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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경학사3

[순국(殉國)] 임정 주석 이동녕·민족해방운동가 김마리아 떠나다 [순국(殉國)] 1940년 3월 13일, 이동녕 치장에서 급성폐렴으로 스러지다 1940년 3월 13일, 임시정부 17대 주석 석오(石吾) 이동녕(李東寧, 1869~1940)이 쓰촨성(泗川城) 치장(綦江)에서 급성폐렴으로 순국했다. 1910년 서간도로 망명한 지 서른 해, 임시정부 수립 이후 풍찬노숙한 세월 스물한 해, 그는 생애 네 번째로 내각 수반을 맡아 분투 중이었다. 이동녕은 구한말 독립협회에 가담해 구국운동을 전개한 이래 임종의 순간까지 독립 전선에 있었다. 그는 독립군을 양성하는 서간도 신흥(무관)학교의 초대 교장이었고 이상설, 이동휘 등과 함께 대한광복군 정부(1914)의 주역이었다. ‘무오독립선언’(1918)에 참여했고, 1919년 상하이 임정 수립 때는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이었다. 11대(.. 2024. 3. 13.
[순국] ‘남만의 맹호’ 김동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다 1937년 4월 13일-일송 김동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 ‘만주벌 호랑이’ 김동삼,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다 1937년 4월 1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만주벌 호랑이’, ‘남만(南滿)의 맹호’ 일송(一松) 김동삼(1878~1937) 선생이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순국했다. 향년 59세. 일본의 만주침공(1931) 직후, 경북 영양 출신의 남자현과 항일 공작을 추진하기 위해 하얼빈에 잠입했다가 일제에 체포된 일송은 평양지방법원에서 10년의 중형을 선고받고 평양감옥을 거쳐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 중이었다. 그는 비타협적으로 일제에 저항했던 진보적 중도 민족주.. 2023. 4. 13.
77년 만의 귀환 - 석주(石洲) 이상룡의 국적 회복 무국적 독립운동가들의 국적 회복 무국적 독립운동가들이 국적을 찾게 되었다고 한다.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인 분들이니 이들의 국적 회복은 가족관계등록부를 창설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대상은 단재 신채호(1880~1936), 석주(石洲) 이상룡(1858~1932) 선생 등 독립운동가 예순두 분. 임시정부 수립(1919) 90년 만이다. 이번에 가족관계등록부가 창설되는 독립지사는 이상룡, 이봉희, 김대락 선생 등이다. 석주 이상룡 선생은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냈는데, 이봉희1868~1937)는 선생의 아우이고, 백하(白下) 김대락(1845∼1915)은 선생의 처남이다. 석주가 류인식·김동삼 등과 함께 안동에 협동학교(1907)를 세웠을 때, 백하는 문중 원로들과는 달리 이를 적극 후원하였다. 경.. 2019. 2.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