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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권오설4

‘풍산 트로이카’ 세 명 중 그에게만 서훈이 비켜갔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④]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 이준태(李準泰, 1892~1950)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 세상에 나온 것은 1848년 2월이었고, 69년 뒤인 1917년 러시아에서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했다. 식민지 치하에 조선공산당이 창립된 것은 1925년 4월이었다. 조선공산당은 ‘조선혁명’의 과제를 민족해방혁명, 반제국주의 혁명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것이 자기 과업을 수행하면서 독립운동에도 헌신한 이유였다. 그러나 이들은 해방 후 38도선 이남에 친미 반공 국가가 세워지면서 잊히기 시작했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 아래서 이들이 벌인 계급투쟁도, 반제국주의 민족해방 투쟁도 이념 저편에 묻혀 버린 것이었다. 조선공산당 창당을 전후한, 이 잊힌 혁명가들의 삶과 투쟁을 돌아본다. 풍산 오미마을.. 2023. 7. 4.
[오늘] 6·10, 순종의 장례일에 터진 ‘조선독립 만세!’ [역사 공부 ‘오늘’] 1926년 6월 10일에 불타오른, 학생 중심의 민족 독립운동 순종 장례일(인산일)에 터진 ‘조선 독립만세!’ 1926년 6월 10일은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1874~1926)의 인산(因山, 임금의 장례)일이었다. 헤이그 밀사 사건(1907) 이래 일제와 친일파의 압력으로 퇴위하게 된 고종을 이어 대한제국 제2대 황제가 된 순종은 명목상 재위 18년 만인 1926년 4월 25일 심장마비로 승하했고, 이날 인산이 거행된 것이었다. 순종은 황위에 오른 지 불과 2년 뒤 통감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1910년 강제합병으로 대한제국의 멸망을 지켜보아야 했던 비운의 황제였다. 이후 그는 모든 권한을 잃고 이왕(李王)이라 불리며 창덕궁에서 허수아비 군주로 살아야 .. 2023. 6. 9.
안동독립운동기념관 둘러보기 ‘독립운동의 본향’, 안동에 ‘독립운동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안동시의 시정 구호가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인 것처럼 일제하 독립투쟁과 관련해 안동은 자신을 ‘독립운동의 성지’, ‘독립운동의 본향(本鄕)’이라고 매긴다. ‘성지’나 ‘본향’이란 표현은 그것을 떠받치는 만만찮은 역사와 인물을 갖지 않고는 쉽사리 하기 어려운 자부고 긍지다. 안동은 항일 의병의 효시랄 수 있는 갑오의병(1894)의 발상지요, 1905년 이후 일본 제국주의에 항거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 10명을 낳은 고장이다. (전국 66 명) 안동은 갑오 이후 1945년 안동농림학교 학생 항일운동에 이르기까지 51년 동안 쉼 없는 독립투쟁을 전개하여 단일 시군으로는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 유공 포상자(310여 명, 포상받지 못한 이를 포함.. 2021. 8. 11.
‘모스크바 동네’가 배출한 항일운동가 권오설 [항일의 땅과 사람, 안동 ④] 20년대 사회주의 운동, 잊힌 시대와 삶 여기 한 혁명가가 있다. 감옥에서 찍은 일그러지고 바랜 사진 속에서 그는 정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그는 일제의 감옥에 갇혀 있다가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향년 서른넷. 그의 시신은 일경의 삼엄한 경비로 봉분도 올리지 못한 평장(平葬)으로 고향 인근의 산기슭에 묻혔다. 그 무덤에 봉분이 올라간 건 수십 년이 흐르고 나서였다. 2차 조선공산당 산하 고려공산청년회 제2대 책임 비서였던 그는 민족해방을 위해 공산주의 노선을 택한 ‘실용주의’ 운동가로 평가되는 이다. 조선공산당의 ‘6·10 운동 투쟁지도 특별위원회’ 총책임자로 6·10 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조직했지만, 해방 후 극심한 좌우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전쟁을 거친 자본주의 조국.. 2019. 6.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