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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역사 공부 「오늘」201

[오늘] 청와대 습격, 1·21사태 일어나다 [역사공부 ‘오늘’] 1968년 1월 21일, 북한 공작원 31명 서울 침투 1968년 1월 21일 일요일,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특수부대 124부대 공작원 31명이 박정희 대통령을 제거하기 위하여 서울에 침투하였다. 서울 세검정 고개에 이른 이들은 경찰에게 저지당하자 총기를 난사하고 수류탄을 던지고 뿔뿔이 도주했다. 이른바 ‘1·21사태’(김신조 사건)다. 이들 공작원이 정찰국장으로부터 청와대 습격에 관한 구체적인 지시를 받은 것은 1월 13일이었고, 황해북도 연산군의 제6 기지를 출발한 것은 사흘 후인 1월 16일 밤 10시였다. 이들은 17일에 한국군 복장으로 수다에프(PPS-43)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휴전선의 미군 제2보병사단 구역의 군사분계선을 넘었고, 18일에는 꽁꽁 얼어붙어 있던 임.. 2024. 1. 21.
용산참사, 기억의 투쟁 용산참사 7주기, 기억의 투쟁 용산참사 유족들이 참사 당시 경찰 책임자였던 현재 경주 국회의원 새누리당 예비후보로 등록한 김석기 전 서울경찰청장에 대해 ‘살인 진압 책임자’라며 ‘후보 사퇴’를 촉구했다는 기사를 읽으면서 내일(20일)이 참사 7주기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간 거의 잊고 있었던 그날을 떠올리며 이른바 나는 ‘기억의 투쟁’을 생각한다. 물리적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지만, 시간의 경과는 문제의 해결을 담보해 주는 대신 사람들의 기억에서 그 고통과 진실을 바래게 한다. 하여, 기억의 투쟁은 흐르는 시간 속에서 진실을 망각하지 않으려는 싸움이다. 세상은 사람들에게 잊어버리라고 권한다. 일상으로 돌아가라고 권한다. 기억한다고 해서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느냐며 잊어버리고 한다. 희미해지는 기억만큼 그 .. 2024. 1. 19.
[오늘] 박애주의자, 배우 오드리 헵번 떠나다 [역사 공부 ‘오늘’] 1993년 1월 20일, 오드리 헵번 타계 1993년 1월 20일,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배우이면서 20세기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불리었던, 모두가 사랑한 ‘세기의 연인’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 1929~1993)이 스위스의 자택에서 대장암으로 사망했다. 향년 64세. 그는 영화를 통해 다양한 여성의 삶과 성격을 창조하면서 미국영화협회(AFI)가 선정한 ‘가장 위대한 여배우’ 세 번째에 이름을 올렸다. 그가 주연한 영화 이나 같은 영화는 그 개인의 작품 목록(filmography)를 넘어 영화사에 길이 빛나는 작품들이었다. 오드리 헵번은 예순 살 즈음하여 은퇴한 뒤 나중에 만년의 삶 대부분을 유니세프(유엔 아동기금, UNICEF)에 헌신했다. 1954년부터 이 기구.. 2024. 1. 19.
[순국] 의성단장 편강렬 의사, 만주에서 순국하다 1928년 1월 16일, 만주 안둥(安東) 병원에서 순국 1928년 1월 16일, 만주 안둥(安東) 병원에서 편강렬(片康烈, 1892~1928) 의성단장이 순국하였다. 선생은 3년 전 하얼빈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7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혹독한 고문으로 발병, 보석으로 석방되어 치료 중이었다. 향년 36세. 그는 열여섯 살에 이강년 의병진의 선봉장이 되었던 사람이었다. 힘으로는 싸우는 두 마리 소 사이에 들어가 소를 떼어 말렸고, 민첩하고 가볍기로는 초가지붕을 뛰어넘었던 용맹한 전사였다. 법정 최후진술로 “목숨이 떨어질 때까지 일제와 싸워서 일본에 한국인 총독을 두겠다.”하고 말할 만큼 기개도 드높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열여섯에 의병 선봉장이었다 애사(愛史) 편강렬은 황해도 연백 사람이다. 한학을 공부.. 2024. 1. 16.
[오늘] 대한광복군 총사령 지청천 장군 급서하다 [역사 공부 ‘오늘’]1957년 1월 15일- 대한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 급서 1957년 1월 15일 오후 6시 30분, 서울 중구 신당동 자택에서 대한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池靑天, 1888∼1957) 장군이 급서하였다. 그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일본군 장교로 근무하다 탈출하여 광복군이 되었고, 청산리와 봉오동 전투와 함께 독립군 3대 대첩인 대전자령 전투의 지휘관이었다. 향년 68세. 지청천은 서울 출신이다. 본명은 대형(大亨), 일명 이청천(李靑天), 호는 백산(白山)이다.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1908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교했다. 이듬해 통감부의 압력으로 무관학교가 폐교되면서 1, 2년생 40여 명과 함께 정부 유학생으로 동경 육군중앙유년학교에 들어갔다. 유년학교는 뒤에 일본사관학.. 2024. 1. 15.
[오늘] 스물둘 박종철, 남영동에서 고문으로 지다 [역사 공부 ‘오늘’]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심문 중 고문으로 숨지다 1987년 1월 14일 오전 11시 20분께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에서 서울대 인문대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22)이 심문을 받던 중 고문으로 숨졌다. 1월 13일 자정께 하숙집에서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된 채 12시간이 되지 않은 때였다. 경찰은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추위’ 지도위원으로 수배 중이었던 선배 박종운(26, 사회학과 4년 제적)을 붙잡기 위해 박종철을 연행하였으나 박종철은 박종운의 소재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경찰은 심한 폭행과 함께 전기고문과 물고문 등을 가했고 박종철은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검안의는 사인을 ‘미상’으로만 기록했다 당황한 경찰은 인근 중앙대 용산병원 응급실로.. 2024. 1. 13.
[오늘] 의열단의 김상옥 의사,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다 [역사 공부 ‘오늘’] 1923년 1월 12일-김상옥,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다 1923년 1월 12일 밤 8시께, 서울 한복판 종로경찰서 서편 유리창을 뚫고 폭탄 하나가 날아들어 터졌다. 일제 식민통치를 뒷받침하는 경찰력의 본산으로 숱한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해 온 종로경찰서를 폭파하려는 이 의거에 일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폭탄이 터지면서 경찰서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건물 일부가 파손되고 행인 7명이 중경상을 입었지만, 당시 일경은 이 투탄 의거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종잡지 못하고 있었다. 일경이 투탄의 주역을 알아낸 것은 의거 닷새 후인 1월 17일이었다. 이 종로경찰서 투탄 의거의 주인공이 바로 서른세 살의 청년 김상옥(金相玉, 1890~1923)이다. 그는 서울 어의동에서 영문(營門) 포.. 2024. 1. 11.
[오늘] 작가 전혜린, 서른한 살로 지다 [역사 공부 ‘오늘’] 1965년 1월 10일, 작가 전혜린 사망 1965년 1월 10일 일요일 아침, 전날 지인들과 밤 10시까지 술을 마시다 자리를 떴던 작가 전혜린(田惠麟, 1934~1965)이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언론은 그의 사인을 ‘심장마비’(조선일보)와 ‘수면제 과용으로 인한 변사’(경향신문) 등으로 전했지만 일반에는 ‘자살’로 널리 알려졌다. 유족이 입을 다물고 있어 자살 여부는 가릴 수 없는 일인데도 자살로 알려진 것은 죽기 이틀 전에 술자리에서 읊었다는 다음 글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려서인지도 모른다. 1월 8일 초저녁 술자리에서 그가 읽고 태워버렸다는 글이다. [시 전문 텍스트로 읽기] 이 글의 출처는 알 수 없다. 내가 소년 시절부터 알고 있는 버전은 위와는 조금 다르지만, 전체 내용.. 2024. 1. 10.
[오늘] 1993년 오늘, 고노 담화 - ‘정의의 기억’, 그 행방을 묻는다 [역사 공부 ‘오늘’] 8월 4일- 일본 고노 관방장관, ‘위안부 관계 조사결과 발표에 관한 담화’ 발표 1993년 8월 4일, 일본 자유민주당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내각의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은 ‘위안부 관계 조사결과 발표에 관한 담화’(이하 ‘고노 담화’)를 발표했다. 고노 담화는 전시 일본군 위안소는 당시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치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관리 및 위안부 이송에 관해서는 구 일본군이 관여하였다고 발표하면서 일본군 ‘위안부’들에게 사과했다. 이는 그때까지 일본군 ‘위안부’들이 군용 성매매 업소에 종사하도록 강요받았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었던 일본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한 군의 강제성을 인정한 것이었다. 고노는 일본 제국 육군이 직간접적으로 매춘소의 설치에 관여했다고.. 2024. 1. 9.
[역사 공부 ‘오늘’] 24년 전 오늘, 첫 ‘수요시위’ 열리다 1992년 1월 8일, 첫 ‘수요시위’ 열리다 새삼스럽다는 느낌이 없잖아 있다. 지금껏 무심히 잊고만 있다가 어이쿠, 이게 그럴 일이 아니로군, 그래서는 안 되지, 하고 안타까움과 노여움으로 우리가 저간의 사정을 살펴보게 된 것은. 물론 그걸 아무도 나무랄 수 없다. 저마다 사정이 다르긴 하지만 모두가 ‘헬조선’을 사느라고 힘겨웠으니 왜 지금껏 무심했냐고 타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1992년 1월 8일 첫 시위에서 2016년 1212차 시위까지 지난 12월 28일의 한일 외교장관 회담의 “일본군 ‘위안부’합의 이후 전개되어 온 국민적 분노와 규탄 분위기 얘기다. 그러나 이번 정부간 합의를 계기로 사람들은 이 해묵은 전쟁범죄에 대한 사과와 배상 요구가 정당한 요구인 만큼 그것을 짓밟은 이 합의의 부당성을.. 2024. 1. 8.
[오늘] 태평양전쟁 ‘전범’ 일왕 히로히토(裕仁) 사망 [역사 공부 ‘오늘’] 1989년 1월 7일, 1급 전범 일본인의 ‘덴노헤이카(天皇陛下)’ 사망 1989년 1월 7일 오전 6시 33분, 태평양전쟁의 1급 전범, 1억2천만 일본인의 ‘덴노헤이카(天皇陛下)’ 쇼와 ‘천황’ 히로히토(裕仁, 1901~1989)가 숙환으로 사망했다. 향년 88세. 히로히토는 근대 세계사를 전쟁의 시대로 만든 장본인이었지만 일본 국민으로부터는 ‘살아있는 신’[현인신(現人神)]으로 추앙받았던 세계 최장수 국가원수였다. 히로히토는 1901년 다이쇼(大正) ‘천황’ 요시히토(嘉仁)의 아들로 태어나, 25살(1926) 때 124번째 ‘천황’의 자리에 올라 64년의 쇼와(昭和) 시대를 열었다. 1921년에 부황(父皇)을 대신해 정사를 돌보았으며, 즉위한 뒤 죽을 때까지 재위했다. 히로히.. 2024. 1. 7.
[오늘] 의열단원 김지섭, 일본 궁성에 폭탄을 던지다 [역사 공부 ‘오늘’] 의열단원 김지섭 니주바시(二重橋) 의거 1924년 1월 5일 오후 7시, 김지섭(金祉燮, 1884~1928)은 일본 궁성(宮城)의 다리인 니주바시(二重橋) 부근에서 궁성의 문인 사쿠라다몬(櫻田門)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가슴에 품고 있는 폭탄의 무게를 가늠해 보면서 자신의 동선을 계산해 보았다. 김원봉의 의열단이 1924년 초 도쿄에서 제국의회가 열려 일본 수상을 비롯한 고위 관료와 조선 총독이 참가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것은 1923년 12월이었다. 의열단은 제국의회에 폭탄을 던져 일제의 주구들을 처단하고 일제의 만행을 온 천하에 알리고자 했다. 김지섭, 폭탄을 품고 석탄선을 타다 결사 대원으로 선발된 김지섭은 12월 20일, 상하이 푸둥에 정박 중인 미쓰이(三井) 화물 소속의 .. 2024. 1.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