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안동 이야기66

안동에서 10년째 살기 안동과 인연 맺고 산 지 어느새 10년 아주 뿌리 박고 살겠다고 안동에 들어온 때가 1997년 여름이다. 한 8년쯤 된 셈이다. 그 여덟 해의 시간 동안 내가 사는 아파트 뒷동네의 을씨년스러운 야산이 고급 아파트 단지로 바뀌고, 그 너머 동네가 신시가지로 개발되면서 아파트촌 주변이 시끌벅적한 유흥가가 되어 버린 변화가 있었다. 나는 이른바 안동에서 나고 자란 ‘안동사람’은 아니다. 죽을 때까지 이 땅에서 산다고 해도 ‘안동사람’이 될 수는 없다. 고작해야 ‘안동사람 다된’ 정도일 터이다. 그것이 이 나라에서 한 지역 사람이 되는데 필요한 불문율인 것이다. 안동을 처음 만난 건 1984년이다. 그해 겨울, 대학 시절에 ‘죽고는 못 살던’ 친구의 결혼식 때문에 난생처음 안동에 발을 디뎠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2019. 8. 26.
‘그의 역사’에 묻힌 그 여인들의 삶과 투쟁 안동독립운동기념관 ‘만주 망명 100주년 기념 특별기획전’ 인류의 역사가 ‘그의 역사(history)’였다는 걸 중언부언할 필요는 없겠다. 인류의 탄생 이래 세상은 남성들의 것이었고, 그들이 교직해 낸 삶의 누적이 역사였으니까 말이다. 그러면 여성들은 어디에 있었나. 그들도 역사의 도도한 물결 속에 있었다. 단지 그들이 선 곳이 남자들에게만 쏟아지는 빛 저편의 ‘그늘’이었다는 점이 달랐을 뿐이다. 그의 역사에 묻힌 ‘그녀들의 삶과 투쟁’ 뜬금없이 ‘인류사’를 들먹이게 된 것은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서 ‘만주 망명 100주년 기념 특별기획전’(2011.8.12~2012.2.29)을 다녀온 소회 때문이다. 이 특별기획 전시회의 주제는 ‘만주를 품은 안동 여인들! 광복의 꽃이 되다’이다. 안동의 애국지사들이 얼어.. 2019. 8. 26.
[광복 65돌] 낡은 사진 속의 독립투사들 책자 속에서 만나는 독립 투사들 사진으로 보는 ‘근대 안동’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태극기를 달았다. 하늘은 잔뜩 낮게 가라앉아 있었고 베란다의 국기봉 꽂이에 태극기를 꽂으며 보니 우리 동에 아직 국기를 단 집은 보이지 않았다. 어제저녁에 관리실에서 국기 게양을 알리는 방송이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날씨를 재고 있었는지 모른다. 8시 반이 넘자, 천둥소리가 울리고 번개를 번쩍이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태극기는 깜빡 잊고 있었는데 아내가 걷어서 말린다고 창문턱에다 펴 놓았다. 비는 마치 양동이로 퍼붓듯이 기운차게 내린다. 장마를 잘 넘긴다고 하였더니 뒤늦은 장마가 오히려 드세다. 오늘은 광복 65돌이고 오는 29일이면 경술국치 100돌이다. 며칠 전에는 간 나오토 일본 총리가 담화를 발표해 한.. 2019. 8. 12.
물돌이동[하회(河回)] 주변을 거닐다 화천서원과 겸암정사 - 류운룡의 자취를 더듬으며 병산서원에서 나오던 길을 곧장 풍천으로 향했다. 부용대 아래 겸암정사에 들르고 싶어서였다. 화천서원(花川書院)을 거쳐 화산 부용대 너머 겸암정사로 가는 길을 택했다. 병산서원이 서애 류성룡(1542~1607)을 모신 서원이라면, 풍천면 광덕리(하회마을 건너편 마을)에는 서애의 형님인 겸암(謙菴) 류운룡(1539∼1601)을 배향한 화천서원이 있다. 1786년(정종 10)에 류운룡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이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병산서원이 서원철폐령으로 살아남은 47개의 서원 중 하나라는 점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훼철 이후 강당과 주소만 남았다가 100여 년간 서당으로 이어져 오던 이 서원은 1.. 2019. 7. 25.
탑의 마을, 안동 임하리(臨河里) ‘나머지 탑’을 찾아서 ② 임하리의 탑들 [관련 글] 허물어진 절터에 마주 선 돌탑과 서당 작든 크든 탑이 있는 마을의 이름자에는 ‘탑’이 들어가게 마련이다. 의성군 금성면의 국보 제77호 의성 탑리 오층석탑이 서 있는 동네는 ‘탑리(塔里)’이고, 보물 제57호 안동 조탑리 오층전탑이 있는 마을은 말 그대로 ‘탑을 지은 마을’, 조탑리(造塔里)다. 그러나 한두 기도 아닌 네 기의 탑을 품고 있는 마을, 안동시 임하면 임하리는 그냥 임하리니 그 이름에서 탑의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반변천이 흐르는 강가에 있다고 하여 임하(臨河)라는 이름을 얻었다. 임하리는 임하면 내앞마을(천전리)에서 임하댐으로 가다 강을 건너면 이르는 마을이다. 임하1리에는 신라와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탑 네 기가 전한다. .. 2019. 7. 2.
아아, 만대루(晩對樓), 만대루여 병산서원 만대루의 추억 6·2 지방선거 날, 병산을 다녀왔다. 굳이 ‘병산서원’이라고 하지 않고 ‘병산’이라고 한 까닭은 그곳이 우리의 목적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서원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거기서 아내와 함께 하회마을 길을 탔다. 병산에서 강변과 산을 타고 하회마을로 가는 이 길은 십 리 남짓. 우리는 애당초 길을 되짚어 올 생각이었다. 하회에 닿았을 때 우리는 더위와 허기에 지쳐 있었고 이미 시간도 정오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아무 준비 없이 길을 나섰다는 사실을 뉘우치면서 우리는 마을 앞 장터에서 늦은 점심을 들었다. 부득이 딸애를 불러 우리는 병산으로 돌아왔다. 언제나처럼 서원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오후의 햇볕이 따가웠고 나는 만대루에서 잠깐 쉬어 가자고 했다. 우리는 음료수 .. 2019. 6. 30.
물돌이동[河回] 건너 화천서원과 겸암정사 유운룡의 겸암정사와 화천서원 병산에서 나오던 길을 곧장 풍천으로 향했다. 부용대 아래 겸암정사에 들르고 싶어서였다. 화천서원(花川書院)을 거쳐 겸암정사로 가는 길을 택했다. 병산서원이 서애 류성룡을 모신 서원이라면, 풍천면 광덕리(하회마을 건너편 마을)에는 서애의 형님인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을 배향한 화천서원이 있다. 힘의 균형은 부와 권력의 크기에 비례한다 1786년(정종 10)에 유운룡·유원지·김윤안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이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병산서원이 서원철폐령으로 살아남은 47개의 서원 중 하나라는 점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훼철 이후 100여 년간 서당으로 이어져 오던 이 서원은 1996년 묘우와 문루, 동서재와 전사청 등을 .. 2019. 6. 30.
기구하여라 ‘덴동 어미’, 그 운명을 넘었네 [안동 시가 기행 ⑨]내방가사 경상북도 북부지역을 더듬으며 ‘국문 시가’를 찾는 이 기행도 이제 막바지다. 그러나 이 성긴 기행은 유감스럽게도 우리 문학사에서 한글 시가의 유산이 그리 넉넉하지 않다는 사실을 환기해 준다. 안동 인근에서 역동 우탁, 농암 이현보, 송암 권호문, 퇴계 이황, 청음 김상헌, 갈봉 김득연의 자취를 뒤졌다면 타시군은 고작 영덕의 존재 이휘일, 영주의 근재 안축의 흔적을 더듬었을 뿐이다. 과문한 탓이겠지만, 경북 북부의 열한 개 시군에서 나는 더는 한글 시가를 찾지 못했다. 만약 내가 찾지 못한 한글 시가가 남아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떤 경로로든 햇빛을 보지 못한 노래일 가능성이 클 듯하다. 이번 기행에서 처음으로 70여 수의 시조를 남긴 갈봉 김득연을 만나게 된 것도 그의 시가.. 2019. 6. 14.
‘산 높고 물 맑은’ 죽계(竹溪), 만만찮은 곡절과 한을 품었다 [안동 시가 기행 ⑧] 안축의 경기체가 ‘관동별곡’과 ‘죽계별곡’ 가을이 깊었다. 한가위가 지나면서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이 예사롭지 않더니 어느새 우리는 겨울의 어귀에 서 있다. 곱게 물들며 지는 나뭇잎, 그 조락(凋落)이 환기하는 것은 시간, 그 세월의 무상이다. 그것은 또 우리 역사 속에 스러져 간 시인들의 삶과 그들의 노래를 덧없이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오늘의 여정은 영주 순흥 쪽이다. 순흥, 소백산 자락으로 한 시인의 노래와 그 자취를 찾아나서는 길이다. 그는 본관을 ‘순흥’으로 쓰는 고려 말의 문신 근재(謹齋) 안축(安軸,1287~1348)이다. 근재는 경기체가인 ‘관동별곡(關東別曲)’(조선조 중기에 송강 정철이 쓴 가사 ‘관동별곡’과는 다른 노래다)과 ‘죽계별곡(竹溪別曲)’의 지은이다. 후.. 2019. 6. 13.
거기 뜬구름 같은 부귀도 무릉도원도 없다 [안동 시가 기행 ⑦] 갈봉 김득연의 한글 시가를 찾아 떠나는 이 기행은 어느덧 막바지에 이른 듯하다. 그간 누차 뇌었듯 고을마다 시인 묵객들로 넘치지만 정작 한글로 그 시대와 삶을 기록한 이는 드문 까닭이다. 비록 자신의 성리학적 세계관을 노래하는 데 그쳤다고는 하나 퇴계나 송암 같은 학자 문인들이 여러 편의 한글 시가를 남긴 것이 돋보이는 것은 같은 이유에서다. 한글 시가를 찾아가는 오늘의 여정은 안동시 와룡면으로 향한다. 와룡면 가구리(佳邱里)에 있는, 광산김씨 유일재공파의 종가인 유일재(惟一齋) 고택을 찾아가는 길인 것이다. 안동의 광산김씨는 구담, 가구, 외내 등 세 군데에 뿌리를 내렸는데 가구리에 세거해 온 이들을 유일재공파로 부른다. 애당초 유일재의 조부인 담암 김용석(金用石, 1453~?).. 2019. 6. 2.
바람 앞 농촌, ‘이 중에 즐거운 뜻’은 이미 거기 없다 [안동 시가 기행 ⑥]존재 이휘일의 일찍이, 한문으로도 완벽한 문자 생활을 누릴 수 있었던 조선조 사대부들은 한문뿐 아니라, ‘언문’이라 천대받던 한글로도 삶과 세상을 노래했다. 우리가 오늘날 국문 시가를 즐기며 당대 현실과 사회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그 덕분이다. 이들 사대부는 성리학을 공부한 선비였고, 시조는 그들의 ‘정신적 자세를 표현하는 그릇’이었다. 퇴계나 율곡 같은 이들이 과 를 통해서 노래한 것은 그들의 성리학적 세계관, ‘자연에 투영된 인생관의 한 극치’였다. 이들 사대부가 관념적인 유교 이념을 형상화하거나 안빈낙도에 침잠하고 있을 때, 피지배계층인 농민들의 삶은 고단하기만 했다. 이들은 여전히 문학의 향유층이 되기엔 역부족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삶을 노래할 여유도 능력도 .. 2019. 6. 2.
척화 대신, 모국어로 ‘망국’을 노래하다 [안동 시가 기행 ⑤] 청음 김상헌의 ‘가노라 삼각산아…’ 아이들에게 우리 문학을 가르치다 가끔 그런 얘길 하곤 한다. 만약, 송강 정철이, 또는 고산 윤선도가 ‘진서(眞書)’가 아닌 ‘언문(諺文)’으로 된 노래를 남기지 않았다면, 혹은 그들이 ‘사미인곡’이나 ‘관동별곡’을, 또 ‘어부사시사’와 ‘오우가’를 우리말 아닌 한시로 남기고 말았다면, 하고 말이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에게 남겨진 문학 유산이 한문투성이의 시부에 그친다면 그게 얼마나 ‘끔찍한 풍경’일 것인지를. 조선조 사대부들은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부터 한문 공부를 시작하여 평생을 이국 문자의 의미망 속에서 갇혀 산 이들이다. 당연히 이들은 한문으로도 완벽한 문자 생활을 누릴 수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이들이 굳이 우리말로 노래한 까닭.. 2019. 5.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