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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건국훈장 독립장9

[순국(殉國)] 스물일곱 윤동주, 후쿠오카 감옥에서 지다 [순국(殉國)]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지다 1945년 오늘(2월 16일) 오전 3시 36분,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간도 출신의 조선 청년 윤동주(尹東柱, 1917~1945)가 스물일곱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그는 1943년 7월, 귀향길에 오르려다 일경에 체포된 이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이듬해 3월,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다. 일제는 뇌일혈로 사망했다고 통보했지만, 윤동주는 학창시절에 축구선수로도 활약할 만큼 건강했다. 건장한 20대 청년이 수감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돌연한 죽음을 맞았다는 것은 쉬 믿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의문의 주사와 생체실험 40여 년 전, 그의 아우 윤일주와 후배 정병욱의 증언으로 그가 일제의 생체실험에 희생된 것이 아닌가 .. 2024. 2. 16.
[오늘] 우당 이회영,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다 [역사 공부 ‘오늘’] 1932년 11월 17일 – 이회영 뤼순 감옥에서 순국 1932년 11월 17일, 예순여섯의 독립운동가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 1867~1932) 선생이 중국 다롄(大連)의 뤼순(旅順) 감옥 36호 감방에서 눈을 감았다. 11월 5일, 상하이에서 영국 선적의 남창호(南昌號)로 다롄에 도착하자마자 체포된 지 12일 만이었다. 다롄경찰서에서 열흘 넘게 혹독한 심문을 받았지만, 그는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고 본적지 조회조차 거부했다. 그의 유해를 모시러 간 딸 규숙에 따르면 그의 안면을 확인하니 ‘선혈이 낭자하였고 타파오(大袍, 중국 의복)에도 선혈이 많이 묻어 있었다’. 우당이 상하이를 떠나 다롄으로 향한 것은 만주의 연락 근거지 확보와 지하공작 망 조직, 주만(駐滿) 일본군 .. 2023. 11. 17.
[순국] 산남의진의 손영각 의병장, 입암 전투에서 순국 1907년 9월 1일-산남의진의 의병장 손영각 입암 전투에서 순국 1907년 9월 1일(음력, 양력 10월 7일) 산남의진(山南義陣)이 일본군과 맞붙은 경북 포항시 죽장면 입암 전투에서 손영각(孫永珏, 1855~1907) 참모장이 전사, 순국하였다. 향년 52세. 이 전투에서 대장 정용기(1962 독립장), 중군장 이한구(1963 독립장), 좌영장 권규섭(1991 애국장) 등 산남의진의 주력이 모두 전사했다. 이 무렵 산남의진의 본진 지휘부[장영도소(將營都所)]는 포항시 죽장면 매현리에 정예 의병 1백여 명과 함께 포진하고 있었다. 이를 탐지한 일본군은 입암리(立巖里) 후원(後原)의 험준한 암석을 거점으로 야음을 틈타 침공해 들어왔다. 때마침 임무를 마치고 귀진한 이세기(1991 애국장)·우재룡(1963.. 2023. 8. 30.
[오늘] 독립군과 국민혁명군으로 일본과 싸웠던 김홍일 장군 떠나다 [역사 공부 ‘오늘’] 1980년 8월 8일, 한국과 중국을 넘나들며 싸운 김홍일 장군 서거 1980년 8월 8일, 중국군 제19사단장 대리와 광복군 참모장으로 한국과 중국을 넘나들며 일본과 싸웠던 일서(逸曙) 김홍일(金弘壹, 1898~1980) 장군이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일찍이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조선의용군 부사령관으로,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으로 일본과 싸웠고 뒷날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장을 역임했던 이였다. 향년 82세. 해방된 조국에 돌아온 그는 군 역사상 처음으로 장군(준장)으로 임관하여 육군사관학교장을 맡았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으로 한강 선에서 밀려오는 적을 1주일간 방어하고 육군 제1군단장으로 평택지구에서 포항 탈환 작전에 이르기까지 세운 전공으로 태극무공훈장을.. 2023. 8. 8.
[순국] 담살이 의병장 안규홍, 서른한 살에 지다 의병장 안규홍, 대구감옥에서 순국 1910년 6월 22일, ‘담살이(머슴, 머슴살이)’ 의병장으로 불리는 안규홍(安圭洪, 1879~1910) 선생이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그는 1907년 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머슴살이 동지들을 규합하여 창의(倡義)한 이래, 파청(巴靑)·진산(眞山)·원봉(圓峰) 대첩 등 의병 사상 기념비적 승리를 구가했던 보성 의진(義陣)을 이끈 의병장이었다. 향년 31세. 안규홍은 호좌(湖左) 의진의 선봉장 김백선(1849~1896), 영덕의 신돌석(1878~1908)과 함께 평민 의병장이었다. 너무 가난하여 머슴살이(담살이)로 홀어머니를 봉양하였던 그는 ‘안 담살이’, ‘안 진사’ 등의 별명으로 불리었다. 안규홍은 전남 보성 출신이다. 본관은 죽산, 자는 제원(濟元), .. 2023. 6. 22.
[순국] 하산 양기하, 만주 관전현에서 전사 1932년 2월 10일, 조선혁명당 정치 부위원장 하산 양기하 선생 순국 1932년 2월 10일, 랴오닝성 관전현(寬甸縣)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혁명당 소속 독립군은 일본 경찰대와 만주국 군대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이에 조선혁명당 정치 부위원장 하산(荷山) 양기하(梁基瑕, 1878~1932)는 격전 끝에 수십 명의 조선혁명군 병사들과 함께 전사 순국하였다. 그는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1896~1934), 중앙집행위원장 대리 고이허(1902~1937)와 함께 남만주에서의 마지막 무장 항일투쟁의 역사를 장식한 지도자였다. 그가 순국한 뒤 양세봉은 이태 후 밀정의 사주로 중국인 자객에게 살해되었고 일본군과 교전 끝에 포로가 된 고이허는 1937년 총살되었다. 양기하는 충남 논산 사람이다. 아호는 하산(荷.. 2023. 2. 10.
수훈(受勳)의 자격, 또는 훈장의 ‘품격’ 누가 훈장을 받는가, 그는 ‘받을 자격’이 있는가 ‘상(賞)’은 “뛰어난 업적이나 잘한 행위를 칭찬하기 위하여 주는 증서나 돈이나 값어치 있는 물건”(이하 같음.)을 뜻하는 일반 명사다. 비슷한 뜻이지만 ‘훈장(勳章)’은 “대한민국을 위하여 뚜렷한 공적을 세운 사람에게 그 공로를 기리고자 나라에서 주는 휘장”이라는 뜻의 법률용어로도 쓰이는 명사다. 상이 개인의 명예를 드높이는 것이라면 훈장이 가문의 명예로 이어지는 것은 그것이 ‘나라에서 주는 포상 가운데 으뜸가는 훈격(勳格)’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그것은 ‘아무에게나 주는 상’이 아니며, 서훈의 대상이 되는 ‘공적’이 자연인 사이의 행위가 아니라 ‘국가를 위한 이바지’라는 특수성을 갖는 것이다. 논란이 된 MB의 ‘임기 말 서훈’ 따라서 훈장이 ‘.. 2020. 3. 3.
[순국]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대구형무소에서 순국 1921년 8월 11일, 고헌 박상진, 대구형무소에서 처형되어 순국 1921년 8월 11일, 대구형무소에서는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朴尙鎭, 1884~1921)이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일찍이 경성감옥에서 순국한 왕산 허위(1855~1908, 1962 대한민국장)의 시신을 수습하여 금오산 아래에 모시고 1년의 시묘(侍墓)로 스승을 배웅한 제자, 반민족적 친일부호들을 처단하는 의열투쟁을 전개한 청년 독립운동가는 서른일곱에 뜨겁던 삶을 마감했다. 박상진은 울산 출신이다. 호는 고헌(固軒). 고향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열아홉 살(1902) 때 의병장 출신으로 서울 평리원 판사로 있던 왕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04년 양정의숙 전문부에서 법률과 경제학을 공부하고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하여 평양법원에 발.. 2019. 8. 10.
[오늘] 10년을 가지 못한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역사 공부 ‘오늘’] 1905년 11월 20일 장지연, 에 논설 ‘시일야방송대곡’ 게재 1905년 11월 20일, 사설란에 한 언론인이 쓴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실렸다. '이 날, 목 놓아 통곡하노라'라는 뜻의 이 논설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11월 17일 대신들을 압박해 강제로 체결한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알리고, 조약 체결에 찬성하거나 이를 적극적으로 막지 못한 대신들을 '개돼지'로 비유하며 격렬하게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지난번 이등(伊藤) 후작(이토 히로부미-인용자)이 내한했을 때에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 삼국의 정족(鼎足) 안녕을 주선하겠노라 자처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공.. 2018. 11.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