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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행복한 책 읽기 125

옛 스승 도광의 시인과 제자들 고교 시절의 은사 도광의 시인에게서 배우며 성장한 문인들 시인 도광의(1941~ ) 선생님을 만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다. 그는 우리들 신입생에게 국어를 가르친, 학교 문예 동아리 ‘태동기(胎動期)’의 지도교사였다. 무엇보다 당시 내가 가지고 있었던 병아리 눈물만 한 문재(文才)를 확인해 준 분으로 그를 기억한다. 그해 가을, 선생께서 야심 차게 추진한 교내 현상문예 공모에서 별 기대 없이 내가 써낸 소설이 당선작이 되었다. 나는 포마이카 처리가 된 세련된 상패에다 고급 손목시계까지 부상으로 탔는데, 선생님께선 내 작품에 대해 은근히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던 듯하다. 성년으로 가는 어느 시기를 문학 소년으로 보낸 이들은 적지 않다. 사춘기의 문학에 대한 열망은 마치 운명처럼 다가와 열몇 살의 영혼을 뒤.. 2019. 10. 16.
죄책감과 공포를 넘어서 [서평] 프란시스 라페 외, , 창비 ‘세상에서 가장 비싼 책’은 ‘사서 읽지 않고 서가에 모셔 놓은 책’이라 한다. 그런 뜻에서라면 지난 연말에야 마저 읽게 된 책, 의 값은 꽤나 나가는 셈이다. 책을 사면 속표지의 여백에다 구매한 날짜와 서명을 해 두는 것은 오래된 습관인데, 거기엔 ‘040127’이라 적혀 있으니, 이 책을 다 읽는 데는 한 달이 모자라는 2년이 걸렸다. ‘식량에 관한 열두 가지 신화’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의 저자는 ‘미국과 전 세계의 굶주림과 빈곤의 원인을 탐구하고 이 문제를 대중과 정책결정자에게 교육하는 일을 하는, 푸드퍼스트(Food First)로 잘 알려진 비영리 연구·교육기관’인 식량과 발전정책 연구소(Institute for Food and Development Polic.. 2019. 10. 15.
시인, 60대 중반에 생애 ‘첫 시집’을 내다 [서평] 이무열 시집 와 1970년대 대구의 문청(文靑) 시대 이무열이 시집을 냈다. 내게 이 사실은 '유명 시인 아무개가 새 시집을 냈다'는 여느 '팩트'와는 다른 결과 무게로 다가온다. 시집 는 1990년대 후반 신춘문예에 동화로 당선한 뒤, 2010년에 계간 에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한 이무열 시인의 생애 '첫 책'이기 때문이다. 20대의 막바지까지 이무열은 소설을 썼지만, 등단은 동화로 했다. 동화집 한 권 못 내고 시로 옮겨와 마침내 환갑·진갑을 넘긴 60대 중반에야 그가 첫 시집을 낸 것이다. 소설을 쓰며 젊음의 한때를 지나올 때, 나는 그와 함께하고 있었다. 심야의 대구 시내버스 뒷좌석에 함께 앉아서 도저한 객기로 거품을 물던 젊은 시절을 나는 부끄러움과 함께 그리움으로 떠올린다. 1970년대.. 2019. 9. 23.
‘지속 가능한 사회’, 그리고 ‘인간의 걸음’ [서평] 유재현의 『느린 희망』 세상에 선 뵌 책은 모두 읽어야 하는 것 같은 강박감에 시달렸던 적도 있었지만, 요즘은 예전처럼 열심히 책을 읽게 되지는 않는다. 책 몇 권을 사면 이 책 저 책 옮겨가면서 읽는 데 좋이 몇 달이 걸리기도 한다. 눈치챘겠지만 모처럼 예전의 속도감을 되찾아 읽을라치면 아뿔싸, 이젠 읽었던 앞부분이 가물가물한 상태가 되기 일쑤다. 얼마 전, 그간 거래해 왔던 한 온라인 서점으로부터 “고객님의 실버회원 유효기간이 7일 남았다.”는 전자우편을 받았다. 그 편지는 말하자면, 유효기간 안에 책을 좀 사라는 신종 마케팅이었던 셈이어서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유효기간이 아까워서가 아니라, 필요해서 세 권의 책을 샀다. (방금 확인해 보니 이번 구매금액으로는 유효기간 연장에 조금 모자란다... 2019. 9. 19.
주례사 비평, 끼리끼리 나누는 ‘우의의 연대’? [서평]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 뒤늦게 (2002,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를 읽었다. 책이야 지난해 12월 30일에 샀지만 정작 이 책이 나온 때는 2002년이니 구간(舊刊)도 한참 구간인 셈이다. 그러나 거기서 비평가들이 제기한 2000년대 초반의 이 나라 비평에 대한 문제의식은 모르긴 몰라도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비평집이어서 꽤 시간을 잡아먹으리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지레짐작이었다. 나는 ‘단숨에’는 아니지만 집중적으로 책을 읽었다. 읽으면서 ‘비평’이란 게 참 멀리도 있는 거라는 걸 절감했다. 명색이 문학 전공자고, 이십 년이 넘도록 아이들에게 문학을 가르치고 있으면서도 나는 아직 한 권의 비평집도 제대로 읽지 않았다. 내가 그러니 독자에만 머무는 여느 사람들이야 더 무엇을 말하겠는가. 여느 독자들이 .. 2019. 9. 18.
‘황석영’을 다시 읽으며 작가 ‘황석영’과 그의 소설들 올해 고등학교로 돌아와 작문 시간을 맡았다. 내게 주어진 시수는 주 1시간. 이 시간은 아이들의 ‘소설 발표 수업’으로 진행한다. 아이들이 주어진 소설을 공부해 와서 두세 명씩 발표하는 형식이다. 한 학기에 한 차례씩 돌아가니 지난 1년간 아이들은 모두 두 편씩의 소설을 발표한 셈이다. 소설 선정은 우리 현대소설을 망라한다. 이미 시중에 나와 있는 고등학교 필독 소설, 단편 소설이 중심이다. 우리는 학기당 서른 편씩, 모두 60여 편의 소설을 공부했다. 아이들은 주로 인터넷 등에서 자료를 수집·가공하여 유인물을 만들어 발표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적지 않은 아이들은 만만찮은 이해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다루는 작품들은 대체로 내가 이미 읽은 것들이지만, 때에 따라 기억이 가물가.. 2019. 9. 17.
펜화, 마음 끝에 스치는 사경(寫經)의 철필 소리 [서평] 디지털카메라의 등장은 사진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바꾸어 놓은 듯하다. 더러 풍경이나 사물을 담기도 했지만 전 시대의 필름 카메라는 주로 사람을 찍는 데 한정되었으니 그것은 만만찮은 비용 때문이다. 필름 구매에서부터 현상과 인화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과정에서 큰돈은 아니지만, 줄곧 드는 비용은 적지 않은 부담인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디카’의 등장은 그런 여가 문화를 일거에 바꾸어 놓았다. 이름난 유적지나 명승지에선 디카를 들고 풍경이나 유적을 담는 사람들로 붐빈다. 필름 걱정도 인화 걱정도 할 필요가 없고, 파일로 보관하거나 필요한 것만 인화할 수 있으니 그 비용은 최소한에 그친다. 바야흐로 디카는 이 디지털 시대의 총아가 된 것이다. 유적이나 풍경을 사진으로 기록하면서 우리는 무심결에 거기 의.. 2019. 9. 16.
일본인 교장 패대기친 소년, 정말 불온했을까 [서평] 부안 역사문화연구소 총서1 정재철의 처녀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다. 사진관에서 찍은 인물사진인데도 흔히 보는 근엄하고 경직된 표정이 아니다. 조리개 개방으로 뭉개진 배경을 등지고 처녀는 오른쪽으로 15도쯤 몸을 틀고 있다.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 여인의 손은 얌전히 무릎 위에 포개져 있다. 때는 1942년, 해방을 3년 앞두고 처녀는 돈화문 근처 어떤 사진관에서 이 사진을 찍었다. 감옥에 있는 독립운동가 부친 옥바라지를 위해서 취직해야 했던 여자는 이력서에 붙일 사진이 필요했다. 아버지는 지운 김철수. 처녀는 지금 아흔여덟 노인이 되었다. 이 한 장의 사진에 담긴 내력들은 칠십몇 년의 시간을 거슬러가 우리를 해방 공간으로 데려다준다. 누구나 한번 미소로 스쳐 갈 사진이지만 그 속에 담긴 시.. 2019. 9. 15.
‘열녀(烈女)’, 혹은 ‘수절(守節)’ 이야기 아이들에게 ‘열(烈)’과 ‘절(節)’을 가르치며 지난 연말에 고등학교 ‘국어(하)’ 마지막 단원을 배웠다. 단원의 이름은 ‘국어가 걸어온 길’. ‘용비어천가’와 ‘동국 신속 삼강행실도’(삼강행실도)가 실려 있다. ‘용비어천가’가 조선왕조 창건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설파하고 있는 목적시라면 ‘삼강행실도’는 ‘지배층이 백성을 가르치겠다는 생각은 실천에 옮긴 책’(강명관, 이하 같음)이다. 지배층이 백성을 가르치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가상히 여길 일은 없다. 이는 지배세력이 국가권력을 통해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로 전파하고 교화시키는 과정일 뿐이니까. ‘양반 체제는 한글로 된 책을 다양하게 인쇄해 백성들에게 공급하거나, 원하는 백성이면 모두 배울 수 있는 학교를 만들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될 수.. 2019. 9. 14.
“우리는 그 외롭고 캄캄한 벽 속에서 무엇을 찾았나” [서평] 황석영 장편 소설 『오래된 정원』 인터넷을 가까이하면서 얻는 소득은 쏠쏠하다. 그중에서 온라인 서점을 발견하고 종종 그 서점을 이용하면서 얻는 성취감은 두 가진데, 하나는 서점에 가지 않고도 아무 때나 신간을 검색해 볼 수 있는 파한(破閑)에 있고, 또 하나는 오프라인 서점에서는 엄두도 못 낼 가격으로 그걸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점이다. 황석영의 장편 소설 『오래된 정원』을 다시 읽었다. 그는 내가 좋아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일뿐더러 스무 살을 전후해 세상을 읽고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 따위에서 내게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이다. 격동의 20세기 마지막 20년의 '문학적 연대기' 이 소설은 저 파란과 격동의 20세기의 마지막 20년을 다룬 문학적 연대기다. 작가는 저 80년대의 벽두를 피로 장식한 ‘광.. 2019. 9. 10.
한 독자와 비평가의 ‘신경숙 읽기’ 내가 읽은 신경숙, 그리고 오길영 교사가 읽은 신경숙 나는 고교와 대학 시절에 좀 느슨한 소설 습작기를 가졌던 사람이다. 굳이 ‘느슨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오직 거기에 ‘다 걸기’를 하지 않았다는 뜻이고, 소설 쓰기를 ‘운명’처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몇 군데 대학문학상을 받았고(이 대목은 그냥 ‘초등학교’ 때 공부 좀 했다는 정도로만 받아들이시기를^^) 대학을 졸업하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나는 내 습작기를 끝내버렸다. 주변에선 너무 쉽게 포기한 것 아니냐며 아쉬워하기도 했지만, 나는 우정 모든 미련을 접어 버렸다.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내 천박한 시각과 세계관 따위로 ‘감자 한 알 적시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신경숙 읽기는 불편했다 진부한 표현을 빌리자면.. 2019. 9. 8.
가미카제 된 식민지 청년, 그는 과연 친일파인가 [서평] 길윤형의 ‘식민지 시대’를 정리하는 일은 만만하지 않다. 아주 단순할 듯하면서도 뜻밖으로 꼬이는 게 이른바 ‘친일파’, 부일(附日) 인사에 대한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오랜 시간 공들여 내놓은 에 오른 인물들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최소한도 일제의 권력기관, 군과 경찰, 식민지 관리 업무에 종사한 일정 직위 이상의 관료들 경우에는 친일부역자로 처리하는 데 지장이 없는 듯하다. 일본 육사를 나와 일본군 예비역 소위로 편입되면서 만주국 장교가 된 박정희가 사전에 오른 것이 그 실례다. 조선인 ‘가미카제’, 가해자인가 피해자인가 그런데, 정작 을 편찬한 민족문제연구소조차 그 성격을 명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존재들이 있다. 태평양전쟁 말기, 비행기를 타고 미군.. 2019. 9.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