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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2019/0631

아아, 만대루(晩對樓), 만대루여 병산서원 만대루의 추억 6·2 지방선거 날, 병산을 다녀왔다. 굳이 ‘병산서원’이라고 하지 않고 ‘병산’이라고 한 까닭은 그곳이 우리의 목적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서원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거기서 아내와 함께 하회마을 길을 탔다. 병산에서 강변과 산을 타고 하회마을로 가는 이 길은 십 리 남짓. 우리는 애당초 길을 되짚어 올 생각이었다. 하회에 닿았을 때 우리는 더위와 허기에 지쳐 있었고 이미 시간도 정오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아무 준비 없이 길을 나섰다는 사실을 뉘우치면서 우리는 마을 앞 장터에서 늦은 점심을 들었다. 부득이 딸애를 불러 우리는 병산으로 돌아왔다. 언제나처럼 서원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오후의 햇볕이 따가웠고 나는 만대루에서 잠깐 쉬어 가자고 했다. 우리는 음료수 .. 2019. 6. 30.
물돌이동[河回] 건너 화천서원과 겸암정사 유운룡의 겸암정사와 화천서원 병산에서 나오던 길을 곧장 풍천으로 향했다. 부용대 아래 겸암정사에 들르고 싶어서였다. 화천서원(花川書院)을 거쳐 겸암정사로 가는 길을 택했다. 병산서원이 서애 류성룡을 모신 서원이라면, 풍천면 광덕리(하회마을 건너편 마을)에는 서애의 형님인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을 배향한 화천서원이 있다. 힘의 균형은 부와 권력의 크기에 비례한다 1786년(정종 10)에 유운룡·유원지·김윤안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이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병산서원이 서원철폐령으로 살아남은 47개의 서원 중 하나라는 점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훼철 이후 100여 년간 서당으로 이어져 오던 이 서원은 1996년 묘우와 문루, 동서재와 전사청 등을 .. 2019. 6. 30.
밭, 혹은 ‘치유’의 농사 농사를 지으며 작물과 함께 농사꾼도 ‘성장’한다 오랜만에 장모님의 비닐하우스에 들렀다. 여든을 넘기시고도 노인은 자식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억척스레 몸을 움직여 한 마지기가 훨씬 넘는 밭농사를 짓고 계신다. 북향의 나지막한 산비탈에 있는 밭에는 모두 세 동의 비닐하우스가 있는데 두 동은 나란히 나머지 한 동은 맞은편에 엇비슷하게 서 있다. 예년과 같이 주가 되는 작물은 역시 고추다. 해마다 우리 집을 비롯하여 경산과 부산에 사는 동서, 처고모 댁의 김장용 태양초가 여기서 나는 것이다. 키가 훌쩍 큰 품종인데 가운뎃손가락 굵기의 길쭉한 고추가 벌써 주렁주렁 달렸다. 유독 장모님 고추만이 인근에서 가장 빠르고 굵고 실하게 열린다고 아내는 자랑인데, 아마 그건 사실일 것이다. 오른쪽 비닐하우스 위쪽은 .. 2019. 6. 29.
초농기(初農記), 첫 농사의 기록 학교 한귀퉁이의 텃밭에 지은 첫 농사 올봄에 학교 가녘에 있는 밭의, 한 세 이랑쯤의 땅을 분양받았었습니다. 물론 이 분양은 소유권이 아닌 경작권에 대한 것입니다. 분양을 받고서 한동안은 엄두가 나지 않아 버려두었다가 가족들과 함께 일구고, 비닐을 깔고, 고추와 가지, 그리고 상추 등속을 심었지요. 이게 제대로 자라기나 할까, 의구심을 버리지 못한 채. 그러나, 씨앗들은 주인의 의구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파릇파릇 움을 틔워 새잎으로 자라났습니다. 의심 많은 임자는 그제야 새잎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사실이 주는 기쁨에 조금은 우쭐대고 싶은 기분이었습니다. 출근할 때마다, 수업이 빌 때마다 거기 들러 그 녀석들의 모습을 확인하는 시간이 주는 보람은 남달랐지요. 농촌에서 나고 자랐지만, 따로 농사짓기의 경험이 없.. 2019. 6. 28.
조바심의 기다림, 백일 만에 ‘감자’가 우리에게 왔다 ‘생산’이면서 ‘소비’인 얼치기 농부의 텃밭 감자 농사 전말기 올해 처음으로 감자를 심었다. 빈 고향 집 손바닥만 한 텃밭에 소꿉장난처럼 지어내니 굳이 ‘농사’라 하기가 민망한 이 ‘텃밭 농사’도 햇수로 10년이 훨씬 넘었다. 늘 남의 밭 한 귀퉁이를 빌려서 봄여름 두 계절을 가로지르는 이 농사로 얼치기 농부는 얻은 게 적지 않다. 우리 내외의 첫 감자 농사 그게 고추나 호박, 가지 따위의 수확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아실 거다. 오가는 길이 한 시간 남짓이어서 아내는 늘 ‘기름값도 안 나오는 농사’라고 타박을 해대고, 내가 그게 기름값으로 환산할 일이냐고 퉁 주듯 위로하는 일도 1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감자를 심자는 제안은 아내가 했다. 연작이 해롭다며 지난해 고추를 심지 않은 밭에 무얼 심.. 2019. 6. 28.
능소화, 돌담에 기대어 등을 내 거는 꽃 능소화, ‘금등화(金藤花)’, ‘양반꽃’이라고 불리는 꽃의 계절 능소화(凌霄花)의 계절이다. 한여름엔 꽃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능소화는 다른 꽃들이 더위에 지쳐 허덕이고 있을 때 담장을 타고 하늘로 기어올라 주황색 고운 꽃을 피우는 것이다. ‘능소(凌霄)’란 ‘하늘을 뚫고 치솟아 오르다’의 뜻이다. 한여름 땡볕 속에 지치지도 않는 듯 하늘을 향해 휘감아 오르는 능소화의 모습에서 그런 이미지를 찾기란 어렵지 않다. 능소화는 달리 ‘금등화(金藤花)’라고도 부르는 모양이다. 등나무와 비슷하지만, 훨씬 아름다운 꽃을 피우니 ‘금(金) 자’를 붙여 금등화라 부른 것이다. 능소화는 꽃이 질 때도 깔때기 모양의 꽃송이가 시들지 않고 싱싱한 상태로 쏙 빠져서 아주 깔끔하게 떨어지는 특징이 있다. 빛깔이나 모양.. 2019. 6. 27.
여름철엔 달고 맛있는 참외가 좋다! 내가 즐기는 여름과일, ‘참외’ 예찬 “자신이 어떤 과일을 좋아해 즐겨 먹는지를 깨닫게 된 것은 근년의 일이다.”라고 하면 못 믿겠다고 의아해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도 믿기 어렵지만, 이는 특정한 과일에 대한 취향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일상에서 과일을 상복(常服)하지 못해서가 아닌가 싶다. 어린 시절의 귀한 과일들 가장 흔한 과일인 사과만 해도 그걸 일상에서 즐길 수 있게 된 것은 서른이 넘어 밥벌이하게 되면서였다. 어린 시절엔 사과도 귀하디귀한 과일이었다. 여느 날에는 구경도 못 할 그 과일은 제사상이나 차례상에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쯤에야 겨우 맛볼 수 있었다. 귤을 처음 먹어본 게 고등학교 시절 같으니 더 말할 게 없다. 요즘에야 흔해 빠진 과일이지만 그 시절엔 왜 그게 그리 귀했.. 2019. 6. 26.
공정무역, ‘아름다운 커피’ 이야기 직거래로 생산자에게 적정한 이윤을 보장하고, 세계화의 폐해를 줄이는 ‘공정무역 커피’ 커피를 처음 마신 게 언제였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고등학교에 다니던 때였을 터이다. 그냥 ‘이런 맛이구나!’ 하는 정도에서 그 묘한 빛깔의 음료를 들이켰던 것 같다. 당시만 해도 커피는 서민들의 일상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까닭이다. ‘커피를 즐기는 것’이 마치 중산층들의 품위 있는 삶의 징표처럼 이해되던 때였으니 말이다. 자판기 커피는 물론 없었고, 여유가 있었던 일반 가정에서는 즉석(인스턴트)커피를 ‘접대용’으로 마련하고 있었던 것 같다. 다 먹은 커피 병은 훌륭한 주방 용기로 활용되었고.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겨우 다방에 드나들기 시작했는데 커피와는 친해지지 못했다. 좋아서가 아니라 자릿값을 하기 위.. 2019. 6. 26.
한국전쟁 -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야 할 전쟁 [서평] 박태균 지음, 『한국전쟁』 박태균 교수가 쓴 을 읽은 것은 지난해 이맘때다. 커밍스의 을 날림으로 읽은 이래 십수 년 만에 나는 한국전쟁을 새롭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이 책은 지은이의 말처럼 ‘한국전쟁을 쉽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설명’하면서 전체적으로 그것의 전모를 정리해 준다. 이데올로기와 편견을 넘어 사실적으로 바라본 한국전쟁 이 책은 놀랍게도 한국 현대사 전공자가 일반인을 위해 정리한 최초(!)의 한국전쟁 관련서다. 이는 거꾸로 말하면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일 뿐만 아니라, 여전히 민족적 삶의 질곡으로 온존해 온 한국전쟁에 대한 일반인의 이해와 접근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한국전쟁은 전쟁을 몸소 겪었던 체험 세대는 물론이거니와 전쟁을 겪지 못했던 미체험 세.. 2019. 6. 24.
숲을 걸으며 숲의 선물, 명징한 깨우침과 서러운 행복감 국토의 70%가 산지여서 고개를 돌리면 어디서든 산을 만나는 나라에서 살면서도 정작 우리는 산에 대한 특별한 자의식을 갖지 못하고 사는 건 아닐까. 요즘 거의 날마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학교 뒷산을 오르내리면서 문득 든 생각이다. 이름난, 높고 깊은 산이 아닌 한, 그저 언덕을 면한 나지막한 ‘앞산’, ‘뒷산’에 둘러싸여 살다 보니 산을 달리 타자(他者)로 여기지 않게 된 것일까. 산은 땔감을 구하거나 흉년의 주림을 달래주는 갖가지 열매와 뿌리를 내는 구황(救荒)의 땅이었고, 죽어서 그 고단했던 육신을 묻는 공간이었으니 구태여 산을 일상의 삶과 구분할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 뒷산은 안동의 주산(主山)이라는 해발 252.2m의 영남산(映.. 2019. 6. 23.
사라진 모래톱, 낙동강 제1경 상주 경천대(擎天臺) 낙동강 제1경, 모순형용의 ‘녹색성장’, 그 민낯 지난 주말 상주 경천대에 다녀왔다. 토요일 아침, 뭔가 허전해서 어디라도 다녀올까 했더니 아내가 군말 없이 따라나서 준 것이다. 경천대로 떠난 것은 얼마 전 거기 나들이를 다녀온 동료들의 얘기를 듣고서였다. 내가 경천대를 처음 찾은 것은 1990년께였고 마지막으로 거길 다녀온 것은 1995년이었다. 거기서 베풀어진 백일장에 학교 아이들을 데리고 간 것이다. 5월 말이었던 듯한데, 오르는 산길에 무르익고 있었던 밤꽃 향기가 아련하게 떠오른다. 20년 만에 찾은 경천대 경천대와 이어진 무슨 옛 기억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굳이 경천대로 떠난 것은 4대강 사업 뒤에 경천대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낙동강 줄기에서 벌어진 이 사업 이후 내가.. 2019. 6. 23.
시골 벽화마을엔 우리 자신의 모습이 있다 칠곡군 약목면 남계2리 벽화마을 *사진은 클릭하면 큰 사이즈(1000×664)로 볼 수 있음. 지난주에 벽화마을로 알려진 칠곡군 약목면 남계2리를 다녀왔다. 구미에서 거기 닿는 데는 채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약목을 찾은 건 거의 수십 년 만인 듯했다. 예전에는 구미에서 왜관으로 가려면 북삼과 약목을 거쳐야 했지만, 낙동강 강변에 우회도로가 만들어지면서 거길 지나갈 일이 없어지면서 그렇게 되었다. 문득 해직 시절에 동료들과 고물 승합차를 타고 약목의 남계지에 들렀다가 차가 진구렁에 빠져 고생했던 기억이 새삼스러웠다. 그때 함께 했던 ‘3장 1박’ 중에서 한 친구는 이미 고인이 되었다. 우리가 건너온 세월이 만만찮다는 얘기다. 칠곡군 약목면 남계2리 벽화마을 남계리가 벽화마을이라는 것은 지난 4월에 김천.. 2019. 6.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