 가치를 잃어 국가 사적에서 해제(1966)된 성산성(城)이 있다. 이 성산에 사드(THAAD,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가 배치될 예정이라 하여 시끄러웠으나, 사드는 초전면 소성리로 옮겨갔다.

 

성산은 한편, 5~6세기 가야연맹체를 이루는 소국 가운데 성산가야의 수도였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선 ‘벽진가야’라 부르기도 하는 성산가야는 “지금(고려 초)의 경산(京山)”이라고 하였다. 경산은 오늘날 성주군의 중심인 성주읍에 있으니 옛 지명인 경산부(京山府)가 그대로 전해진 것이다.

 

성산동 고분군은 바로 이러한 성산가야의 실체에 대한 고고학적 자료다. 성산동 고분군은 성주 수죽·용각리 고분군, 명천리 고분군과 함께 성주지역 3대 대형 고분군 중의 하나다. 성주지역의 중심인 성산 분지에 자리 잡은 입지, 323여 기에 이르는 개별 고분 수와 봉분의 규모, 출토유물의 질과 양 등을 고려할 때 가장 으뜸으로 당시 성주지역 최고 지배자 계층의 무덤으로 추정한다.

▲ 지금 발굴조사 중인 48호분(푸른 천으로 덮인 곳)은 1920년에 이어 100년 만의 재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 성산동 고분군은 조사된 유물로 미루어 5~6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출토된 부장품은 다양한 형태의 토기가 많았다.

성산동 고분군에는 모두 323기의 봉토분이 있다. 이 고분군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1918년에 3기, 1920년에 2기를 발굴 조사하였고, 광복 후에는 1986~87년에 계명대학교 박물관에서 5기를 발굴 조사하였다.

 

성산가야 지배층의 무덤, 독특한 ‘성주양식’의 토기

 

무덤 양식은 무덤 주인이 묻힌 주곽(主槨, 으뜸덧널)과 부장품(副葬品, 껴묻거리)을 넣은 부장곽(副葬槨, 딸린덧널)이 갖추어진 다곽묘(多槨墓, 여러널무덤)임이 밝혀졌다. 주곽은, 5세기에는 깬돌을 쌓고 넓적하고 편평한 돌은 세워 네 벽을 만든 수혈식석곽묘(竪穴式石槨墓, 구덩식 돌덧널) 혹은 수혈식 석실묘(石室墓, 돌방무덤)가 만들어졌고, 6세기에는 네 벽을 깬 돌로만 쌓은 횡구식석실묘(橫口式石室墓, 앞트기식 돌방무덤)이 조성되었다. 부장곽에는 넘칠 정도로 많은 유물을 넣어두었는데, 이 시기의 성주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다양한 형태의 토기를 많이 껴묻은 점이 특징이다.

 

무덤에서 출토된 부장품(副葬品)으로 뚜껑 있는 굽다리접시, 굽다리 긴목항아리, 원통 모양 그릇받침 등의 토기류와 금귀걸이, 은 관 꾸미개, 은 허리띠 꾸미개 등의 장신구류, 둥근 고리 큰 칼, 쇠 투겁창, 쇠 화살촉, 쇠 손칼 등의 무기류가 있다. 조사된 유물로 미루어 무덤 조성 시기는 5~6세기로 추정할 수 있다.

 

토기들은 신라권역의 고분에서 출토된 것과 비슷하나 경주 일대의 ‘경주양식’ 토기와는 구별되어 ‘성주양식’ 토기로 불린다. 이러한 유물들은 고대 성주지역의 지배층이 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당시 신라와 적대관계이자 성주지역과 지리적으로 인접한 대가야와는 문화적 교류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선남면 장학리 별티3호분의 구덩식돌덧널무담(수혈식석곽묘)

인근 고령에서 번성한 가야연맹체 대가야(大伽倻)에서 순장(殉葬)이 성행했으나, 성산동 고분군에서 순장의 결정적인 증거를 찾을 수는 없다. 그러나 성산동 고분의 부장곽들은 순장과 유물부장을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낙동강 동안(東岸) 지역의 주부곽식 고분들은 주로 ‘일(日)’자형의 배치지만, 성산동 고분은 부장곽을 주곽 옆에다 설치한 독자성을 보여주고 있다.

 

성산동 고분군 가운데 발굴한 고분 5기에서는 1천여 점에 가까운 토기가 출토되어 다른 고분에 비해 토기가 많다. 그러나 고분의 규모에 비해 관모(冠帽)류를 비롯한 장신구류, 갑옷과 투구류, 장식 큰칼류와 금속용기나 기타 금공품(金工品)류는 거의 출토되지 않았다. 또 무덤 주인공이 안치된 주곽에 유물이 빈약한 점도 특기할 만하다.

▲ 성주 성산동 고분군 전시관은 지난해 5월 정식 개관하여 지역의 평생교육의 장, 대표 문화휴식 공간을 지향하고 있다.
▲ 전시관 안의 상설전시실.
▲ 성산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온갖 종류의 토기들. 이 토기들은 경주양식이 아니라 '성주양식'이라 불린다.

전시관 오른쪽에 펼쳐진 성산의 기슭에 들어선 고분군은 신라의 그것에 익숙한 관람객에겐 애걔걔 소리가 날 만큼 작아서 고분이라는 생각이 단박에 들지는 않았다. 깨끗이 정비되지 않고 잡풀 속에 버려져 있었다면 모습이 남다른 언덕처럼 보일 수도 있을 듯했다.

 

성산동 고분군의 ‘열쇳말’, 재발굴 조사 중인 48호분이 알려줄 수 있을까 

 

성산동 고분군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의 고분은 48호분, 1917년 조선총독부의 ‘조선 고적 조사사업’으로 시행된 현장 조사 과정에서 분포와 위치가 처음으로 알려진 이래 이후 1918년과 1920년 고분 발굴이 진행됐다. 발굴 당시 중심석곽에서 다량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지만, 발굴을 맡았던 총독부 고적 조사위원 야쓰이 세이이쓰(谷井濟一)는 조사 내용을 전혀 보고하지 않았다. 발굴 과정도 허술하여 고분이 손상되기도 했다.

 

1920년의 발굴조사는 단기간에 주곽 내부의 유물만 파냈을 뿐, 축조 방식과 주곽의 구조·형식에 대한 실측과 기록도 빠졌다. 다행히 내부에서 나온 유물만 수습했는데, 이들 유물은 지금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보관 중이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100년 만의 발굴조사는 제48호분의 성격을 정확히 규명하는 것은 물론 성주지역의 고분 문화와 그 실체를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조사가 끝나는 2023년 이후에야 전체 윤곽이 드러날 전망이다.

 

2021년 5월에 정식 개관한 성산동 고분군 전시관은 제법 규모가 컸다. 방학을 맞아 어린이와 함께 온 부모들이 간간이

눈에 띄었는데, 맞추어 전시관 안에는 가족 쉼터와 어린이 체험실 따위가 갖추어져 있었다. 마땅한 문화 시설이 없는 지역에 생긴 고분군 전시관이 성주군이 뜻한 바대로 “평생교육의 장, 대표 문화휴식 공간”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상설전시관에 전시 중인 벽진면 가암리에서 출토된 금동관 복제품.

전시관을 둘러보고, 안내 전단을 받아 돌아왔는데, 이 글을 쓰면서 꽤 당황스러웠다. 한마디로 고분군을 정의할 수 있는 열쇳말을 찾을 수 없었다. 1500년도 전의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그 유적을 손쉬운 말로 정리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뜻이다.

 

물론 그건 전적으로 이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이 성산가야의 전모를 드러낼 만한 수준이 아니었던 탓이다. 원래 가야는 고대사 가운데에서도 홀대받은 지역사라고 한다. 신라 중심으로 기술되는 삼국시대와 마찬가지로 고고학적 자료 부족으로 한계에 다다른 가야가 관심에서 멀어지는 것은 당연한 절차였을 것이다.

 

이는 오랜 세월 동안 성산동 고분군이 일반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온 이유이기도 하다. 지역 최고 지배자 계층의 무덤으로 추정해도 출토물이 신라의 고분에 비기면 보잘것없는 정도여서 그거로 역사를 규정하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져 왔다. 앞서 말한 ‘열쇳말’ 부족의 배경이다.

 

2023년 이후, 48호분의 재발굴 조사가 이 수수께끼들의 매듭을 얼마나 풀어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게 미지의 고대사를 이해하는 실마리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2022. 1. 1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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