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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백범일지4

[오늘] 대한민국 임시정부, 일본에 선전 포고하다 [역사 공부 ‘오늘’] 1941년 12월 9일, 임정, 일본과 독일에 선전포고 1941년 12월 9일, 충칭(重慶)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는 일본과 독일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본격적인 항일 독립전쟁을 시작하였다. 12월 7일, 일본군이 하와이 진주만의 미군 기지를 기습 공격함으로써 발발한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지 이틀 만이었다. 임정의 항일독립전쟁은 의열투쟁과 독립군 단체 지원, 광복군 창설 등의 군사 활동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로 대표되는 의열투쟁은 한국 독립에 대한 세계의 여론을 환기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일제의 보복을 피해 임정이 중국 각지를 떠돌아야 했다. 1940년 충칭으로 옮겨온 임정은 1940년 9월 17일 광복군을 창설하였다. 지청천을 총사령관으로 한 광복군은 .. 2023. 12. 8.
[순국] ‘경술국적 이완용 처단 미수’ 이재명 의사 순국하다 1910년 9월 13일, 이완용을 처단하려다가 실패한 이재명(李在明, 1887~1910) 의사가 경성감옥(뒷날의 서대문형무소) 형장에서 순국했다. 1년 전(1909) 12월, 그는 이완용을 찔렀지만 실패해 체포되었고 2010년 5월 일제의 법정으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칼끝에서 살아남은 이완용은 8월 22일 데라우치 통감 관저에서 매국 문서(한일합병조약안)에 서명했고 합병은 일주일 후 발효되었다. 이재명은 평안북도 선천 사람이다. 어릴 때 평양으로 이주하여 개신교계 사립학교인 일신학교를 졸업했다. 1904년 미국노동이민회사의 이민 모집에 응하여 하와이로 가 농부로 일하다가 1906년 3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서 한인의 독립운동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재명, ‘국적 이완용.. 2023. 9. 13.
후미진 중국 골목에 한국인이 줄을 서는 이유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①] 상하이, 1919년에서 1932년까지 광복 70년, 서른여덟 명의 ‘청년 백범 4기’ 답사단은 지난 1월 23일부터 27일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아래 임정) 자취를 찾아가는 여정에 올랐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수립된 임정의 중국 내 이동 경로는 항저우(杭州), 전장(鎭江), 창사(長沙), 광저우(廣州), 류저우(柳州), 치장(綦江)을 거쳐 충칭(重慶)까지다. 그러나 우리의 여정은 우선 창사로 옮기기 직전의 난징(南京)까지다. 지난 세기, 백범을 비롯한 임정 요인들이 배를 타고, 혹은 기차를 타거나 걸어서 옮겨 다닌 수백, 수천, 수만 리의 길을 21세기의 후손들은 비행기로 날아 전세 버스를 타고 따른다. 그들이 일제에 쫓기며 꾸려야 했던 풍찬노숙 16년(191.. 2019. 3. 2.
<백범일지>를 다시 읽으며 임시정부 노정(路程)을 따라 2015년 1월에 나는 4박 5일간(23~27) ‘청년 백범’과 함께 임시정부 노정을 따르는 4기 답사에 참여했다. 상하이에 세워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일제의 압박과 중일전쟁의 전개에 따라 무려 일곱 번이나 옮겨가야 했다. 답사단은 상하이에서 출발하여 자싱(嘉興), 하이옌(海鹽), 항저우(杭州), 난징(南京)에 이르는 여정을 통해 1920~30년대에 걸쳐 임정이 걸어야 했던 고통의 세월을 확인할 수 있었다. 비록 그게 거의 1세기 뒤에 이루어진 수박 겉핥기 답습에 불과했다 할지라도 말이다. 답사는 임정이 26년 동안 거친 도시가 아홉 군데나 되어 2차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그러나 나는 아쉽게도 뒤에 진행된 2차 답사에는 다른 사정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언젠가 다시 2차 답사로 .. 2019. 3.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