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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풀꽃 이야기

씀바귀와 고들빼기, 혹은 이마를 맞댄 ‘민초’의 삶

by 낮달2018 2021.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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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혼자 자라는 봄꽃, 씀바귀와 고들빼기

▲ 씀바귀의 꽃잎은 고들빼기에 비하면 성긴 편이고, 꽃술은 검은빛을 띤다.
▲ 고들빼기의 꽃잎은 씀바귀에 비해 빽빽한 편이고 꽃술도 꽃빛과 거의 같다.

아파트 주변에도 봄꽃이 여럿 피어 있다. 심어서 가꾼 꽃들 한편에 저절로 자라 군락을 이룬 꽃, 씀바귀와 고들빼기가 지천이다. 얼른 봐서는 잘 구분도 되지 않을 만큼 씀바귀와 고들빼기는 서로 닮았다.

 

둘 다 국화과의 식물인데 우리 민족은 예부터 씀바귀와 고들빼기를 식용해 왔다. 씀바귀는 이른 봄에 뿌리와 어린순을 나물로 먹는다. 우리 지역에선 씀바귀를 ‘신냉이’라 불렀다. 씀바귀의 줄기나 잎을 자르면 흰 즙이 나오는데, 이 즙은 쓴맛이 난다. 씀바귀를 ‘고채(苦菜)’라 부르는 까닭이다.

 

고채 씀바귀, 그 쓴맛을 깨닫게 한 나이

 

어릴 적에는 나는 그 쓴맛을 꺼려서 신냉이를 잘 먹지 않았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그 쓴맛이 입맛을 돋우는 묘한 풍미가 있다는 걸 알았다. 입맛은 나이를 먹으며 변한다. 그 쓴맛이 한고비를 넘기면 은은한 뒷맛으로 이어진다는 걸 깨우쳐 주는 것은 놀랍게도 나이이다.

 

▲ 조해일의 중편소설 <아메리카> 현재 품절 상태인 책이다.

‘씀바귀’라는 이름을 마음에 새기게 된 것은 고교 때 읽은 소설가 조해일이 종합지 <세대>에 발표한 중편소설 ‘아메리카’(1972) 덕분이다. 기지촌 여성들의 삶을 다루고 있는 이 소설에 등장하는 성매매 여성들의 자치 조직 이름이 ‘씀바귀회’였다.

 

동거하던 미군에게 목 졸려 죽은 성매매 여성의 장례식 장면이 서늘하게 가슴에 남아 있다. 화장을 지우고 소복한 동료들이 뒤따르는 쓸쓸한 장례식의 상엿소리에 담긴 것은 끝내 기지촌에서 삶을 마감해야 했던 서럽고 고통스러운 인생유전이었다.

 

고향 인근에 미군기지가 있었는데 그 후문 주변에서 미군들에 기대어 살던 젊고 예쁜 누나들의 모습을 겹치며 나는 씀바귀의 뜻을 남다르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지금도 씀바귀를 보면서 나는 이미 호호 할머니가 되어 버렸을 그 시절의 누나들을 생각하곤 한다.

 

이팔청춘 호시절에 니는 어이 홀로 갔노.

삼신산 불로초를 어데 가면 구하겠노.

봄은 가면 또 오는데 이 길 가면 왜 못 오나.

화류생활 멫멫 년에 남는 건 이 길뿐가.

북맹이 멀닥 해도 내 집 앞에 북맹일세.

씀바구야 씀바구야, 어찌 니만 밟히쌓노.

부모 형제 소식 알면 땅을 치고 통곡켔네.

니 팔재나 내 팔재나 갈보 팔재 허맹쿠나.

그란해도 설운 목숨 비명 횡새 웬말이고.

배고파 몸판 것이 그다지도 죄란 말가.

양갈보라 왜 웃으며 양공주라 왜 침 뱉소.

서럽고도 설운 목숨 씀바구야 잘 가거라.

더럽고도 더런 팔재 훌훌 털고 잘 가거라.

 

- 조해일, ‘아메리카’ 중에서

 

기지촌 여성들은 야생에서 홀로 피어 뭇 발길에 밟히면서도 질긴 생명을 이어가는 이 들꽃을 자신들의 신산한 삶으로 이해했다. 비록 서민들이 즐겨 먹긴 하지만 여느 나물과 달리 강한 쓴맛을 지닌 씀바귀는 그들의 삶과 다르지 않았던가.

 

김치로 담가 먹는 고들빼기

 

고들빼기도 같은 국화관데 어린잎을 김치로 담가 먹는다. 고들빼기는 쓴맛과 독기가 너무 강하므로 일주일에서 보름간 물에 담가 쓴맛을 뺀 뒤에 양념을 많이 해서 김치로 담근다. 고들빼기김치는 쌉쌀한 맛이 독특해서 궁중에 진상되기도 하였다.

 

내가 처음 고들빼기김치 맛을 보게 된 것은 성년이 되어서이니 우리 지역에는 고들빼기김치를 담가 먹는 전통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고들빼기김치는 갓김치·죽순 김치와 함께 전라도 게 유명하다. 요즘은 가끔 아내가 고들빼기김치를 담그는데 그 ‘쌉싸름한’ 맛이 오래 혀끝에 머물곤 한다.

▲ 씀바귀(왼쪽)의 잎은 가장자리가 매끈하며 폭이 좁고 고들빼기(오른쪽)의 잎은 줄기를 뚫고 나온 것처럼 보인다.

씀바귀와 고들빼기는 꽃이 비슷해서 분간하는 게 쉽지 않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둘은 다르다.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꽃술과 잎에 있다. 씀바귀의 꽃술은 검은색인데 고들빼기는 노란빛이다. 잎도 분명하게 다르다.

 

씀바귀의 잎은 톱니 없이 가장자리가 매끈하고 폭이 좁아 길쭉하다. 그러나 고들빼기 잎은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으며 줄기를 감싸고 있다. 마치 줄기가 잎을 뚫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뿌리도 서로 다르다. 고들빼기는 무처럼 김치를 담가 먹을 수 있는 통으로 된 뿌리지만 씀바귀는 무침을 해 먹을 수 있는 실뿌리이다.

▲ 씀바귀와 고들빼기는 이마를 맞대고 살아가는 민초들처럼 한자리에서 넉넉하게 어울려 핀다. 사진은 시골집 마당에 돋은 씀바귀.

씀바귀와 고들빼기는 잘 어울려 피어나므로 한 자리에서 씀바귀와 고들빼기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둘 다 식용으로 쓰이지만, 여느 나물과는 달리 쓴맛을 지니고 있어 그리 대접을 받는 풀이 아니다. 그것도 고만고만하게 이마를 맞대고 살아가는 민초들의 그것과 닮았다.

 

화단 앞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씀바귀와 고들빼기를 담다 말고 바람에 흔들리는 꽃잎들을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오른편의 산자락의 아까시나무에서 풍기는 활짝 핀 꽃향기가 싱그럽다. 어느새 슬슬 여름이 오고 있다.

 

 

2017. 5. 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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