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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안동12

안동의 3·1 만세운동 안동의 3·1 만세운동 재현 행사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날을 그 사건의 이름으로 삼는 전통은 우리나라에서 매우 ‘유구’한 듯하다. 이 방식은 사건의 발생일만을 건조하게 표시할 뿐 그 사건의 본질을 드러내는 데는 매우 불편한 방식이다. 연도를 따로 표시하지 않으니 날짜만 달랑 떠오르는 데 글쎄, 그게 합리적이지는 않아 보인다. 3·1운동은 일제의 폭압적 식민 지배에 저항에 들불처럼 일어난 민족해방운동이다. 이 운동은 1919년 3월 1일부터 5월 7일까지 두 달이 넘게 한반도 전역에서 전개되었다. 3·1운동은 ‘극소수 친일파·친일 지주·예속자본가를 제외한 전민족적 항일 독립운동이자 계몽운동, 의병운동, 민중의 생존권 수호 투쟁 등 각계각층의 다양한 운동 경험이 하나로 수렴된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 2024. 3. 1.
안상학 시집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안상학 새 시집 안동의 안상학 시인이 시집을 새로 냈다. 2008년에 낸 이후 6년 만이다. 나는 그 소식을 기사를 통해서 알았다. 며칠 후에 시인의 동무인 안동의 후배로부터 주소를 보내달라는 전갈을 받고 나는 그렇게 답했다. “그러잖아도 기사를 읽었어. 경상북도엔 안상학밖에 없네!” 우리 고장에서 시집을 내는 이가 어찌 안상학 시인밖에 없기야 하겠는가. 그러나 이 시대 지상의 가치로 추앙받는 돈과 무관하게 힘들여 시를 쓰고 이 한여름에 시집을 펴내는 여느 시인을 죄다 알지 못하니 역시 그뿐이라고 말할 수밖에. 안상학, 다섯 번째 시집 출간 여섯 해 전 을 냈을 때 나는 이 지면에다 그의 시집에 대해 이런저런 성근 감상을 주절댔다.[관련 글 :‘밥 못 먹여 주는’ 시와 함께 살아온 시인의 20년 세월] .. 2022. 7. 27.
새로 생긴 ‘영가대교’ 이야기 안동 낙동강의 새 다리 ‘영가대교’ 안동에 살면서 떨칠 수 없는 의문 중의 하나는 어떻게 이곳이 지역의 중심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아무리 낙후 지역이라고 하지만 명색이 경북 북부지역의 거점 도시다. 그런데도 문외한의 눈으로 봐도 안동은 도시의 기본 입지 조건도 갖추지 못한 곳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거둘 수 없다. 안동은 인구야 고작 16만을 넘는 정도지만, 그 면적은 1,520㎢로 서울(602.52㎢)의 두 배를 훨씬 넘는다. 그러나 그건 도농 통합 이전의 안동군 지역, 즉 읍면 모두를 포함한 면적이다. 흔히 안동시로 불리는 시가지 지역은 학가산과 영남산 등의 산자락과 발밑을 적시며 흐르는 낙동강 사이에 꽉 끼어 있어 옹색하기가 이를 데 없다. 옹색함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시내 전역은 .. 2022. 7. 3.
삼월을 맞으며 20년 만에 여학교로 돌아와서 3월이다. 내 탁상 달력에는 ‘온봄달’이라 이름 붙이고 있는데, 그 ‘온’의 의미가 잘 짚이지 않는다. 아마 ‘온전하다’는 의미인 듯한데, 따로 사전을 찾아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니 그러려니 하고 짐작하고 만다. 1일은 3·1절. 오늘 저녁에는 시(市)에서 ‘횃불 만세운동’ 재현 행사를 연다고 한다. 행사 사진을 몇 장 찍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일찌감치 행사장 인근의 건물을 물색해 사진 찍을 장소를 봐 둬야 하는데, 썩 자신이 생기지 않는다. 삼각대를 설치해 야경을 찍은 경험이 없어서다. 안동은 최초의 항일 독립운동인 ‘갑오의병(1894)’이 봉기한 곳으로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국한 지사를 열 분(전국 60여 분)이나 낳았고, 단일 시군으로는 시도 단위.. 2022. 2. 28.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말을 잃었다 시민과 교사들의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규탄 공동 기자회견’ 한동안 바빴다. 여든셋 장모님이 떠나는 먼 길을 배웅해야 했고, 이런저런 일 때문에 곁을 돌아보는 게 쉽지 않았다. 그리고 어제에야 겨우 정신을 가다듬었다. 자정 넘어 날아온 텔레그램으로 이웃 시군에 사는 명퇴 동료가 보낸 메시지가 허탈했다. 친구가 말한 ‘거기’는 안동시청 앞에서 시민들과 교사들이 연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규탄 공동 기자회견’이다. 나는 그에게 물어서 그런 행사가 있었다는 걸 알았다. 이 기자회견에 나온 이들 가운데 퇴직한 선배, 동료 교사들도 눈에 띄었다. 시민과 교사들이 굳이 안동에서 기자회견을 연 것은 이유가 있다. 안동은 시청에 걸린 현판(한국 정신문화의 수도)에서 나타나듯 ‘항일투쟁 독립운동의 성지’이기 때문이다. .. 2021. 10. 24.
금계국(金鷄菊) 꽃밭에서 안동 낙동강변의 금계국 꽃밭 “안동엔 꽃이 많다.”라는 진술은 뜬금없을까. 지방자치제가 뿌리를 내리면서 모든 지방 자치단체가 시가지와 관내 일원을 아름답게 단장하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니 말이다. 요즘 어디를 가도 연도는 꽃길이다. 철 따라 달라지는 꽃길을 가꾸는 것은 그 목적이 어디에 있든 좋은 일이다. 안동의 4월은 벚꽃으로 하얗게 빛나고, 5·6월은 금계국의 노란빛으로 부시다. 안동시는 꽃과 숲이 어우러진 ‘생태환경 도시’ 조성을 위해 2006년부터 금계국을 심기 시작해 첫해인 2006년에 97㎞, 지난해 100㎞, 올해 100㎞의 금계국 꽃길을 만들었다. 지난 5월 말부터 온 시가지와 도로가 금계국 노란 꽃으로 뒤덮여 있다. 짙은 녹색의 줄기 때문에 더 화사하게 두드러지는 노란 꽃의 행렬은 길마다.. 2021. 6. 13.
“너희 집도?” “6천 마리 죽였어요” [르포] 구제역 휩쓴 안동·예천 지역…주민들은 울상, 지역경제 꽁꽁 ‘54년 만의 혹한’이라는 성탄절. 많은 가정과 교회에서 ‘구주 오신 날’을 기리고 있을 때, 경상북도 안동 지역에서는 구제역 예방 백신 접종이 시작되었다. 지난 11월 29일 안동시 와룡면 서현 양돈 단지에서 최초의 구제역 양성반응 판정이 있은 지 꼭 27일 만이다. 지역을 얼어붙게 한 것은 수십 년 만의 추위만이 아니다. 양돈 단지에서 발생한 구제역은 일주일 만에 무려 30곳으로 번졌고, 예천·영양·영주·봉화 등 경북 일곱 개 시군으로 확산하였다. 12월 25일 현재 안동에서는 한우 3만2000여 마리, 돼지 9만4000여 마리 등 총 12만9000여 마리가 살처분됐다. 이는 전체 가축 16만6000여 마리 가운데 83%에 해당하는 .. 2020. 12. 28.
그는 왜 안동시민에게 주먹밥을 나눠줬을까 ‘5·18 기념 안동 주먹밥 나누기’ 행사 준비한 차명숙씨 이 땅의 슬픈 현대사는 ‘오월’을 보통명사에서 고유명사의 자리로 끌어올렸다. ‘계절의 여왕’과 ‘메이퀸’ 따위의 달콤한 어휘로 싱그러웠던 오월은 그러나, 1980년 빛고을의 고통스러운 항쟁의 시간을 거치면서 자유의 하늘을 찢는 날카로운 총성과 핏빛으로 거듭 피어났기 때문이다. ‘고정간첩의 사주로 일어난 폭동’에서 ‘사태’를 거쳐 공식적으로는 ‘민주화 운동’으로 정착했지만, 여전히 빛고을의 오월은 혼란스럽다. 5·18을 ‘민중항쟁’으로 부르는 사람만큼 그것을 ‘사태’와 ‘폭동’으로 이해하는 이의 숫자도 만만치 않으니 말이다. 영남 사람들에게 5·18광주민중항쟁은… 스물여덟 돌 5·18을 맞아 5·18 기념재단이 벌인 설문조사 결과, 국민 열 중 하.. 2020. 5. 18.
「성탄제」의 김종길 시인 타계 1926 ~2017년 4월 1일 지난 1일, 원로시인이자 영문학자인 고려대 명예교수 김종길(1926~2017) 선생이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지난달에 부인을 잃고 힘들어하다가 그예 뒤를 따랐다고 한다. 향년 91세. 내외분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떠나시어 유족들의 슬픔은 크겠지만 두 분은 인연이 남달랐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선생의 본명은 김치규, 경북 안동 출신이다. 1947년 신춘문예에 시 ‘문’으로 입선하며 등단했다. 그는 “서양 이미지즘 시학을 받아들이면서도 기교에 치우치지 않고 고전적 품격을 지닌 시세계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은 시인이다. 나는 1980년대 초임 시절에 제4차 교육과정의 고등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린 그의 대표작 ‘성탄제’를 여고생들에게 가르쳤다. 갓 대학을 졸업하고 .. 2020. 4. 1.
좁지만 편안했던 ‘내 인생의 첫 집’을 떠나며 복직하여 마련한 24평 작은 집을 떠나며 내일모레면 이 도시를 떠난다. 2월 중순쯤에 나올 전보 명령에 앞서 서둘러 이사를 하는 것은 집을 산 이가 하루라도 빨리 집을 비워주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1월 말까지 수업이 남아 있고 2월 초에도 며칠 간 근무를 해야 하지만 부득이한 일이다. 아침에 아파트 앞 이발소에 가서 마지막 머리를 깎았다. “여기 한 십 년쯤 다녔지요?” 하고 물었더니 늙수그레한 이발사는 “벌써 그렇게 됐나요?” 하고 되묻는다. 예천에서 여기로 옮아온 게 1997년이다. 그해 7월에 준공검사를 앞두고 시공업체의 부도로 어수선한 가운데 우리는 예천 서본리의 오래된 국민주택을 떠나 난생처음 내 명의의 아파트에 들었다. 좁지만 편안했던 ‘내 인생의 첫 집’ 식구들 모두 행복하게 새집에 입주했다.. 2019. 12. 17.
고별(告別)의 말씀 – 안동을 떠나면서 안동의 선배, 동료, 후배 동지들께 올립니다 미루어 오던 인사, 이제야 올립니다. 지난 1월 중순께 저는 안동을 떠나 구미로 이사했습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저는 여전히 안동여고 소속이어서 방학 중 보충수업은 물론, 개학 후 종업식까지 안동에 머물렀습니다. 다음 주쯤으로 예상되는 전보 인사가 발표되면 공식적으로 고별의 말씀을 여쭈기로 작정한 게 인사를 미루어 온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어제 학교에서 2011학년도 종업식을 끝으로 아이들, 동료들과 작별하면서 더는 미루어서는 안 되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치러주신 송별의 모임에서 인사 말씀 올렸습니다만 다시 고별의 말씀을 드리는 것은 떠나면서 안동에서의 제 삶을 아퀴 짓고 싶어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객지, 안동에서의 14년 안동은 제게.. 2019. 9. 1.
안동에서 10년째 살기 안동과 인연 맺고 산 지 어느새 10년 아주 뿌리 박고 살겠다고 안동에 들어온 때가 1997년 여름이다. 한 8년쯤 된 셈이다. 그 여덟 해의 시간 동안 내가 사는 아파트 뒷동네의 을씨년스러운 야산이 고급 아파트 단지로 바뀌고, 그 너머 동네가 신시가지로 개발되면서 아파트촌 주변이 시끌벅적한 유흥가가 되어 버린 변화가 있었다. 나는 이른바 안동에서 나고 자란 ‘안동사람’은 아니다. 죽을 때까지 이 땅에서 산다고 해도 ‘안동사람’이 될 수는 없다. 고작해야 ‘안동사람 다된’ 정도일 터이다. 그것이 이 나라에서 한 지역 사람이 되는데 필요한 불문율인 것이다. 안동을 처음 만난 건 1984년이다. 그해 겨울, 대학 시절에 ‘죽고는 못 살던’ 친구의 결혼식 때문에 난생처음 안동에 발을 디뎠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2019. 8.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