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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사명당2

여섯 해, 직지사도 세상도 변했다 2012년에 다시 찾은 직지사 황악산(黃岳山) 직지사(直指寺)를 다시 찾았다. 2006년 9월 초순에 다녀간 이후 꼭 6년 만이다. 그때 나는 김천에 사는 한 동료 교사의 부친상 문상을 다녀오던 길이었다. 9월이라 아직 나무와 숲은 푸르렀고 하오 다섯 시였는데도 해는 한 뼘이나 남아 있었다. [관련 글 : 절집 안으로 들어온 숲, 직지사] 모시고 간 선배 교사와 함께 두서없이 경내를 돌아다니다 우리는 이 절집이 만만찮은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는 데 합의했다. 오래된 산사는 널찍했고, 띄엄띄엄 들어선 전각과 어우러진 숲이 아름다웠다. 그때 쓴 글의 이름이 ‘절집 안으로 들어온 숲, 직지사’가 된 것은 그런 까닭에서였다. 직지사는 신라 눌지왕 때인 418년, 아도 화상이 인근 태조산 도리사와 함께 세운 절이다.. 2019. 11. 15.
절집 안으로 들어온 숲, 직지사(直指寺) 황악산 직지사 기행 망자에겐 서운할 터이나 호상(好喪)의 죽음이란 반드시 슬픈 것만은 아니다. 김천에서 나서 자라 만만찮은 보수의 구각과 맞서 싸워 온 선배가 부친상을 입었고, 지난 주말, 선배 한 분을 모시고 그 문상을 다녀왔다. 향년이 84년이라면 사람에 따라 ‘수(壽)했다’고 할 수도, ‘조금 아쉽다’고 할 수도 있는 다소 애매한 시간인 듯하다. 경상도에선 아직도 흔히 볼 수 있는 굴건제복의 상주들이 감정을 담지 않고 느리게 뱉는 호곡(號哭)이나 그들과 맞절을 하고 앉아서 나누는 문상객들의 대화에서 묻어나는 것은 형식화된 슬픔이다. 그러나 의례적인 슬픔과 위로의 수사(修辭)에서 가식이나 위선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노인들의 죽음이란 늘 준비되어 있는 일정 같은 것이며, 그 죽음으로 말미암게 되는 산 .. 2019. 9.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