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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가난6

[오늘] 일생을 가난과 싸웠던 소설가 최서해, 서른둘에 스러지다 [역사 공부 ‘오늘’] 1932년 7월 9일, 소설가 최서해 떠나다 1932년 7월 9일, ‘탈출기’와 ‘홍염(紅焰)’의 작가 최서해(崔曙海, 1901~1932)가 위문 협착증 수술을 받다가 세상을 떠났다. 소작인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을 가난과 싸웠고, 그 빈궁(貧窮)을 문학으로 형상화해 왔던 서해는 끝내 그 가난을 벗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향년 32세. 최서해의 본명은 학송(鶴松), 서해(曙海)는 설봉(雪峰) 또는 풍년(豊年) 등과 같이 쓴 아호다. 그러나 그는 소월처럼 본명보다 이름으로 주로 불린다. 함경북도 성진에서 소작농의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1910년 아버지가 간도 지방으로 떠나자 어머니의 손에서 유년과 소년 시절을 보내었다. 서해는 유년 시절에 한문을 배우고 성진보통학교에 3년 정도 다닌 .. 2023. 7. 9.
[오늘] 일평생 가난과 싸워야 했던 ‘국민화가’ 박수근 떠나다 [역사 공부 ‘오늘’] 1965년 5월 6일, 국민화가 박수근 떠나다 1965년 5월 6일 새벽 1시, 국민화가 박수근(1914~1965)이 간 경화증으로 서울 동대문구 전농동 자택에서 평생을 가난과 싸워야 했던 고단한 삶을 거두었다. 향년 51세. 4월 초에 청량리 위생병원에 입원했다가 회복이 어렵게 되자 퇴원한 지 하루 만이었다. 그는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고단한 생애를 마감했다. 가난으로 중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던 화가는 독학으로 그림을 그려 일가를 이루었지만 살아생전에 끝내 그 가난을 벗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어릴 적부터 크리스천이었으나 그는 예술적 좌절을 이기고자 과음을 계속한 끝에 신장과 간이 나빠졌다. 그로 인해 왼쪽 눈에 백내장을 앓.. 2023. 5. 6.
가난도 가난 나름, ‘가난’을 다시 생각한다 ‘장식’, 혹은 ‘성공의 배경’으로의 ‘가난’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다만 불편할 뿐이다.” 60년대를 전후해서 ‘인구에 회자’한 얘기다. 다분히 비장한 기운마저 감도는 이 말이 마치 경구처럼 쓰일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6·70년대라는 시대의 미덕이었다. 그것이 미덕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극복될 수 있는 가난’, 곧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에 힘입은 것이다. 가난은 다만 ‘불편한 것’? 깡촌의 무지렁이 농민의 아들이 내로라하는 명문대를 나와 각종 ‘고시’에 ‘패스’하는 성공담은 그 시대의 꿈이고 전설이었다. 그 시대는 달리 말하자면 ‘입지전’ 주인공들의 전성시대였다. ‘검사와 여선생’ 따위의 신파가 연출될 수 있었던 것도 신분 상승의 신화가 가능했던 시대의 힘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업화.. 2020. 10. 31.
죽음……, 그 어머니와 남매의 선택 가난에 내몰린 세 가족, 극단적 선택 대구에서 가난에 내몰린 일가족 셋이 자살했다. 남편 부도로 이혼한 뒤 어렵게 두 자녀와 함께 살아온 어머니(41)가 가스가 끊기고 집세를 마련하지 못하자 딸(18), 아들(16)과 함께 방안에 번개탄을 피워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다. [관련 기사] 포털마다 양념인 듯 떠 있던 그 기사는 이내 사라졌다. 나는 제목만 읽었다가 뒤에 그 기사를 정독했다. 기사 앞에서 우리는 망연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게 다다.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가슴이 아려와 울컥했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들 일가의 죽음과 그것이 환기하는 이 비정한 사회의 야만성 앞에서. 이 나라는 가난에 지친 부모가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이른바 ‘동반 자살’을 감행하는 곳이다. 자녀는 부모의 소유물.. 2020. 3. 8.
한 외고 졸업생의 편지에 대한 답신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 가진 성숙한 시민으로 성장하길 내가 쓴 기사 “토플 만점 여중생 반대편엔 ‘루저’가 우글 - 특수 사례를 보편적 사례로 포장하는 언론 보도”가 나간 건 지난 11월 16, 17일 이틀에 걸쳐서다. 머리기사 바로 아래 자리를 잡은 데다가 예민한 영어 문제 탓이었는지 조회 수가 십만을 넘어버렸다. 댓글도 근 스무 개 달렸고 소액이나마 오랜만에 ‘좋은 기사 원고료’를 보내 준 독자도 있었다. 고마운 일이다. 나는 내 기사가 그렇게 예민하게 받아들여지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댓글도 그랬지만, 쪽지로 내게 자신의 의견을 전해오는 이는 두 갈래였다. 내 의견에 동의한다는 쪽이 하나요, 그런 부정적인 생각에 동의할 수 없다는 의견이 나머지였다. 몇 편의 시선을 끄는 의견 가운데서 유독 .. 2019. 7. 24.
‘등겨장’, 한 시절의 삶과 추억 경북 지방의 향토 음식 ‘등겨장(시금장)’ 이야기 ‘등겨장’이라고 있다. 고운 보리쌀 겨로 만드는 경상북도 지역의 별미다. 두산백과사전에는 ‘시금장’이라는 이름으로 올라 있다. 그러나 경상도에선 ‘딩기장’이라 하면 훨씬 쉽게 알아듣는다. ‘딩기’는 ‘등겨’의 고장 말이다.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만 해도 우리는 봄이나 가을에 등겨장의 그윽한 맛을 즐길 수 있었다. 등겨장, 경북 지역의 별미 등겨도 종류가 여럿이다. 일찍이 부모님의 방앗간에서 방아를 찧었던 전력이 있어 나는 등겨에 대해서 알 만큼 안다. 벼를 찧을 때 현미기를 거쳐 나온 등겨는 ‘왕겨’인데 이는 주로 땔감이나 거름으로 쓰인다. 껍질이 벗겨진 현미가 정미기를 여러 차례(이 횟수에 따라 ‘7분도, 8분도’라고 하는 ‘분도’가 정해진다) 돌아 나.. 2019. 3.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