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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해직 교사2

그 시절엔 ‘30만 원’으로도 행복했다! 해직 시절, 생계비 30만 원으로 살았다 오전에 경북지부 누리집에 들어갔다가 글 한 편에 시선이 꽂혔다. 한 활동가가 ‘조합원 의견 마당’에 올린 예의 글 제목은 ‘91년 1월의 해직 교사 생계 활동 지급표’다. 지회 20주년 행사를 위해 자료를 찾다가 발견한 팩스 서류라고 한다. 얼른 감이 오지 않았는데, 첨부한 이미지 파일을 열자, 18년 전의 세월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1991년이면 해직 2년이 되던 때다. 1989년 9월부터 봉급은 끊어졌고, 현직 교사들이 매월 내던 1만 원의 후원금으로 조성한 ‘생계비’를 받아서 살았다. 글쓴이는 그때, 생계비 지급기준에 따라 미혼 교사에게는 20만 원이, 맞벌이하는 배우자가 있을 경우엔 15만 원이 지급되었다고 전한다. 기억이 아련한데, 첨부한 이미지 파일은 .. 2021. 6. 22.
‘노숙(露宿)’의 기억 중앙인사위원회 앞 노숙 항의 지난 7월 25일 오후, 나는 복원된 청계천 시작점 옆, 한 빌딩 앞 인도에 마련된 야외용 매트에 동료 50여 명과 함께 앉아 있었다. 길 건너 동아일보사 건물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보수의 성채인 양 위압적으로 서 있었고, 끊임없이 오가는 행인들 너머 인도턱에 바투 세워 놓은 이동경찰서 차량(이른바 ‘닭장차’) 세 대가 차도에서 달려드는 매연을 막아주고 있었다. 지휘관인 듯한 사복 차림의 중년 사내가 주변을 서성거렸고 헬멧을 덮어쓴 대여섯 명의 의경들이 우리가 등지고 있는 건물의 현관 앞에서 방패를 앞세우고 마치 로마의 검투사처럼 서 있었다. 그들의 무표정한 눈빛 너머 현관 입구에는 ‘중앙인사위원회’ 현판이 붙어 있었다. 그랬다. 우리는 중앙인사위원회에 복직 교사 원상회복을.. 2020. 7.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