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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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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사(孤雲寺), 석탄일 부근

by 낮달2018 2021.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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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운산 고운사. 경북 의성군 단촌면에 있다.

지난 화요일에 고운사(孤雲寺)에 들렀다. 작년 9월에 들른 후 여덟 달 만이다. 푸른 빛은 다르지 않았으나 지난해의 그것이 ‘묵은 빛깔’이라면 올해 다시 만난 것은 ‘새 빛깔’이다. 지난해 찍은 사진과 견주어 보면 새 빛깔은 훨씬 맑고 선명해 보인다.

 

등운산(騰雲山) 고운사는 경상북도 북부 지역의 60여 말사를 거느린 교구 본사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소박하고 고즈넉한 도량이다. 약 1Km에 이르는 해묵은 솔숲길이나, 여러 채의 낡은 단청을 한 전각들이 산 밑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이 절집의 정경은 평화롭고, 소박해 보인다.

 

입장료를 받지 않는 것, 수행도량답게 인근에 밥집 하나 없는 것은 이 절집이 가진 미덕 중의 미덕이다. 절집으로 들어가는 솔숲길은 예와 다름없이 아름답고 고적했다. 길가의, 제멋대로 뒤틀리고 휜 소나무들 사이로 잡목이 빽빽이 들어찼고, 때 이른 단풍이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이 비포장의 구불구불한 황톳길을 10여 분 따라가면 고운사의 일주문인 조계문(曹溪門)을 만난다.

 

▲ 솔숲 길가에 핀 미나리냉이. 이름과는 달리 청초하고 기품 있는 꽃이다.

조계문은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경계로는 그 규모가 작다 싶은 일주문이다. 그러나 크지 않은 팔작지붕을 받치고 선 양쪽, 각각 다섯 개의 아름드리 기둥과 그 바깥쪽 네 귀를 받치고 있는 길고 가는 기둥 등의 구조가 매우 특이하면서도 아름답다.

 

▲ 고운사 조계문.

계곡 위로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다시 나무 기둥을 세워 건물을 올린 가운루(駕雲樓)는 최치원의 명성과 함께 고운사를 뭇 절집과 다르게 기억게 하는 특이한 누각이다. 길이가 16.2m, 최고 높이가 13m인 큰 누각인데도 적당히 굽고 뒤틀린 거친 나무 부재들과 누각을 떠받치는, 높이가 다른 기둥들이 보여주는 인상은 위압적이지 않다.

 

▲ 고운사 가운루.

고운사에서 내가 가장 아름답다고 여기는 전각은 연수전(延壽殿)이다. 절집에 어울리지 않게 솟을대문에 사방에 담을 쌓은, 이 건물은 이름 그대로 임금의 강녕(康寧)을 기원하던 곳이다. 나는 절집 안에 자리 잡은, 여염집같이 담으로 둘러싸인 전각들에 묘하게 끌린다.

 

황악산 직지사의 망일전이나 서별당, 조계산 선암사의 무우전이나 해천당이 바로 그런 공간이다. 이들 의 공통점은 여느 전각처럼 뭇 중생들의 기림을 요구하는 듯한 위압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담에 둘러싸여 전각이 실제보다 작아 보이는 까닭으로도 볼 수 있으나, 내게는 오히려 그들이 자기 영역을 줄임으로써 자신을 낮추는 것으로 느껴지곤 한다.

 

예전처럼 연수전은 만세문 안에서 겹처마 팔작지붕을 조신하게 펴고 있었다. 만세문 왼편에 불두화가 하얗게 피어 있었고 뒤뜰 담장 너머엔 이른 붉은 단풍잎이 빨갛게 타고 있었다. 연수전은 중앙에 조그마한 방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마루가 깔렸고, 굵지도 가늘지도 않은 여러 개의 두리기둥이 지붕을 받치고 선 구조다. 낡은 단청의 수수하고 은은한 빛깔은 이 전각이 왕실의 원당(願堂)이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 고운사 연수전.

새로 지은 대웅보전 앞 남편 산기슭에 나한전과 나란히 선 요사채도 예전 그대로다. 정면 5칸, 측면 세 칸의 작지 않은 건물이지만, 은은한 황토벽과 단청 없는 맨살의 나뭇결이 검박(儉朴)하다. 왼편 세 칸에 걸친 마루에 가득 고인 것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적요(寂寥)다.

 

▲ 고운사 요사.

하산길, 길가에 줄지어 선 오래된 나무 그림자가 무거웠다. 단풍잎이 핏빛으로 선연했고, 나무와 숲 사이로 구불구불 사라지는 길이 하얗게 몸을 뒤척이고 있었다. 그 숲길의 끄트머리에서 의좋게 팔짱을 끼고 절집으로 오르는 두 여인을 만났다. 무심히 그들을 스쳐 지나와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하오의 산사, 그 고적한 숲길 저편에 그네들의 모습은 조금씩 멀어지다 외로운 실루엣으로 어느 순간 하얗게 사라져 버렸다.

 

2007. 5. 18. 낮달

 

* 지난해 9월의 고운사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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