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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행복한 책 읽기

잃어버린 시절, 그 삶과 세월 되돌아보기

by 낮달2018 2019.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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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최규석 만화 <대한민국 원주민>

▲  최규석, 창비, 2008

전적으로 실수로 산 책

 

어릴 적엔 누구나 만화에 흠뻑 빠져서 지낸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만화를 읽는 사람은 흔치 않다. 어른이 되면서 만화가 지어놓은 허구의 세계를 졸업한 것일까. 지금도 여전히 도서 대여점에서 만화를 빌려다 보는 친구를 보면서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당연히 만화책을 사는 일도 없다. 그건 오래된 고정관념일지도 모른다. 굳이 읽어야 하는 만화라면 도서관에서 빌려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우연히 만화책을 한 권 샀다. 전적으로 실수다. <한겨레>의 서평을 건성으로 읽었던가. 온라인 서점으로 주문한 몇 권의 책 속에 최규석 만화 <대한민국 원주민>(이하 <원주민>)이 끼어 있었다. 나는 이 책이 만화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잠깐 망설였지만, 내용은 괜찮으리라고 짐짓 위로하며 책을 책상 위에 던져두었다. 심심파적으로 두어 편의 단편을 읽다 말고 나는 어럽쇼,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재생지로 만든 책 속의 만화가 만만치 않을 만큼의 무게를 갖고 있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나는 넌지시 집의 아이들에게 그 책을 밀어 놓았다. 며칠을 기다려도 아이들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책을 마저 읽은 것은 며칠 전이다. 책 속표지에 갈겨놓은 내 서명은 7월 25일 거니, 한 달 반쯤이 좋이 지난 셈이다. 지난 일요일 오후, 나는 누워서 예의 책을 읽다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후에 나는 그예, 책을 내려놓고 잠깐 눈물 바람을 하기도 했다.

 

소설이 사람을 울리듯 만화가 독자를 눈물짓게 하는 게 이상할 일은 없다. 그것은 모든 서사(敍事)가 가진 울림이니 말이다. 최규석의 만화 <원주민>은 가난한 한 시골 가족의 삶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을 돌이키게 하면서 독자의 누선을 자극하는 책이다.

 

‘원주민’이라면 책 표지 그림처럼 새 깃털로 요란한 머리 장식을 한 아메리카 인디언을 떠올리겠지만, 기실 작가가 그리는 ‘대한민국 원주민’은 작가의 부친을 포함한 가족들이다. 하얗게 센 머리를 가지런히 빗어 넘긴 단정한 이목구비의 부친은 낫 앞에 앉아 손을 맞잡고 있는데 그가 뜬 실눈, 굳게 다문 입매가 예사롭지 않다.

 

그들은 세상의 변화에 무관하게 살아오다 ‘느닷없이 닥쳐온 파도에 밀려 끝없이 떠돌아야만 했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을 키웠던 곳은 흔적을 찾을 수 없이 자취를 감추었고 그들의 일상이었던 것들은 이제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게 되어버린 사람들’을 작가는 ‘원주민’이라고 부른다.

 

대한민국 원주민, 느닷없는 변화에 끝없이 헤매야 했던 사람들

▲  똥장군을 진 농부  ⓒ  최규석

<원주민>은 70년대의 가난을 뚫고 왔던 작가의 가족사를 펼쳐 놓으면서 그게 우리 ‘원주민’의 삶이고 역사가 아니냐고 독자에게 묻고 있다.

 

그런데, 가만있어 봐, 이거 뭔가 착오가 있는 게 아닌가? 많은 독자는 잠깐 헛갈릴 수도 있겠다. 이게 70년대의 이야기라고?

 

작가는 77년생, 경남 진주 출신이다. 77년도라면 박정희의 새마을운동이 정점에 이른 때다. 그해 5월에 머리를 박박 밀고 입영 열차를 탔던 나는 그가 펼쳐 놓는 이야기에 시차 적응이 잘되지 않는다. 60년대의 가난이라면 내가 익히 보고 들은 것이지만, 70년대 중반이라면 좀 다르지 않은가. 경남 진주에 그런 ‘깡촌’이 있었다고? 여전히 나는 시차 적응이 안 돼 어지럽다.

 

작가가 쓴 ‘책머리에’에는 나이 지긋한 농사꾼이 똥장군을 지고 서 있다. 그것은 이 찬란한 21세기의 벽두에도 여전히 70년대 어느 두메산골에 머물러 있는 작가의 정서를 넌지시 대변한다.

 

“나에게 세상은 늘 새롭고 낯선 것이었다. 무엇도 익숙한 것은 없었다. 나는 그것이 그저 이 사회가 너무나 빨리 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일제 강점기에 씌어진 소설에서 성탄절에 유치원생들이 연극을 하는 대목을 읽고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20세기 후반에 태어난 나조차 텔레비전에서나 친구들의 이야기로만 듣고 보았던 어색한 풍습이 그 까마득한 시절에도 누군가에게는 일상이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중략)

내 누이들의 이야기를 하면 도시에서 자란 그 또래의 사람들은 신기해했다. 어째서. 농활을 가고 노동현장에 투신할 만큼 그러한 이웃들에게 특별한 애착을 가졌던 세대들이 어째서 내 누이들을 신기해하는지 나는 혼란스러웠다.”
     - 책머리에

 

가난 때문에 제때 치료 못 해 죽은 아이들

▲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아비. ⓒ 최규석

작가의 회고를 통해 펼쳐지는 풍경을 통해 독자는 70년대 궁벽한 시골 마을로 가는 타임머신을 탈 수 있다. 모두 58편의 단편 속에 그려지는 그 시절의 풍경에 녹아 있는 것은 가난함 가운데서도 잃지 않았던 삶에 대한 정직과 성실이고, 근대화 이전, 한국인이 지녔던 정신의 원형질 같은 것이다.

 

가난 때문에 제때 치료하지 못해 아이들이 쉽게 죽었던 그 시절, 죽은 아이를 안고 하염없이 앉아 있는 아비, ‘아는 또 낳으모 된다’며 그를 위로해 주는 이웃 사람, 그들은 막걸리를 치고 돌무덤을 짓는다. 그 아린 풍경을 닫는 작가의 논평은 쓸쓸하다.

 

“나는 다만 운이 좋은 생명이었다.”(‘죽는 아이 1’)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마음이 다르겠는가. 태어나 며칠 만에 잃은 누나 얘기를 하면서 슬펐냐는 작가의 물음에 돌아앉은 어머니는 그렇게 말한다. 그것은 가난과 무지 때문에 한 생명체, 자식 하나를 거두지 못한 어미의 부끄러움이고, 한 인간의 뼈아픈 고백이다.

 

“다른 거는 모르겄고 그리 부끄럽더라꼬. 에미가 돼서 아를 직인께 넘 보기가 부끄럽어서 사람을 못 보겄데.” (‘죽는 아이 2’)

 

작가는 어머니의 기억을 통해 해방공간의 이념 갈등의 일단을 보여주기도 한다. 비 오는 날이면 동네에 내려와 양식과 옷가지를 쓸어가는 ‘산사람’들의 얘기는 이념이 아니라 그들이 썼던 낯선 어휘로 기억된다. 그들은 횃불을 켜는 데 쓸 ‘소캐’를 ‘솜’이라고 말했고, 그것을 ‘빨개이’의 언어로 이해한 것이다. (‘산사람’)

 

새로운 어휘를 받아들이는 데 익숙하지 못한 시골 사람들의 이야기는 “내 선도부 됐다”는 누나의 말에 “순두부? 아가 언캉 물러논께네 그리 부르는 갑지?”로 반응하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압권을 이룬다. 그러나 그 어머니의 입에서 ‘B-29’, ‘호죽기’ 같은 폭격기 이름이 자연스레 흘러나오기도 한다. (‘무경험자의 한계’)

 

그 시절의 가난한 삶 속에서도 따뜻하게 살아오는 인정스러운 풍경도 있다. 고입 준비 때문에 읍내에 보낸 맏이의 나무 때는 방에 쓸 갈비(솔가리) 한 짐을 들고 나선 어머니, 그러나 버스는 그냥 도리질하며 떠나 버린다. 그러나 고마운 이는 어디에도 있는 법, 그 짐을 읍내까지 실어다 주고 떠난 화물차 운전수를 향해 어머니는 오래 기도한다.

 

“늘 무사하라고, 저리 착한 사람 행복하게 잘 살게 해 달라고…….”(‘기도’)

 

희생의 으뜸은 예외 없이 누이들의 것

 

한 가족의 가난한 삶, 그 헐벗은 역사에 어린 희생의 으뜸은 예외 없이 누이들의 것이다. 작가의 누나는 넷. 라면이 귀하던 시절, 라면 끓일 때 국수를 함께 넣곤 했는데, 늘 라면은 작가나 작가의 형 차지였다. 그것은 ‘특권층으로서의 자각을 시작’한 작가에게는 ‘비극적 악순환’으로 인식되었지만, 누이들 처지에서는 설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우리는 맨날 국시만 주고! 그때 올매나 서럽었는고 아나?”(‘다행인가?’)

 

그녀들이 감당한 희생이 어찌 그것뿐이었겠는가. 장남, 아들에 대한 특혜는 곧바로 그녀들의 희생으로 나타나는 것. 장녀는 오빠가 진학하면서 부모님이 읍내로 나가자 초등학교 때부터 살림을 하면서 동생을 거두었고, 중학교 진학에 위기를 겪기도 한다.

 

어른도 없는 시골집을 꼭꼭 여며두고 불안스레 동생을 보살폈던 누이에게 밤은 얼마나 길었을까. 산업체 부설학교에 다니다 노동절에 나온 큰 빵을 동생들에게 주려고 가져온 누이에게 삶은 얼마나 무겁고 고단한 것이었을까.

▲  작가의 셋째 누나 .  ⓒ  최규석

누이들의 삶은 만화가 아니라 삽화 한 컷과 함께 그들의 내밀한 목소리로 드러나기도 한다. 누이 중 유일하게 대학을 나왔으나 남편과 사별한 막내 누나는 그래도 ‘말년 복’을 기대하면서 살아가고, 최저임금 백만 원을 받으며 사는 셋째 누나, 맞선으로 만난 남편과 함께 떡방앗간을 꾸려가고 있는 둘째 누나의 삶도 마찬가지다.

 

“꿈? 글쎄… 별로 그런 거 생각 안 해봤다. 공부도 못 했고… 그냥 큰언니처럼 되고 싶었다. 얼마 전에 애들 유치원에서 학부모 심리교육 같은 걸 했는데 선생님이 어릴 때 제일 행복했던 기억을 적어내라대? 다른 엄마들은 막 웃으면서 서너 개씩 적어내는데 내는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하나도 없더라.” - 셋째 누나

“밥하모 쌀 쪼깨이 하고 보리만 쌔리 너갖고 아부지하고 오빠하고는 쌀밥 주고 막내 둘이는 쌀 좀 섞이고 우리 가운데 딸 서이는 시커먼 보리만…… 아부지 밥 남구모 그거 서로 묵을라꼬…… 참내. 안 그랬나? 옴마, 아나 모리나?” - 둘째 누나

 

그 으뜸 희생의 또 으뜸은 큰누나다. 뭘 하든 자신이 잘해야 ‘동생들도 따라올 거란 생각’으로 살았던 큰누나는 출산의 고통마저도 맏이가 능히 견뎌야 할 것으로 이겨낸 장한 누이다.

 

“그래 내가 아들 둘 낳을 때도 너무 아파서 제왕 절개하고 싶은데도 동생들도 앞으로 겪을 일인데 내가 못 참아서 되겄나 하면서 끝까지 참다가 이래 입이 튀 나왔다 아이가. 그란데 이런 몸도 모르고 문디 겉은 것들이 싹 다 수술하대.”

 

“묻어두고 가버리기엔 서러운 이야기들”

 

작가의 가족사를 따라 독자들은 70년대와 그 전사(前史)를 섭렵하며 때로는 가슴 먹먹한 아픔을, 때로는 아련한 추억을 떠올릴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물론 한갓진 복고나 감상이 아니라 원주민들의 삶과 역사가 환기하는 우리네 삶의 정체성과 동일성에 관한 확인이다. 작가는 마지막 단편 <원주민>에서 그것이 어떤 형식으로 드러나는지를 넌지시 선보인다.

▲ 작가의 부모님 ⓒ 최규석

제법 정원 꼴을 갖추었던 집의 마당이 ‘남새밭’이 되고, 베란다는 ‘고추 말리는 데’가 되고, 시멘트 기둥에는 메주가 매달리는 등의 변화는 시나브로 진행된다. 노인들의 바지런은 동네 국유지를 놀려두지 않지만 그들의 불법경작은 관으로부터 금지당한다. 그걸 섭섭해하면서 나누는 부모님의 대화는 그들 삶의 정체성을 아주 분명하게 확인해 주는 것이다.

 

“서분해서 우짜꼬…….”
“서분키는 뭐시……, 비료 값도 안 나오는 거 씨언하이 됐지.”

 

작가의 말대로 이 책에 실린 이야기란 “묻어두고 가버리기엔 서러운, 가슴 깊은 데 박힌 돌 같은 이야기들”이다. 그는 이를 가리켜 별것도 아닌 과거를 늘어놓는 ‘노출증 심한 청년의 주접’일지도 모르겠다고 손사래를 친다.

 

그러면서도 도시 곳곳에서 발견되는 ‘텃밭들’과 ‘논밭이었던 찜질방과 민가였던 오리 백숙집들’, 그리고 ‘치어 죽은 개를 자전거 짐칸에 싣고 가며 입맛 다시는 노인’을 ‘되돌아보도록 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리고 며칠 후다. 아들 녀석이 반색했다. 뒤늦게 책을 읽었던 모양이다. 알아요, 이 작가…,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쥬>를 읽었지요. 아주 슬픈 이야기예요……. 나는 망설이지 않고 인터넷서점의 내 서재 보관함에다 그의 전작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쥬>를 꽂아 넣었다.

 

 

2008. 9. 19. 낮달

 


**기사는 <죽어가는 아이들, 나는 다만 운이 좋았다>는 제목으로 실렸다. 위의 제목은 맨 처음에 붙인 것이다. 송고할 때의 제목은 <찜질방과 오리백숙집이 ‘논밭’이었던 때를 아시는가>였다. 어떤 제목이 나은지는 잘 모르겠다. 제목은 얼마나 중요하고, 얼마나 중요하지 않은가.

 

스크랩 기능이 온전하지 않아 성가시긴 하지만 다시 편집해 올렸다. 그러면서 한 번 더 읽었는데 여전히 내가 읽었을 때의 감흥이 살지 않는다. 그림 이야기는 일부러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 취향에는 썩 맞다. 그 터치의 사실성이 특히 그렇다. 최규석은 좋은 작가인 것 같다.

 

 

죽어가는 아이들, 나는 다만 운이 좋았다

[서평] 최규석 만화 <대한민국 원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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