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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메러디스 빅토리호2

[오늘] 압록강 진격 국군과 유엔군, 1·4후퇴로 서울을 다시 내어주다 [역사 공부 ‘오늘’]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의 공세로 1·4후퇴 시작되다 1951년 1월 4일, 전년도 12월께부터 시작된 중국 인민지원군의 공세로 전선에서 밀리던 국군과 유엔군은 마침내 서울을 내주고 남쪽으로 퇴각했다.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옮겨갔고 1월 14일, 유엔군은 북위 37도 선의 중서부 전선에서 30만 중공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른바 ‘1·4후퇴’가 시작된 것이었다. 일방적인 패퇴 끝에 전세를 뒤집고 압록강까지 진격할 때만 해도 승리는 눈앞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중공군(관례대로 표기함)의 등장과 함께 승리는 신기루처럼 스러졌고 전황은 불과 서너 달 전으로 돌아가 있었다. 1·4후퇴, 중공군의 참전으로 뒤집힌 전세 그것은 이 전쟁의 승패가 단순한 전력의 차이나 명분 따위에 .. 2024. 1. 3.
[오늘] 국군과 유엔군, 중공군에게 밀려 ‘흥남철수’ 시작 [역사 공부 ‘오늘’] 1950년 12월 15일, 흥남항을 통한 해상 철수 시작 장진호 전투, 그리고 흥남철수 1950년 12월 15일,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은 함경남도 흥남항을 통해 해상 철수를 시작하였다. 12월 23일까지 아흐레 동안 이루어진 흥남철수(興南撤收)로 장진호 전투에서 패배한 국군과 유엔군 등 10만 명이 넘는 병력과 17,500대의 각종 차량, 35만 톤의 물자를 완전하게 철수시켰다. 1950년 12월, 당시 서부전선으로 북진한 제8군은 육로로 후퇴할 수 있었지만, 동부전선 장진호(長津湖) 방면으로 북진한 미 제10군단의 병력은 원산지역이 중공군에게 넘어가자 퇴로가 막혔다. 활로는 해상 철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장진호 전투는 같은 해 11월 27일, 중국 제9병단이 장진호 지.. 2019. 12.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