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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의열단6

[오늘] 의열단원 김지섭, 일본 궁성에 폭탄을 던지다 [역사 공부 ‘오늘’] 의열단원 김지섭 니주바시(二重橋) 의거 1924년 1월 5일 오후 7시, 김지섭(金祉燮, 1884~1928)은 일본 궁성(宮城)의 다리인 니주바시(二重橋) 부근에서 궁성의 문인 사쿠라다몬(櫻田門)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가슴에 품고 있는 폭탄의 무게를 가늠해 보면서 자신의 동선을 계산해 보았다. 김원봉의 의열단이 1924년 초 도쿄에서 제국의회가 열려 일본 수상을 비롯한 고위 관료와 조선 총독이 참가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것은 1923년 12월이었다. 의열단은 제국의회에 폭탄을 던져 일제의 주구들을 처단하고 일제의 만행을 온 천하에 알리고자 했다. 김지섭, 폭탄을 품고 석탄선을 타다 결사 대원으로 선발된 김지섭은 12월 20일, 상하이 푸둥에 정박 중인 미쓰이(三井) 화물 소속의 .. 2020. 1. 4.
[순국] 의열단원 나석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자결하다 1926년 오늘, 이틀 전 중국에서 인천항으로 귀국한 의열단원 나석주(羅錫疇, 1892~1926)는 찬바람이부는 경성 거리, 조선식산은행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신문지를 싼 폭탄을 옆구리에 끼고 있었고 주머니 속에 권총을 숨기고 있었다. 조선식산은행은 조선총독부의 산업 정책을 금융 측면에서 뒷받침했던 핵심 기관으로 일본제국의 식민지 경제 지배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와 함께 중요한 축이었다. 식산은행은 채권으로 확보한 일본 측 자본을 조선의 산업 기관과 개인에게 빌려주고, 그로부터 회수한 원금과 이자를 투자자에게 돌려주는 금융기관이었다. 수탈기관 동척에 폭탄을 던지다 식산은행의 창구는 연말이라 일본인 고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는 신문지를 벗기고 안전장치를 뽑은 폭탄을 창구 앞으로 던진 후, 서둘러 은행을 빠.. 2019. 12. 27.
[오늘] 약산 김원봉의 ‘의열단(義烈團)’ 출범 [역사 공부 ‘오늘’] 1919년 11월 9일-김원봉. 항일비밀결사 ‘의열단’ 조직 1919년 11월 9일 밤, 만주 길림성 파호문 밖 한 중국인의 집에 모인 독립지사들은 밤새워 논의한 끝에 이튿날인 급진적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항일비밀결사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했다. 결사의 성격은 조직 후 만든 공약 10조의 첫 조항인 ‘정의(正義)의 사(事)를 맹렬(猛烈)히 실행한다.’에서 유래한 단체명[의열(義烈)]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의열단의 단원은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중심으로 고문에 김대지와 황상규, 단원은 김원봉·윤세주(1900~1942)·이성우·곽경·강세우·이종암·한봉근·한봉인·김상윤·신철휴·배동선·서상락·권준 등 13명이었다. 단장에는 약산(若山) 김원봉(1898~1958)이 선출되었다. 의열.. 2019. 11. 8.
[오늘] 의열단원 최수봉,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다 [역사 공부 ‘오늘’] 1920년 12월 27일, 최수봉 의사, 밀양경찰서 폭탄투척 의거 1920년 12월 27일 오전 9시 30분께 밀양경찰서장 와타나베 스에지로(渡邊末次郞)는 직원 19명을 서내 사무실에 모아놓고 훈시를 하고 있었다. 사무실 남쪽 유리창이 깨어지면서 폭탄 하나가 날아와 조선인 순사부장 쿠스노키 게이고(楠慶吾)의 오른쪽 팔에 맞아 굴러떨어졌다. 폭탄은 터지지 않았지만, 장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또 한 발의 폭탄이 경찰서 현관에서 터지면서 현관문과 마루, 벽 일부와 서류함이 파손되었다. 일경들은 폭탄을 던지고 달아나는 청년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밀양경찰서를 폭탄 공격한 청년 최수봉 청년은 추격하는 일경과의 거리가 좁혀지자 인근의 민가로 들어가 품속의 단도로 복부를 그었다. 칼은.. 2019. 11. 8.
밀양, 2017년 11월 밀양의 항일투쟁 기행 입대를 앞둔 청춘의 어느 날, 아내와 함께한 짧은 여행을 하기 전까지 밀양(密陽)은 이 나라의 나머지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나와 무관한 도시였다. 그 짧은 여행의 기억으로 밀양은 내 기억의 사진첩으로 슬그머니 들어왔다. 밀양, 그 도시와의 인연과 기억 그리고 한때 젊음의 열망을 함께 지폈던 벗 하나가 거기 정착하게 되고 30년 전에 내 앞에서 국어 교과서를 펴고 있었던 여제자 하나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면서 밀양은 내 삶의 어떤 부분으로 성큼 들어왔다. 벗 덕분에 우리는 매년 한 차례씩 그 도시에 들러 명승을 찾고 함께 술을 마시고 모텔이나 친구의 시골집에서 자곤 했다. 거기 살고 있던 여제자와 연락이 닿으면서 부산에 살고 있던 그 동기들이 대거 몰려와 단란한 시간을 보내기.. 2019. 11. 2.
[순국] ‘경술국적 이완용 처단 미수’ 이재명 의사 순국하다 1910년 9월 13일, 이완용을 처단하려다가 실패한 이재명(李在明, 1887~1910) 의사가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 형장에서 순국했다. 1년 전(1909) 12월, 그는 이완용을 찔렀지만 실패해 체포되었고 2010년 5월 일제의 법정으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칼끝에서 살아남은 이완용은 8월 22일 데라우치 통감 관저에서 매국 문서(한일합병조약안)에 서명했고 합병은 일주일 후 발효되었다. 이재명은 평안북도 선천 사람이다. 어릴 때 평양으로 이주하여 개신교계 사립학교인 일신학교를 졸업했다. 1904년 미국노동이민회사의 이민 모집에 응하여 하와이로 가 농부로 일하다가 1906년 3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서 한인의 독립운동단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재명, ‘국적 이완용’을 찌.. 2019. 9.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