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풍경

용연사(龍淵寺), 비슬산의 만산홍엽

by 낮달2018 2022. 1. 8.
728x90

▲ 용연사 전경. 솔숲 탓인가. 이 절집은 나그네를 위압하지 않고 고즈넉하게 맞이하고 있었다. 첫 디카였던 똑딱이로 찍은 사진이다.

용연사(龍淵寺)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면 반송리 비슬산 자락에 있다. 그리고 거기 달성군 옥포면 너머 논공읍에는 이제 15개월째 이른바 ‘짬밥’을 먹고 있는 아들 녀석이 근무하고 있는 부대가 있다.

 

두 달만의 면회. 외출을 허락받은 아이와 함께 우리는 이 절집 아랫마을에서 곰탕과 산나물비빔밥을 먹었고, 절 구경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시간을 죽이기 위해 바야흐로 깊고 짙어진 만산홍엽(滿山紅葉)을 한번 휘 돌아볼 수 있었다.

 

그 기슭에 용연사를 품고 있는 비슬산(琵瑟山)은 내가 다녔던 중학교 교가(“비슬산 정기를 얼싸 누리고……”)에도 등장하는, 팔공산과 함께 대구의 진산(鎭山)격의 산이다. 그러나 높이나 산세가 비슷한데도 비슬산은 팔공산보다 훨씬 작은 산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팔공산이 대구 북부를 에워싸고 늠름하게 서 있는데 비겨, 비슬산은 그 산자락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앞산’으로만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까닭이 아닐까 한다.

 

비슬산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청도군, 경산시, 창녕군의 경계에 서 있다. 비슬산의 모양새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청도 쪽이나 현풍 쪽에서 봐야 제 모습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비슬산을 현풍 쪽에서 보면 그 기묘함이 금강산에 비길 만하고 청도 쪽에서 보면 그 웅장함이 팔공산에 견줄 만하다고 한다.

▲ 용연사 극락전. 배면 기둥과 대량에 시주의 이름을 음각하고 있는 게 특이하다고 하는데, 정작 확인하지는 못했다 . 18세기 건축양식이다 .
▲ 용연사 삼층석탑. 신라 석탑에서 변모된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한다.
▲ 용연사 안양루(安養樓). 원래 이름은 보광루였다고 한다. 극락전 앞에 서 있다.

10세기께 신라 신덕왕 때 창건된 이 가람은 크게 세 차례(임진왜란, 효종과 영조대) 큰불을 겪었다. 당연히 여러 당우와 전각의 소실과 재건이 거듭되었는데, 임란 후의 중창을 맡은 이가 곧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이다. 지금의 건물은 영조 4년(1728)에 세워진 것이다. 좁고 정겨운 산길을 오르면 오래된 솔숲 사이로 고즈넉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이 절집의 천왕문은 시방 보수 중이었다.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1호로 지정된 극락전 앞뜰에는 삼층석탑 한 기와 마치 금당 앞 쌍탑처럼 목련 두 그루가 한낮의 햇빛 속에 서 있었다. 극락전은 앞면과 옆면 모두 3칸의 맞배지붕 다포집인데, 뜰 아래에서 올려다봐서인가, 지붕의 무게가 버거워 보였다. 용연사가 극락전을 본당으로 모신 까닭은 석가세존의 진신 사리가 모셔진 석조계단(石造戒壇)이 있기 때문이다.

 

계단(戒壇)은 불사리를 모시고 수계의식을 집행하는 곳으로 부처님이 항상 그곳에 있다는 상징성을 띤 곳이다. ‘통도사의 금강계단’, ‘금산사의 방등계단’과 함께 ‘용연사의 석조계단’은 대표적인 ‘계단형 사리탑’이다. 이 석조계단(보물 539호)에 세존의 사리가 봉안되어 있으므로 당연히 용연사 적멸보궁에는 불상이 없다.

▲ 영산전 추녀에 걸린 풍경(風磬)

산 위여서인지 바람이 제법 차고 쌀쌀했다. 아이들과 아내는 대화에 바빠서 절 구경을 영 심드렁해했다. 어차피 지나는 길에 들른 것이어서 애면글면할 이유가 없어서 적멸보궁으로 가는 언덕길을 버리고 하산길을 택했다.

 

빛의 위치나 세기에 따라서 풍경은 몇 번씩 몸을 바꾸는가. 내려오는 길가의 숲은 역광의 햇빛을 받아 더 선명하고 더 아름다운 붉고 푸른 단풍으로 불타고 있었다. 여전히 화질에는 자신이 없었지만 밑져야 본전, 나는 틈나는 대로 셔터를 눌러댔다. 집에 와서 컴퓨터에 옮겨놓고 보니, 그나마 단풍잎의 빛깔은 새롭게 다가온다. 아래의 사진들이 그 전리(戰利)이다.

▲ 용연사 일주문인 자운문(慈雲門). 하산길에 찍었다.

아들 녀석은 세 시가 넘어 부대로 들어갔다. 이 땅의 젊은이들이 그들 청춘의 한 시기를 감당해야 하는 ‘군대’는 이 가슴 아픈 분단 시대의 우울하고 슬픈 통과의례이다. 병영에서의 관계와 소통도 사회에서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 듯하다고 아이는 말했다. 그렇다. 군대는 그 선악을 넘어 한 사회의 삶과 풍속을 그대로 응축하고 있다는 것을 녀석은 시나브로 깨닫고 있었다.

 

 

2006. 11. 11. 낮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