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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복직3

좁지만 편안했던 ‘내 인생의 첫 집’을 떠나며 복직하여 마련한 24평 작은 집을 떠나며 내일모레면 이 도시를 떠난다. 2월 중순쯤에 나올 전보 명령에 앞서 서둘러 이사를 하는 것은 집을 산 이가 하루라도 빨리 집을 비워주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1월 말까지 수업이 남아 있고 2월 초에도 며칠 간 근무를 해야 하지만 부득이한 일이다. 아침에 아파트 앞 이발소에 가서 마지막 머리를 깎았다. “여기 한 십 년쯤 다녔지요?” 하고 물었더니 늙수그레한 이발사는 “벌써 그렇게 됐나요?” 하고 되묻는다. 예천에서 여기로 옮아온 게 1997년이다. 그해 7월에 준공검사를 앞두고 시공업체의 부도로 어수선한 가운데 우리는 예천 서본리의 오래된 국민주택을 떠나 난생처음 내 명의의 아파트에 들었다. 좁지만 편안했던 ‘내 인생의 첫 집’ 식구들 모두 행복하게 새집에 입주했다.. 2019. 12. 17.
고별(告別)의 말씀 – 안동을 떠나면서 안동의 선배, 동료, 후배 동지들께 올립니다 미루어 오던 인사, 이제야 올립니다. 지난 1월 중순께 저는 안동을 떠나 구미로 이사했습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저는 여전히 안동여고 소속이어서 방학 중 보충수업은 물론, 개학 후 종업식까지 안동에 머물렀습니다. 다음 주쯤으로 예상되는 전보 인사가 발표되면 공식적으로 고별의 말씀을 여쭈기로 작정한 게 인사를 미루어 온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어제 학교에서 2011학년도 종업식을 끝으로 아이들, 동료들과 작별하면서 더는 미루어서는 안 되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치러주신 송별의 모임에서 인사 말씀 올렸습니다만 다시 고별의 말씀을 드리는 것은 떠나면서 안동에서의 제 삶을 아퀴 짓고 싶어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객지, 안동에서의 14년 안동은 제게.. 2019. 9. 1.
좋은 이웃, 혹은 제자들(2) 복직 이후의 학교에서 만난 아이들 해직 5년은 내 삶에서 일종의 변곡점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이른바 ‘아스팔트’ 위의 교사로 쪼들리며 산 세월이었지만 마음만은 부자였던 시절이었다. 복직도 승리의 전망도 별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 시절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젊음 때문이었다. 5년 만의 복직, 다시 만난 아이들 1994년 3월에 나는 경북 북부지역의 한 시골 중학교에 복직했다. 막상 학교로 돌아왔지만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동료가 ‘중증’이라고 표현할 만큼 내 의식과 현실은 어긋나기만 했다. 그러나 거기서 지낸 2년도 잊을 수 없다. 고비를 넘을 수 있었던 것은 동료들의 지지 덕분이었던 것 같다. 서른아홉, 젊다면 젊었고 아이들은 순수했다. 첫해는 담임 없이 수업만 했고 이듬해는 학기 중간에 1.. 2019. 3.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