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당 장흥효2 허물어진 절터에 마주 선 돌탑과 서당 ‘나머지 탑’을 찾아서 ① 봉림사지 삼층석탑 [관련 글] 탑의 마을, 안동 임하리(臨河里) 안동지역의 탑을 다룬 기사 ‘저 혼자 서 있는 탑들’을 쓴 건 지난 1월 초이다. 내친김에 주변의 예천, 영양, 의성 지역의 탑도 한 바퀴 돌았다. 그러나 안동에는 여전히 미처 얘기하지 못한 탑이 제법 많다. 사람들에게 잊히고 있는 탑을 찬찬히 다 돌아보자고 작정했지만, 지금껏 고작 몇 기의 탑을 더 찾아보는 데 그치고 있다. ‘나머지 탑’이라는, 좀 거시기한 이름을 붙인 까닭은 이 탑들이 그 중요도나 가치가 다른 탑들에 미치지 못해 시도 지정문화재거나 문화재 자료여서다. 문화재를 위계와 등급으로 매기는 것은 매정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 중요도에 따라 분류하지 않을 수는 없을 듯하다. 문화재 중 으뜸은 국가 지정문.. 2019. 10. 2. 바람 앞 농촌, ‘이 중에 즐거운 뜻’은 이미 거기 없다 [안동 시가 기행 ⑥]존재 이휘일의 일찍이, 한문으로도 완벽한 문자 생활을 누릴 수 있었던 조선조 사대부들은 한문뿐 아니라, ‘언문’이라 천대받던 한글로도 삶과 세상을 노래했다. 우리가 오늘날 국문 시가를 즐기며 당대 현실과 사회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그 덕분이다. 이들 사대부는 성리학을 공부한 선비였고, 시조는 그들의 ‘정신적 자세를 표현하는 그릇’이었다. 퇴계나 율곡 같은 이들이 과 를 통해서 노래한 것은 그들의 성리학적 세계관, ‘자연에 투영된 인생관의 한 극치’였다. 이들 사대부가 관념적인 유교 이념을 형상화하거나 안빈낙도에 침잠하고 있을 때, 피지배계층인 농민들의 삶은 고단하기만 했다. 이들은 여전히 문학의 향유층이 되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삶을 노래할 여유도 능력도 .. 2019. 6. 2.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