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조명하 의사, 타이페이 형무소에서 순국하다

낮달2018 2020. 5. 2. 05:34

일본 육군 대장을 독검으로 찌른 조명하 의사,  처형으로 순국하다

▲조명하 의사의 동상. 서울대공원에 세워져 있다.

1928년 오늘,  타이베이 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어 조명하(趙明河) 의사가 순국하였다. 향년 스물넷. 식민지 청년이 선택할 수 있는 극한의 길을 담대하게 간 청년은 이국의 형무소에서 자신의 짧고 굵은 생애를 마감했다.

 

조명하는 히로히토의 장인인 일본제국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彦王)를 독검으로 찔렀고, 

구니노미야 구니요시는 상처에서 패혈증이 생겨 이듬해 1월 죽었다.

 

조명하(1905~1928)는 황해도 송화 출생이다. 풍천마을에서 공부하기 시작하였지만 가난하여 보통학교를 중퇴하고 군청의 고용원으로 일하며 강의록으로 독학하였다. 황해도 출신인 김구, 노백린(1874~1925) 선생 같은 독립운동가의 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한 그는 1926년의 6·10 만세운동을 계기로 독립운동 투신을 결심한다.

 

조명하가 “항일을 위해서는 일본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하며 처자식을 두고 일본으로 떠난 것은 스물두 살 때였다. 1926년 9월 일본의 오사카로 건너간 조명하는 오사카전기회사, 아다치(安達) 메리야스 상점 등에서 고용원으로 일하면서 야간학교에 다녔다. 그해 말 나석주(1892~1926)의 동양척식회사 폭탄 투척 의거가 일어나자 이듬해(1927) 그는 대만을 거쳐 상하이의 임시정부로 향했다.

 

그는 중간 기착지 타이완 타이중(臺中)의 부국원(富國園) 상점에서 일했다. 어느 날, 히로히토 일왕의 장인이자 황족인 일본제국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彦王)가 검열사로 타이완에 온다는 것을 알게 된 조명하는 그를 척살하기로 결심했다.

 

일본군 대장을 쓰러뜨린 스물넷 청년의 단독 거사

 

칼 쓰는 법 등을 익히면서 구니노미야를 기다리던 조명하는 1928년 5월 14일, 무개차를 탄 지나가던 구니노미야를 향해 독을 바른 칼을 던졌다. 조명하의 칼은 구니노미야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 운전사의 어깨에 꽂혔다.

 

조명하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조명하의 거사는 실패인 듯했지만, 구니노미야는 결국 목덜미 상처 때문에 이듬해 패혈증으로 죽었다. 의열단도 한인애국단도 아닌, 오직 혼자서 결단하고 실행한 거사는 마침내 일제의 육군 대장을 쓰러뜨린 것이었다.

 

같은 해 7월 18일, 조명하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석 달이 지난 10월 10일, 타이베이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단신 일본 제국주의 응징에 나섰던 이 혈기왕성한 청년의 나이는 스물네 살이었다. 그가 처형 직전에 남긴 유언은 뒷사람의 심금을 울린다.

 

“나는 삼한(三韓)의 원수를 갚았노라. 아무 할 말은 없다.
죽음의 이 순간을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다만 조국 광복을 못 본채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저세상에 가서도 독립운동은 계속하리라.”

▲ 서울시에서 서울대공원에 세운 조명하 의사의 동상.

해방 조국은 1963년 3월 1일 조명하 의사에게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1978년에는 타이완 타이베이시 한인 학교에, 1988년 5월 14일에는 의거 6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대공원에 조명하 의사의 동상을 세워 그의 희생과 투쟁을 기리고 있다.

 

2016. 10. 9. 낮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