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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조선의용대6

[오늘] 대한민국 임시정부, 일본에 선전 포고하다 [역사 공부 ‘오늘’] 1941년 12월 9일, 임정, 일본과 독일에 선전포고 1941년 12월 9일, 충칭(重慶)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는 일본과 독일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본격적인 항일 독립전쟁을 시작하였다. 12월 7일, 일본군이 하와이 진주만의 미군 기지를 기습 공격함으로써 발발한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지 이틀 만이었다. 임정의 항일독립전쟁은 의열투쟁과 독립군 단체 지원, 광복군 창설 등의 군사 활동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로 대표되는 의열투쟁은 한국 독립에 대한 세계의 여론을 환기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일제의 보복을 피해 임정이 중국 각지를 떠돌아야 했다. 1940년 충칭으로 옮겨온 임정은 1940년 9월 17일 광복군을 창설하였다. 지청천을 총사령관으로 한 광복군은 .. 2023. 12. 8.
[오늘] 약산 김원봉의 ‘의열단(義烈團)’ 출범 [역사 공부 ‘오늘’] 1919년 11월 9일-김원봉, 항일비밀결사 ‘의열단’ 조직 1919년 11월 9일 밤, 만주 길림성 파호문 밖 한 중국인의 집에 모인 독립지사들은 밤새워 논의한 끝에 이튿날인 급진적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항일비밀결사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했다. 결사의 성격은 조직 후 만든 공약 10조의 첫 조항인 ‘정의(正義)의 사(事)를 맹렬(猛烈)히 실행한다.’에서 유래한 단체명[의열(義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의열단의 단원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중심으로 고문에 김대지와 황상규, 단원은 김원봉·윤세주(1900~1942)·이성우·곽경·강세우·이종암·한봉근·한봉인·김상윤·신철휴·배동선·서상락·권준 등 13명이었다. 단장에는 약산(若山) 김원봉(1898~1958)이 선출되었다. 의열.. 2023. 11. 9.
[임정 답사]혁명 열기 속 국경 넘은 사랑도 익어갔다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⑧] 광저우 ② 광저우 기의(起義)와 한중 로맨스, 조선의용대의 결성 둘째 날의 여정은 광주기의열사능원과 1921년 임정의 국무총리이자 외무총장이었던 신규식이 정식 외교 사절로 쑨원을 만난 동교장(東較場), 루쉰기념관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모두 한중 항일연대의 단초가 된 황푸군관학교로 이어지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신규식이 쑨원을 만나 임정의 정식 승인과 한국 학생들의 중국 군관학교 입교 등 독립운동 지원을 요청한 동교장은 이미 2만7천 규모의 광저우시 체육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사람들이 기억하든, 기억하지 못하든 역사는 그것 자체로 완결된 사실의 기록이다. 그러나 건물 외관만 둘러보고 돌아서는 여정은 씁쓸하다. 1927년 12월 11일 새벽에 시작된 광저우 기의(起義)는 3년 .. 2021. 2. 10.
[임정 답사]황푸군관학교, 한인 청년을 조련한 ‘혁명의 요람’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⑦] 광저우 ① 한중 항일연대의 단초 황푸군관학교 2015년 상하이(上海)에서 항저우(杭州)와 전장(鎭江)을 거쳐 난징(南京)에서 마무리한 4박 5일(1.23.~1.27.)간의 1차 임시정부 노정 답사를 이은 2차 답사를 떠난 것은 지난해 1월이었다. 답사의 기억이 바래 가는 5년 만에 다시 길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그러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느닷없는 코로나19의 기습으로 답사 한 달 뒤부터 나라 밖 여행이 꽁꽁 묶여 버렸기 때문이다. 5박 6일(1.9.~1.14.)간의 2차 답사는 일정상 창사(長沙)를 건너뛰고 광저우(廣州)에서 출발하여 류저우(柳州)·치장(綦江)을 거쳐 충칭(重慶)에서 마무리하는 여정으로 진행되었다. 82년 전,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은 창사에서 .. 2021. 2. 9.
밀양, 2017년 11월 경남 밀양의 ‘항일투쟁’ 기행 입대를 앞둔 청춘의 어느 날, 아내와 함께한 짧은 여행을 하기 전까지 밀양(密陽)은 이 나라의 나머지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나와 무관한 도시였다. 그 짧은 여행의 기억으로 밀양은 내 기억의 사진첩으로 슬그머니 들어왔다. 밀양, 그 도시와의 인연과 기억 그리고 한때 젊음의 열망을 함께 지폈던 벗 하나가 거기 정착하게 되고 30년 전에 내 앞에서 국어 교과서를 펴고 있었던 여제자 하나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면서 밀양은 내 삶의 어떤 부분으로 성큼 들어왔다. 벗 덕분에 우리는 매년 한 차례씩 그 도시에 들러 명승을 찾고 함께 술을 마시고 모텔이나 친구의 시골집에서 자곤 했다. 거기 살고 있던 여제자와 연락이 닿으면서 부산에 살고 있던 그 동기들이 대거 몰려와 단란한 시간.. 2019. 11. 2.
중국에서 본 한국인 묘, 비석에 새긴 이름 읽는 순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⑤] 난징, 항공열사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대한민국 임시정부(아래 임정)가 공식적으로 난징(南京)에 청사를 둔 일은 없다. 훙커우 의거 이후 상하이를 떠난 임정은 항저우에서 3년을 머물렀고, 1935년에는 난징과 자동차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전장(鎭江)으로 옮겨갔다. 난징에 남은 임정의 자취들 당시 난징은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 수도였으므로 임정도 난징으로 가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임정이 난징 대신 전장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일본의 협박 때문이었다. 일본 해군은 난징 성안에 임정 청사를 두면 양쯔강을 거슬러 올라가 난징을 폭격하겠다고 을러댔던 것이다. 청사는 전장에 두고 임정 요인들은 대부분 난징에 거주했다. 뤄양(洛陽)의 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2019. 3.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