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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3.1운동7

구미·선산의 3·1운동 - 네 곳에서 만세를 외쳤다 사람들은 제 고장을 무척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필요한 이해는 ‘맹탕’일 때가 많다. 특히 역사 쪽으로 가면 총론은 그나마 주워섬기지만, 각론에 들어가면 입을 닫을 수밖에 없는 수준이다. 그것은 우리가 역사의 중요한 장면을 국가 단위로만 배울 뿐, 향토사는 거기 곁들여진 몇 줄의 사실로만 익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지방자치제 시행 이후, 지자체가 나름대로 지역사를 새로이 조명하기 시작했지만, 단시간의 노력으로 쉽사리 극복되는 문제가 아니다. 구미에서도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지난해, 만세 시위를 재현하는 등의 행사가 베풀어지긴 했어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3·1운동이 1919년 3월부터 약 3개월가량 끊이지 않고 이어졌으며, 200만 이상이 참여한 비폭력운동인데도 일제의 폭.. 2020. 2. 29.
[순국] 의성단장 편강렬 의사, 만주에서 순국하다 1928년 1월 16일, 만주 안둥(安東 병원에서 편강렬(片康烈, 1892~1928) 의성단장이 순국하였다. 선생은 3년 전 하얼빈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7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혹독한 고문으로 발병, 보석으로 석방되어 치료 중이었다. 향년 36세. 그는 열여섯 살에 이강년 의병진의 선봉장이 되었던 사람이었다. 힘으로는 싸우는 두 마리 소 사이에 들어가 소를 떼어 말렸고, 민첩하고 가볍기로는 초가지붕을 뛰어넘었던 용맹한 전사였다. 법정 최후진술로 “목숨이 떨어질 때까지 일제와 싸워서 일본에 한국인 총독을 두겠다.”하고 말할 만큼 기개도 드높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열여섯에 의병 선봉장이었다 애사(愛史) 편강렬은 황해도 연백 사람이다. 한학을 공부하다가 을사늑약(1905) 이후 영남지방 의병장 이강년의 휘.. 2020. 1. 15.
[오늘] 6·10, 순종의 장례일에 터진 ‘조선독립 만세!’ [역사 공부 ‘오늘’] 1926년 6월 10일에 불타오른, 학생 중심의 민족 독립운동 순종 장례일(인산일)에 터진 ‘조선 독립만세!’ 1926년 6월 10일은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1874~1926)의 인산(因山, 임금의 장례)일이었다. 헤이그 밀사 사건(1907) 이래 일제와 친일파의 압력으로 퇴위하게 된 고종을 이어 대한제국 제2대 황제가 된 순종은 명목상 재위 18년 만인 1926년 4월 25일 심장마비로 승하했고, 이날 인산이 거행된 것이었다. 순종은 황위에 오른 지 불과 2년 뒤 통감 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1910년 강제합병으로 대한제국의 멸망을 지켜보아야 했던 비운의 황제였다. 이후 그는 모든 권한을 잃고 이왕(李王)이라 불리며 창덕궁에서 허수아비 군주로 살아야 .. 2019. 6. 9.
[오늘] 재독작가 이미륵, 뮌헨에서 타계하다 [역사 공부 '오늘'] 1950년 3월 20일, 재독작가 이미륵 타계 1950년 3월 20일, 독일 뮌헨 근교 그래펠핑(Gräfelfing)에서 망명 한국인 작가 이미륵(李彌勒, 1899~1950)이 위암으로 짧지만 강렬한 삶을 마감했다. 향년 51세. 그는 독일인 친구와 제자, 그리고 양어머니 자일러(Seyler) 부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통제를 맞고서 “애국가” 중에서 ‘우리나라 만세’를 낮은 목소리로 불러 좌중의 눈시울을 적시게 한 다음 임종의 순간을 맞았다. 그는 독일이, 독일인이 사랑한 한국인이었다. 그가 쓴 소설, 는 막스 뮐러의 만큼 독일인이 아끼는 책이 되었다. 떠난 지 70년이 가깝지만, 이미륵과 그의 문학은 여전히 독일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독일인이 사랑한 이미륵, 이미륵은 황해도.. 2019. 3. 16.
[순국(殉國)] 임정 주석 이동녕·민족해방운동가 김마리아 떠나다 [순국(殉國)] 1940년 3월 13일, 이동녕 치장에서 급성폐렴으로 스러지다 1940년 3월 13일, 임시정부 17대 주석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 1869~1940)이 쓰촨성(泗川城) 치장(綦江)에서 급성폐렴으로 순국했다. 1910년 서간도로 망명한 지 서른 해, 임시정부 수립 이후 풍찬노숙한 세월 스물한 해, 그는 생애 네 번째로 내각 수반을 맡아 분투 중이었다. 이동녕은 구한말 독립협회에 가담해 구국운동을 전개한 이래 임종의 순간까지 독립 전선에 있었다. 그는 독립군을 양성하는 서간도 신흥(무관)학교의 초대 교장이었고 이상설, 이동휘 등과 함께 대한광복군 정부(1914)의 주역이었다. ‘무오독립선언’(1918)에 참여했고, 1919년 상하이 임정 수립 때는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이었다. 11대(.. 2019. 3. 12.
기미년, 기생들도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3·1 만세운동은 특정 날짜로 이름이 붙긴 했지만 실제로 장장 두 달여에 걸쳐 전국 방방곡곡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독립 만세운동이었다. 국내는 물론 만주 지역에까지 번져나간 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의 총 시위 횟수는 2천 회 이상, 참여자는 연인원 2백만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모든 계층’이 참여한 민족운동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에도 집회에 참여한 인원은 106만여 명이고, 그중 사망자가 7509명, 구속자는 4만7천여 명이었다.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주도한 인물은 민족대표 33인이었지만 각 지역으로 확산한 만세 시위운동의 주력은 무명의 민중들이었다. 3월 1일부터 4월 11일까지는 매일 10회 이상 시위가 일어났으며, 시위운동의 정점을 이룬 4월 1일에는 모두 67회의 시위가 일어났다. 3월 27일과 4.. 2019. 2. 27.
[오늘] 화성 제암리, 1919년 4월 15일 화성의 3·1운동, 그리고 제암리교회 97년 전 오늘은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교회에서 주민들이 일제에 의해 집단학살 당한 날이다. 이른바 ‘제암리 학살 사건’이다. 일제는 제암리 주민들을 모아 예배당에 들어가게 한 뒤 불을 지르고 사격을 가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학살로 희생된 사람은 스물셋. 마을은 초토화되었고 이웃마을 주민 여섯도 목숨을 잃었다. 제암리(提巖里,속칭 ‘두렁바위’)는 당시 전체 33가구 가운데 2가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순흥 안(安)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으로 주민 대부분이 농사를 짓고 있었다. 제암교회는 이 마을의 안종후라는 청년이 한학을 배우려고 서울을 왕래하다가 아펜젤러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에 귀의하고 1905년 자기 집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시작되었다. 시대가 시대였.. 2019. 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