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밀양9

친구, 자네 늦둥이가 곧 대학을 간다네… 벗이 50대 초반에 돌연히 세상을 버리면, 늦둥이 초등학생을 두고 세상을 떠나면 무릇 벗된 이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벗이 교육적 신념을 같이하고 어려운 시절을 함께 한 동지일 때 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장생모’ 여섯 해를 정리하다 2008년 2월에 장성녕 선생이 졸지에 세상을 떠났을 때 우리는 무엇에 홀린 듯한 느낌이었다. 그의 죽음이 오래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매우 건강한 친구였으나 어느 날 ‘풍’이 와 입원 치료를 해야 했다. 반년 휴직 후에 회복한 상태로 복직했는데 갑작스럽게 뇌내출혈로 쓰러졌다. 두 차례에 걸친 수술…, 그러나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관련 글 : 잘 가게, 친구] 황망한 가운데 장례를 치르고 돌아섰을 때도 우리는 여전히 혼란스럽기만 했다. 거창.. 2020. 8. 20.
콩국수의 추억과 미각 콩국수의 계절이다. 콩국수를 한번 해 먹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어제 저녁 식탁에 아내는 콩국수를 내놨다. 하얀 냉면 그릇에 담긴 콩국수의 면은 지금껏 우리 집에서 써 왔던 소면(小麵)이 아니라 적당한 굵기의 중면(中麵)이다.(여기서 쓰는 소면, 중면은 에 나오지 않는다. 사전에 실려 있는 ‘소면’은 고기붙이를 넣지 않았다는 뜻의 素麪뿐이다.) 콩국수의 계절 콩국수의 면이 무엇을 쓰느냐에 따라 맛이 바뀌는 것은 아닐 터이지만, 역시 콩국수에는 굵은 면이 어울린다. 노란빛이 맛깔스레 뵈는 국수가 콩 국물 속에 잠겨 있는 것은 보기에도 역시 좋다. 아내는 왜 진작 이놈을 쓰지 않았을까. 아내는 삶은 콩과 함께 참깨와 땅콩을 갈아 넣었다. 음식점 콩국수에 비기면 훨씬 담백한 맛이다. 콩국수 전문점에서는 우유를 넣.. 2020. 6. 24.
‘조선의용대의 영혼’ 윤세주 열사, 타이항산에서 지다 [역사 공부 ‘오늘’] 1942년 6월 3일-윤세주, 타이항산 폔청 전투에서 전사 1942년 6월 3일, 조선의용대 화북(華北)지대 정치위원 석정(石正) 윤세주(尹世胄, 1901~1942)가 타이항산(太行山) 석굴에서 순국했다. 허베이(湖北)성 폔청(偏城)에서 일본군의 제팔로군 소탕 작전에 맞서 싸우다 총상을 입은 지 닷새 만이었다. 폔청 전투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중국 타이항산맥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운 타이항산 전투 가운데 후자좡(胡家庄) 전투·싱타이(邢台) 전투(1941)와 함께 가장 치열한 전투였다. 1942년 5월 28일, 허베이성 셰현(涉縣)의 북쪽 가장자리 산시성 경계에 있는 폔청에서 시작된 이 전투는 일본군의 소탕 작전에 대항한 팔로군의 반 소탕전으로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5월 29일 항일.. 2020. 6. 3.
시나브로 ‘아비의 시대’는 가고 장성녕의 맏이, 결혼식에 다녀와서 미라가 시집을 갔다. 2008년 아버지를 잃고 올 4월에는 어머니까지 잃고 두 동생을 거두어야 했던 고 장성녕 선생의 맏이 미라가 결혼했다. 아랫도리를 벗고 지내던 시절부터 보아온 아이고 자라는 과정에서 아이의 심덕을 잘 알고 있는 터여서 혼인 소식에 반색을 아니 할 수 없었다. [관련 글 : 잘 가게, 친구(2008. 2. 14.) 지아비와 함께 편히 쉬시라(2012. 5. 1.)] 지난 4월, 제 어머니 장례를 치를 때 아이의 곁을 지켰던 건실한 청년이 있었다. 그냥 마지못해서 하는 게 아니라 아예 제 일처럼 발 벗고 나서 여러 가지 궂은일 마다치 않던 친구였다. 장례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우리는 그 친구에게 덕담을 건넸었다. 어쨌든 이른 시일 안에 국수를 먹게 해 주.. 2019. 11. 14.
밀양, 2017년 11월 밀양의 항일투쟁 기행 입대를 앞둔 청춘의 어느 날, 아내와 함께한 짧은 여행을 하기 전까지 밀양(密陽)은 이 나라의 나머지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나와 무관한 도시였다. 그 짧은 여행의 기억으로 밀양은 내 기억의 사진첩으로 슬그머니 들어왔다. 밀양, 그 도시와의 인연과 기억 그리고 한때 젊음의 열망을 함께 지폈던 벗 하나가 거기 정착하게 되고 30년 전에 내 앞에서 국어 교과서를 펴고 있었던 여제자 하나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면서 밀양은 내 삶의 어떤 부분으로 성큼 들어왔다. 벗 덕분에 우리는 매년 한 차례씩 그 도시에 들러 명승을 찾고 함께 술을 마시고 모텔이나 친구의 시골집에서 자곤 했다. 거기 살고 있던 여제자와 연락이 닿으면서 부산에 살고 있던 그 동기들이 대거 몰려와 단란한 시간을 보내기.. 2019. 11. 2.
우정과 연대 - 변산, 2010년 겨울 겨울의 막바지, 벗들과 함께 ‘변산(邊山)’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1989년 전교조 사태 때, 경북 성주와 칠곡 지역에서 같이 해직되어 도내의 해직 동지들로부터 ‘3장(張) 1박(朴)’으로 불린 벗들이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는 ‘2장 1박’만이 함께했다. 3장 가운데 하나, 장성녕은 함께하지 못했다. 명도 짧았던 친구, 그는 2008년 2월 10일, 서둘러 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관련 글 : 잘 가게, 친구] 1988년에 만났으니 해직 4년 반을 포함, 우리가 함께한 세월이 어느덧 22년이다. 강산이 두 번 변한다는 그 세월은 초등학교 6학년짜리 늦둥이를 남겨두고 쉰넷의 가장을 데려간 것만으로도 모질고 모질었다. 고향 거창에다 그의 유골을 뿌리고 돌아오던 날, 소주를 마시며 부렸던 건주정이 어제처.. 2019. 3. 13.
밀양, 2006년 8월(2) 친구들과 작별하고 교동 사무소 앞 쉼터에서 만난 다섯 아이(부인이라고 말하는 게 더 합당하겠지만, 여전히 그녀들을 바라보는 내 시선은 ‘사제’라는 관계망을 벗어나지 못한다)와 나는 성급한 안부를 나누는 거로 말문을 텄다. 영주에 살다가 부산으로 이사한 아이와 밀양에 살고 있는 친구를 빼면 나머지 셋은 꼭 1년이 모자라는 20년 만에 만나는 셈이었다. 이들이 졸업의 노래를 합창하고 여학교를 떠난 게 1987년 2월이고, 지금은 2006년인 것이다. 그리고 그때, 그녀들에게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던, 넘치는 열정 때문에 좌충우돌하던 청년 교사는 ‘쉰 세대’가 되어, 이제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불혹을 바라보는 성숙한 부인이 된 옛 여고생들과 다시 만난 것이다. 고삐 없는 세월은 살같이 흘렀던가. 두 사.. 2019. 3. 11.
밀양, 2006년 8월(1) 밀양을 다녀왔다. 내게 밀양은 몇 해 전만 해도 ‘표충사’와 ‘영남루’ 따위의 관광지와 함께 기억되는 남녘의 소도시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다. 그곳은 입대를 앞둔 청춘의 어느 날, 아내와 함께한 짧은 여행지였다. 밀양역 앞에서 만난 단발머리 여고생은 둘째 음절을 유달리 강조하는 억센 경남 사투리로 시내버스 격인 마이크로버스의 운임을 알려 주었었다. 낯선 도시를 방문한 젊은 연인들은 상대가 민망해하지 않을 만큼의 크기로 유쾌하게 웃었고, 두고두고 그 인상적인 억양을 입에 올리며 추억을 곰씹곤 했다. 그러나 어느 해부터 밀양은 내게, 하고 많은 숱한 도시가 아니라, 각별한 고장으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햇수로 치면 18년, 내 젊음의 한때, 서툰 욕망과 열정으로 좌충우돌하던 시절, 그 시절의 꿈과 사랑을 함.. 2019. 3. 11.
잘 가게, 친구 장성녕이 죽었다. 지난 10일 아침에 나는 그의 부인으로부터 그 비보를 전해 들었다. 재수술했는데…, 결국 하늘나라로 갔다는 그녀의 목소리는 뜻밖에 담담했다. 느닷없는 소식에 나는 반쯤 얼이 빠졌고 전화기를 놓고서 잠깐 허둥댔다. 죽음에 대한 전언이란 원래 그런 것일까. 그것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으로 들리지만, 그만큼의 사실적 무게로 사람들의 일상을 헝클어놓는다. 나는 그의 부음을 알리기 위해 몇 군데 전화를 건 다음, 이 죽음의 ‘비현실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가 숨진 병원 장례식장에 전화를 걸었다. 아, 그분요, 12일 출상입니다. 직원의 대답은 건조하고 ‘현실적’이었다. 그에게 이른바 ‘풍’이 온 건 몇 해 전이다. 입원 치료 후에 그는 반년간 휴직을 했고, 완전하지는 않지만 회복한 상태로 복직했다... 2019. 3.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