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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안동 이야기66

안동포, ‘이승에서 못 입어 저승까지 입고 간다’고? 안동시 임하면 금소리 안동포 타운을 다녀오다 지난 주말에 안동포타운을 다녀왔다. 청송 백석탄 근처의 물가를 찾았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안동포타운에 들르는 일은 예정에 없었던 일이다. 계획에 없던 여정이 추가된 것은 귀가 시간이 좀 이르다 싶은 데다가 거기 안동포 박물관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기 때문이었다. 이름도 생뚱맞은 ‘안동포타운’이 안동시 임하면 금소리에 문을 연 것은 이 동네가 전통적인 안동포 생산지였기 때문이다. 안동포 전시관, 영상실, 안동포 짜기 시연장, 안동포 공예관 등이 들어선 곳은 옛 금소초등학교 자리다. 안동에서 길안으로 가는 34번 도로가 금소리와 안동포타운을 좌우로 가르고 있다. 주말 오후 세 시께의 안동포타운은 적막했다. 마당의 잔디밭은 물론이고 입구 쪽의 맨땅에도 듬성듬성.. 2020. 2. 16.
은둔의 마을, 지례 예술촌 안동시 임동면 지례예술촌, 지촌 김방걸의 후손들이 지켜온 마을 안동은 인구 16만을 조금 넘는 전형적인 농촌 도시다. 발치를 흐르는 낙동강과 산 사이에 끼인 시가지는 좁은 데다가 거의 굴곡 심한 언덕배기에 조성되어 있다. 그러다 보니 반듯한 네거리는 손꼽을 정도고 거리 대부분은 제멋대로 얼기설기 가지를 치고 있어서 과연 이곳이 ‘도시 계획’이 존재했던 도시였던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이 도시의 넓이(1,520㎢)가 서울(602.52㎢)의 두 배를 족히 넘는다는 사실이 별로 믿기지 않는다. 안동 땅이 넓은 건 산에 오르거나 전혀 마을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골짝에도 사람의 온기가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로 확인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학가산이나 천등산에 올라 산 아래를 굽어보면 보이는 건 모두 산이고, 마을은 .. 2020. 2. 13.
하회, 그 ‘낮은 사람들의 삶’도 기억하게 하라 [관광객 천만 명 돌파] 안동 ‘하회마을’을 다시 본다 경북 북부의 소도시, 안동을 온 나라에 알리는 데 가장 크게 이바지한 곳이 하회마을이다. 요샛말로 하자면 하회는 ‘안동의 아이콘’인 셈이다. 안동이라 하면 ‘퇴계’나 ‘도산서원’을 먼저 떠올릴 법하지만, 사람들은 그리 ‘성리학적’이지 않다. 고리타분한 왕조 시대의 유학자보다야 수더분하게 이웃 마실 가듯 들를 수 있는 ‘하회’가 사람들에겐 더 친숙한 것이다. 이 오래된 마을을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린 것은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다. 1999년 그의 방문 뒤에 봉정사가 생뚱맞게 입장료를 받기 시작했다는 ‘뒷담화’가 떠돌기는 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하회에 머무는 바람과 햇빛이 고즈넉한 중세의 그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한 것은 전적으로 이 할머니의 덕이.. 2020. 2. 10.
‘고산서원(高山書院)’에서의 하룻밤을 꿈꾸며 대산 이상정 선생을 기리려 창건한 안동시 남후면 광음리 고산서원에서 인터넷에서 ‘고산서원’을 검색하면 두 군데의 고산서원이 뜬다. 한자도 같은 ‘고산(高山)’이다. 하나는 안동에 있고 다른 하나는 전라남도 정성에 있다. 장성 고산서원은 한말의 거유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1798~1879)이 장성군 진원면 고산 마을에 세운 서원이다. 이 서원은 노사가 1878년(고종 15)에 정사(精舍)를 지어 담대헌(澹對軒)이라 하고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후손들이 1924년에 중건하고 1927년에 고산서원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노사는 조선 말기 성리학의 6대가로서 위정척사론을 주장하여 민족정신을 불러일으킨 이다. 시호는 문정(文靖). 안동의 고산서원은 안동시 남후면 광음리에 있다. 이 서원은 1789년(정조 1.. 2020. 1. 30.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 가라’ 하네 문경 사불산(四佛山)에 깃든 두 산사, 윤필암과 대승사 문경시 산북면은 예천과 충북 단양을 이웃으로 둔 조그만 산골짜기지만, 공덕산(913m)과 운달산(1058m)에 유서 깊은 옛 가람 두 곳을 품고 있는 동네다. 예천 문경 간 도로에서 단양으로 빠지는 길을 십여 분 달리다 이르는 삼거리에서 왼쪽 길을 골라 가다 보면 또 갈림길이 나오는데, 왼편으로 가면 들게 되는 운달산 김용사(金龍寺)와, 오른편 산길을 올라 만나는 사불산 대승사(大乘寺)가 그곳이다. 사불산(四佛山)은 공덕산의 다른 이름이니 그 이름 속에 이미 만만찮은 설화를 품고 있다. ‘천강사불(天降四佛) 지용쌍련(地聳雙蓮)’의 대승사 창건 설화는 삼국유사(권3 탑상 4 사불산, 굴불산, 만불산)에 아래와 같이 전한다. “죽령 동쪽 백여 리 지점에.. 2020. 1. 29.
예천 금당실, 그 ‘골목 안 돌담길’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금당실’ 마을 예천은 내가 경북 북부지방과 처음 인연을 맺은 곳이다. 1994년 복직하면서 나는 예천의 한 시골 학교로 임지를 지정받았기 때문이다. 거기서 꼭 4년 반을 살았다. 그러니 예천에 대해서 알 만큼은 안다고 할 수 있는 처지다. 그러나 그건 ‘내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최근 여러 매체에 자주 소개되고 있는 ‘금당실’ 마을에 대한 기억은 좀 모호하다. 용문면에 있는 마을이라면 마땅히 내겐 구면이어야 하는데 막상 ‘금당실’이 어디쯤이었는지 막연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드라마 ‘황진이’를 찍었다는 ‘병암정’까지 이야기하면 이내 가슴이 답답해진다. 아니, ‘초간정’이 아니고 ‘병암정’이라고? 묵은 기억을 깁기 위한 여행 크리스마스에 아내와 함께 길을 떠난 것은 순전히 내 허술.. 2020. 1. 28.
뭍에 있는 안동이 제주 섬의 4·3과 무슨 상관? 4·3 당시 안동형무소 희생자를 위한 진혼제 열려 특정 지역에서 일어난 역사가 그 지역성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그러나 시간보다 더 긴요한 것은 그것을 당대의 삶과 역사로 받아들이는 동시대인들의 공감과 연대다. 1980년 5월의 광주민중항쟁은 공식적 역사 속으로 편입했지만, 여전히 그것을 ‘광주사태’로 인식하는 동시대인들이 있는 한 광주항쟁이 ‘광주’를 넘어서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광주가 30년의 역사라면, ‘잠들지 않는 남도’ 제주의 4·3은 60년도 넘은 훨씬 오래된 역사이다. 그러나 여전히 4·3은 제주 섬을 벗어나지 못한다. 공식적으로 보면 4·3은 2000년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 공포되면서 사건 발발 반세기가 넘어 그 결자해지의.. 2020. 1. 26.
‘칠군자’ 마을에 항일 지사의 빗돌이 외롭다 안동 군자마을 기행 이 땅 어느 고을인들 저 왕조시대 양반들의 자취가 남아 있지 않겠냐만, 유독 안동 땅에는 그들의 흔적이 두텁고 깊어 보인다. 여기는 이른바 ‘양반의 고장’, 그것도 꼬장꼬장한 ‘안동 양반’의 땅이다. 엔간한 마을이라도 들어가기만 하면 만만찮은 옛집과 정자가 고색창연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당연히 길가에는 ‘문화재’나 ‘유적’을 알리는 표지판이 줄지어 서 있다. 안동에서 산 지 10년을 훌쩍 넘겼으니 내 발길이 인근의 이름 있는 마을, 고택, 정자 따위를 더듬은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 내 여정을 두고 ‘농반진반’으로 ‘양반들 흔적이나 찾아다니는 일’이라며 마뜩잖아하는 벗이 있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예나 지금이나 ‘양반’을 이미 화석이 된 전근대의 신분적.. 2020. 1. 25.
부석사에서 만난 ‘진국의 가을’ 아이들 체험활동에 묻어 간 부석사 부석사를 다녀왔다. 근 4년 만이다. 예천에 살 때는 일 년에도 서너 차례 넘게 다니던 곳이다. 멀리서 온 벗이나 친지, 제자들의 길라잡이가 되어서였다. 안동으로 옮아오고 나서는 발길이 뜸해졌다. 바쁘게 산 탓일까. 마지막으로 다녀온 게 2007년 5월이었다. 아이들 ‘체험활동’에 묻어간 부석사 10월 마지막 토요일(10월 29일) 1학년 아이들의 체험활동이 부석사와 소수서원 일원에서 펼쳐졌다. 1학년을 전담하고 있던 나는 이 활동에 무임승차(?)했다. 10월도 깊었겠다, 나는 부석사의 가을을 좀 진국으로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8시께 출발한 전세버스는 9시가 조금 넘어 부석사 주차장에 닿았다. 차에서 내리는데 아뿔싸, 빗방울이 듣기 시작했다. 오후에나 비 소식이 있겠.. 2019. 11. 8.
의성 등운산 고운사(孤雲寺)의 가을 본색 경북 의성 등운산 고운사에 당도한 진국의 가을 집을 나설 때의 생각은 소호헌을 둘러 서산서원을 둘러오는 것이었다. 시간이 나면 고운사에 들르든지 말든지…, 하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정작 소호헌은 잠시 들렀고, 서산서원으로 가지 않고 반대쪽 길인 고운사로 곧장 가 버린 것이다. 보물 제475호 소호헌(蘇湖軒)은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별당 건축물이다. 본래 안동 법흥동 임청각의 이명이 다섯째 아들 이고의 분가 때 지어준 것이나 이고가 외동딸과 혼인한 중종 때의 학자 서해에게 물려준 집이다. 망호리는 목은 이색의 후예인 한산 이씨 일족이 세거하고 있는 마을이다. ‘소퇴계(小退溪)’라고 불리는 영조 대의 대학자 대산 이상정(1711~1781)도 여기서 태어났다. 인근의 서산서원은 목은 이색을.. 2019. 11. 3.
부용대, 물돌이동[하회(河回)]의 가을 하회와 부용대에 닿은 가을 가을이라고 느끼는 순간, 가을이 이미 성큼 깊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아침 깨어나니 발밑까지 가을이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때아닌 한파가 들이닥쳤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시월도 막바지다. 곧 수능시험이고 올 한 해도 얼마 남지 않았다. 성큼 깊어진 가을, 부용대로 가다 알 수 없는 조바심이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있다. 공연히 어지러운 마음을 가누느라 이리저리 책을 뒤적이고 잡다한 상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지난 일요일 오후에 혼자서 집을 나선 것도 그런 까닭에서였을까. 사진기를 챙겨 들고 떠난 곳은 부용대였다. 며칠 동안 자꾸 부용대에서 내려다보는 하회마을 풍경과 발밑의 강을 오가는 나룻배가 아련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룻배라고 했지만 기실 그 배는 이미 나룻배가 아.. 2019. 10. 31.
안동 ‘강남’의 정자들, 450년 전 원이엄마의 편지 [안동 정자 기행 ③] 안동시 정상동의 귀래정··반구정·어은정 귀래정(歸來亭)은 이굉(李굉, 흙 토 변에 팔뚝 굉厷 잔데 아래아 한글에는 이 글자가 없다.)이 반변천과 낙동강이 만나는 경승지에 지은 정자다. 낙포 이굉은 고성이씨 안동 입향조인 증(增)의 둘째 아들이다. 동생인 명은 군자정을 지었다. ‘귀래정’이란 이름은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취한 것이다. [관련 글 : 군자정은 ‘그의 삶’과 함께 기억된다] 에서 안동에서 으뜸으로 친 귀래정 같은 이름의 정자가 경북 영천과 전북 순창에도 있다. 영천의 귀래정은 조선조 말의 문신 현찬봉(1861~1918)의 우거(寓居)를 다시 세운 것이고, 순창의 그것은 신숙주의 아우 신말주(1429~1503)가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키면서 은둔생활을 하던 곳.. 2019. 10.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