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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구미7

구미·선산의 3·1운동 - 네 곳에서 만세를 외쳤다 구미·선산의 3·1운동 - 선산과 해평, 임은동과 진평동 시위 사람들은 제 고장을 무척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필요한 이해는 ‘맹탕’일 때가 많다. 특히 역사 쪽으로 가면 총론은 그나마 주워섬기지만, 각론에 들어가면 입을 닫을 수밖에 없는 수준이다. 그것은 우리가 역사의 중요한 장면을 국가 단위로만 배울 뿐, 향토사는 거기 곁들여진 몇 줄의 사실로만 익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지방자치제 시행 이후, 지자체가 나름대로 지역사를 새로이 조명하기 시작했지만, 단시간의 노력으로 쉽사리 극복되는 문제가 아니다. 구미에서도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지난해, 만세 시위를 재현하는 등의 행사가 베풀어지긴 했어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3·1운동이 1919년 3월부터 약 3개월가량 끊이지 않고.. 2023. 3. 2.
구미사람들과 북봉산, 그리고 ‘새마을’ 대청소 북봉산과 새마을 대청소 프롤로그에서 밝힌 대로 자리 잡는 대로 뒷산도 다녀오고, 인근 재래시장 따위를 한 바퀴 돌아보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정작 움직일 만하면 한파가 찾아오곤 해서 나는 고작 인근 할인점 구경 정도만 했었다. 그래도 옮아온 지 한 달이 지나자, 조금씩 이 도시의 공기와 정서가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하는 듯하다. 이사 오고 사나흘쯤 후에 인근의 목욕탕에 들렀다. 규모가 꽤 큰 온천이었는데 설 대목이라서인지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목욕하는 내내 설명할 수 없는 이질감을 느꼈는데 목욕탕을 나서면서 그 정체를 깨달았다. 나는 저도 몰래 우리 식구들이 즐겨 찾았던 안동의 학가산 온천과 이 욕탕을 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균연령 34세, ‘젊은 도시’ 구미 규모는 안동 쪽의 것이 크다. 그런데 .. 2022. 3. 2.
선산(善山) 톺아보기 - 프롤로그 왜 ‘구미’ 대신 ‘선산’ 인가 ‘구미시민’이 된 지 한 주일이 지났다. 구미는 내 고향인 인근 칠곡군 석적읍 옆 동네니 내가 이 지역으로 돌아온 것도 두루뭉술하게 ‘귀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를 ‘고향’이라고 여기지 않는 마음의 자락은 한편으로 이 지역을 굳이 ‘객지’라고 여기지 않는 마음의 한끝과 만난다. 1970년대 초 구미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구미는 선산군 구미읍이었다. 구미가 시로 승격된 것은 1978년이었고 구미시와 선산군을 다시 합쳐 도농복합형 구미시가 된 것은 1995년이다. ‘선산군 구미읍’이었던 시절이 옛말이 되면서 ‘선산(善山)’은 ‘구미시’의 조그만 소읍으로 떨어졌다. 구미로의 ‘귀향’? 내 기억 속의 ‘구미’가 특별한 의미를 새.. 2022. 1. 26.
마지막 4개 섬, 경북에도 ‘무상급식’ 물결 미시행 4개 지역도 내년부터 초등학교 전면 무상급식 시행키로 초등학교 전면 무상급식이 전국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그간 ‘무상급식의 섬’으로 남아 있던 경상북도 시 지역에서도 내년부터 전면 무상급식이 시행되게 되었다. 군 지역에 이어 경북의 대다수 시 지역의 무상급식 계획에서 유독 4개 시 지역만이 빠진다는 게 알려진 것은 지난달 말께다. 마지막 섬 4개 시, 결국 여론에 굴복 전국에서 다 실시하고 있는 초등학교 전면 무상급식을 시행하지 않겠다는 간 큰 결정을 한 곳은 구미, 상주, 영주, 문경시였다. 이들은 대체로 저소득층 우선 지원(상주·문경), 일부 학년 지원(구미·영주) 등으로 무상급식 흉내만 내겠다는 계획을 제시했다. 이들 지역의 급식 지원 계획이 여론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지역 시민사회.. 2021. 12. 8.
대구·경북 촛불 - 꺼뜨릴까, 키울까 2016년 대구에서 밝힌 촛불집회 지난 25일엔 구미역 광장에서 금요일마다 밝히는 촛불집회에, 다음날인 26일에는 대구 중앙로에서 펼치는 촛불집회에 각각 나갔다. 서울의 백만 촛불에 한 번 더 동참하고 싶었지만 오가는 일을 비롯하여 상황이 녹록지 않아 대구로 발길을 돌린 것이었다. 구미엔 날씨가 꽤 추웠는데도 100명이 넘게 모였다. 수천, 수만 단위의 촛불이 일상적인 상황이니 100명이라면 시뻐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중 집회가 드문 이 도시에서 이 정도 숫자만으로도 모인 이들의 열기나 마음을 헤아리기는 충분했다. 자유발언에 나선 남자 고교생과 여자 초등학생의 이야기에 참가자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 주었다. 26일 오후에 기차를 타고 대구로 갔다. 역에서 후배 교사와 만나 집회 장소로 가는데, .. 2021. 11. 29.
‘판문점선언’과 구미의 이발소 풍경 ‘판문점선언’과 티케이 지역의 슬픈 ‘확증 편향’ 남북정상회담 뒤, 구미의 이발소 풍경 대체로 정치적 성향이 비슷한 사람이나 단체와 교유하다 보니 자신과 다른 정치적 견해를 날것 그대로 만나게 되는 경우가 드물 수밖에 없다. 주변에도 보수적인 사람들이야 적지 않지만, 이들은 굳이 견해가 다른 사람 앞에서 자기 의견을 드러내는 걸 꺼리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감 없이 지역 주민들의 정치적 견해를 들으려면 상대가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야 한다. 사람들이 여론을 듣기 위해 시장을 찾거나 택시를 타고 기사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는 까닭이 달리 있겠는가 말이다. 27일, 남북정상회담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판문점선언이 발표될 무렵에 나는 시내의 한 시민단체 사무실에 있었다. 버스를 타고 오느라 듣지 못했던 선언.. 2020. 4. 29.
허형식과 박정희, 극단으로 갈린 둘의 선택 [서평] 박도 실록 소설 ‘경상북도 구미’하면 ‘박정희(1917~1979)’를 떠올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긴 하다. 시내 상모동에서 태어나서 만주군 장교를 거쳐 해방 뒤 쿠데타로 집권한 그 덕분에 오늘의 구미가 만들어진 건 부정할 수 없으니 말이다. ‘선산군 구미면’은 그가 이 고을에 공업단지를 유치하면서 ‘선산읍’을 거느린 인구 40만이 넘는 ‘구미시’가 되었다. 그는 개발독재를 통하여 근대화를 추진했고, 유례없는 고도성장을 구가함으로써 구국의 지도자로 기려진다. 18년 독재 끝에 비명에 갔지만 그는 지역에서 가히 ‘반신반인’으로까지 숭앙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는 지금 경상북도 기념물 제86호로 지정되어 성역화된 상모동 생가 부근에 세운 5m 크기의 청동상으로 살아 있다. 박정희의 상모동, 혹은 왕산.. 2019. 5.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