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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토 히로부미4

[순국]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뤼순서 순국 청년 안중근(1879~1910), 뤼순(旅順)에서 지다 1910년 오늘(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뤼순(旅順) 감옥에서 순국한 날이다.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1909년 10월 26일)한 지 꼭 다섯 달 만이요, 일제의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1910년 2월 14일)받은 지 한 달 열흘만이었다. 가톨릭교회, ‘살인자’의 종부성사 거부 이 자료에 따르면 2월 14일 오전 10시 30분, 안중근은 뤼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안중근은 당시 천주교 조선대목구(현재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뮈텔(Mutel, 1854~1933) 주교에게 전보를 보내 자신에게 사제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고 자신의 사형 집행일로 성(聖) 금요일을 희망한다는 뜻을 전했다. 2008년 3월, 국.. 2024. 3. 25.
‘한일신협약’, 입법·행정권에다 비밀 각서로 ‘군대 해산’ 등까지 담았다 [역사 공부 ‘오늘’] 1907년 7월 24일- 대한제국, ‘한일신협약’으로 입법·행정권 빼앗기다 1907년 7월 24일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1856~1926)과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는 통감 관저에서 ‘한일신협약’을 체결했다. 전체 7개 항목의 이 조약으로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의 시정을 개선한다는 명목하에 법령의 제정과 중요 행정상의 처분 등 모든 사무에 대해 승인권을 장악했다. 이로써 대한제국 정부는 입법·사법과 고등 관리의 임면 등 대한제국 주권인 입법·행정권을 고스란히 빼앗긴 것이었다. 입법 ·행정권을 고스란히 빼앗긴 한일신협약 ‘제3차 한일협약’, ‘정미 7조약’ 등으로도 부르는 한일신협약은 ‘시정개선’을 위해 통감이 지시하는 사항을 따르며, 관리의 임용.. 2023. 8. 30.
일본의 ‘과거’ ‘소환’-새 지폐 도안인물로 시부사와 에이이치 선정 일본, 새 1만 엔권의 도안 인물로 시부사와 에이이치 선정 일본이 새 1만 엔권의 새 도안 인물로 제일국립은행(국립의 의미는 국법에 따라 설립되었다는 것으로 실제 민간은행)과 도쿄증권거래소 등 500여 개 기업을 설립한,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부사와 에이이치(澁澤榮一, 1840~1931)를 선정했다고 한다. 현행 1만 엔권의 주인공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다. 후쿠자와도 갑신정변의 주역을 지원하는 등 한국과 만만찮은 인연이 있었지만, 시부사와는 그 정도를 훨씬 뛰어넘는다. 시부사와는 1878년에 부산에 제일국립은행(현 미즈호은행) 지점을 설립하고 이후 금융과 화폐 분야에서 일본 정부를 대리해 조선에서 여러 가지 특권을 확보했다. 1901년 대한제국은 금본위제도 채택.. 2019. 4. 11.
[오늘] 이토 히로부미에게 끌려간 ‘마지막 황태자’의 삶 [역사 공부 ‘오늘’] 1963년 11월 22일, 영친왕 이은의 56년 만의 환국 망국의 황태자에겐 자기 삶에 대한 선택권이 없었다. 고종의 일곱째 아들로 1907년 형인 순종이 즉위한 뒤에 황태자가 되었고, 1926년 순종이 죽은 뒤에는 이왕의 지위를 계승했던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 1897~1970) 이야기다. 1907년, 통감(統監)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후견인으로 삼아 일본으로 건너갔던 이은은 일본인으로 살았다. 일본의 육군유년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육군 장교로 임관한 그는 1940년 육군 중장이 되었다. 그는 1943년 일본의 제1항공군(第1航空軍) 사령관으로 복무하다가 일본 패전 뒤에 예편되었다. 1947년 일본의 헌법이 시행되면서 이은은 일본 왕족의 지위와 국적.. 2018. 11.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