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산산성, 임병 양란 뒤 장정 10만여 명으로 쌓은 요새
(1) 외적 대신 6·25전쟁 때 격전지가 된 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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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城)이나 산성(山城)에 관해서 우리의 상상력은 좀 빈약하다. 실제로 조선시대의 도성만 해도 온전히 남은 게 손에 꼽을 정도여서 산성이나 그 이전에 쌓은 성은 온전히 남아 있지 않아서다. 그래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은 성이란 교과서에서 잠깐 만난 이미지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산성은 대체로, “거기 산성이 있었더란다” 수준으로 전해질 뿐이다.
사적으로 지정된 조선후기의 석축 산성인 ‘가산산성’
사적 제216호 가산산성은 칠곡군 가산면과 동명면에 걸친 가산(架山, 902m)의 해발 901m에서 600m에 이르는 계곡을 이용해 쌓은 방어형 석축 산성이다. 17세기 조선을 강타한 숱한 기근 속에서도 전국 각지에서 쌓았던 산성들과 마찬가지로 가산산성은 엄청난 인원을 동원하여 축성을 이어가면서 백성의 원성을 들었고, 한때 공사가 중지되기도 했다. 그러나 임란 때 왜적을 막았던 인근 금오산성과 천생산성을 보완코자 했던 가산산성은 정작 외적의 침입을 막을 기회가 없었다.
내성 안에 마을과 칠곡도호부를 둔 가산산성
가산산성은 임진년과 병자년의 양란 뒤 외침에 대비하고자 1639년(인조 17) 9월에 경상도 관찰사 이명웅이 장정 10만여 명을 동원해 내성(內城)을 쌓기 시작하여 1640년(인조 18) 4월에 완공하였다. 그 뒤, 1649년(인조 27)에 내성을 보수 정비하였으며, 1701년(숙종 27)에 외성을 완공하였고, 1741년(영조 17)에 내성 가운데 중성 벽을 쌓으면서 전체적으로 삼중(외성-중성-내성)의 산성이 완성되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형태이다. 성은 외성 남문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고, 중성에는 4개 고을의 창고가 있어 비축미를 보관해서 유사시에 사용하게 하였다.
내성 안에 읍치(邑治 : 관청이 있는 곳)를 설치하여 원래 성주목의 속현이었던 팔거현(八筥縣 : 대구시 칠곡)이 칠곡도호부가 되었다. 산성 내에 읍치를 둔 것과 가장 높은 지대에 형성된 지방 읍치라는 점이 특징이다. 가산산성은 경상 감영의 별진(別陣)으로 칠곡도호부 외에 의성, 군위, 의흥, 신녕, 하양, 경산 등 인근 여섯 지역의 군사적 통치권을 가지면서 군영의 중심이 되었다.
성 안팎에는 칠곡도호부 지방 관아 시설을 비롯해 경상 감영과 칠곡도호부와 각 진관(鎭管 : 지방 방위 조직)의 군량 보관 창고, 산성 방비를 위한 군기고와 화약고, 경상도 지방의 모든 문서를 보관했던 장적고(帳籍庫), 산성 보수와 방어를 위한 수호 사찰, 성내 생활에 필수 시설인 못과 우물, 백성들이 거주할 수 있는 마을을 조성하였다.
180년 만에 도호부는 평지인 팔거현으로
그러나 읍치가 높은 산성 안에 있어 백성의 불편을 호소하는 장계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 결국 1819년(순조 19) 구 팔거현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로써 축성 후 180년간 이어온 칠곡도호부 읍치는 가산산성에서 평지로 이전했다.
대구대학교 중앙박물관에서 1999년에 조사한 『칠곡 가산산성 지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내성의 총 길이는 5.071㎞, 면적은 587,433㎡이다. 외성의 총 길이는 내성 축조 때 이미 만들어진 동문 좌우 성벽 454m를 제외하고 4.669㎞이며, 면적은 1,509,289㎡이다. 동문과 중문의 좌우 연결 성벽을 포함한 칠곡 가산산성 축성 총길이는 11.041㎞이다.
손꼽히는 큰 성 가산산성은 1885년에 폐성
전체 둘레가 11.1km에 이르는 가산산성은 한양도성, 부산 금정산성, 북한산성, 남한산성 다음인 다섯 번째로 길며, 면적은 2.2㎢으로 면적만으로는 4번째로 큰 성에 손꼽히는데, 1885년(고종 32) 이후 폐지됐다. 더는 국토 방어에 소용됨이 없어져서다.
가산산성은 1950년 한국전쟁 때에는 치열한 격전지가 되면서 남아 있던 성내 많은 건물이 소실되고, 폭격으로 성벽도 무너졌다. 1954년 7월엔 폭우로 남문의 홍예(아치)가 반파되고 수구문(水口門)과 성벽 일부가 유실되었다.
1971년에 사적 제216호로 지정되었으나 외성이 제외된 채 내성만 지정되어 반쪽짜리 문화유산이란 오명으로 얻었다. 사적으로 지정된 이후 1977년부터 2018년까지 성벽 몸체, 남문, 동문, 중성문, 수문 등의 보수 및 복원이 이루어졌다. 오늘날 산성의 모습은 보수와 복원으로 뒷사람과 만나는 셈이다.
산성 아니라도 나무와 숲으로도 훌륭한 가산
가산산성은 이제 성의 구실을 잃었으나 역사 유적으로 국립공원 팔공산의 일원이 되어 짙푸른 신록과 녹음으로 싸인 가산과 어우러져 그 고단했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어귀에서 임도를 따라 조성된 탐방로는 선택에 따라 동문, 중성문, 북문, 서문 등으로 이어진다. 주말의 가산산성이 코스에 따라 2~3시간씩 걸리는 산행을 즐기는 시민들로 붐비곤 한다.
가산산성은 ‘봄의 전령’이라 불리는 복수초 자생지가 곳곳에 펼쳐져 있어, ‘세계 최대의 복수초 군락’으로 유명하다. 중성문 아래 영창은 영창골의 물길이 고여 생성된 신비로운 풍경을 간직하고 있고, 서어나무와 소나무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살아가는 ‘혼인목’도 유명하다. 그러나 굳이 그런 작은 풍경 말고도 산성을 지닌 넉넉한 품만으로도 가산과 가산산성은 훌륭하고도 남음이 있다.
2025. 6. 8. 낮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