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길 위에서

스타, 팬, 그리고 ‘한겨레 의견광고’

by 낮달2018 2021. 4. 29.

▲ <한겨레> 생활광고란에 난 개인 축하 광고와 연예인 광고

일간지에 이른바 ‘의견광고’가 처음 실린 신문은 아마 <동아일보>였을 것이다. 1974년 연말, 광고 해약 사태가 일어나면서 <동아일보>가 백지 광고를 내보내자 시민들의 이를 격려하는 광고로 범국민적 언론자유 운동을 벌인 것 말이다.

 

형식은 다르지만 의견광고가 다시 지면에 등장한 건 <한겨레신문>에서였던 것 같다. 내가 기억하기에 그것은 1989년 여름, 전교조 관련으로 교사들이 대량 해직되던 시기에 이들에 대한 지지·격려 광고로 재등장하였던 듯하다. 그 무렵 내 고교 후배들이 낸, 해직된 선배 셋을 지지하는 광고와 해직된 학교의 제자들이 낸 광고가 <한겨레>에 실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 20년, 다른 신문은 어떤지 몰라도 한겨레의 의견 광고는 나름대로 진보를 거듭해 왔다. 정치 사회적인 의견 광고뿐 아니라 일반시민들의 축하 광고까지 싣게 되면서 해당 광고면은 아예 ‘생활광고’라는 이름으로 정착하기에 이른 것이다.

 

생활광고에는 기존의 의견광고는 물론이거니와 축하 광고도 한몫한다. 그예 생일이나 결혼 같은 사적 축하도 공개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연인들끼리의 축하를 겸한 사랑의 고백, 부부끼리의 결혼 자축, 태어난 아이에게 바치는 사랑조차 광고란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다.

 

그런 광고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우리 시대의 풍속도가 세대를 바꾸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사랑의 고백이나 확인, 특별한 날에 대한 축하는 사적일뿐더러 개인의 매우 내밀한 영역이다. 그러나 이 21세기의 연인들과 부부, 벗들은 그 사적 확인과 축하의 촛불을 공개함으로써 그것을 공개적 영역으로 밀고 들어간다.

 

<한겨레> 지면에서 만나는 광고에는 연예인 팬클럽의 광고도 심심찮다. 생활광고란에 가끔 연예인 광고가 나는 것을 나는 무심히 흘려보았었다. 이런 광고를 누가 보는가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난달 31일, <한겨레> 15면에 난 전면 광고를 보고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것은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서 윤지후 역할을 맡은 김현중 팬들이 드라마 종영에 맞춰 낸 광고다. 그것은 ‘윤지후와의 만남을 이어준 꽃보다 남자의 봄,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문구 아래 ‘Good-Bye 윤지후’라는 굵직한 글씨가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대중의 사랑을 먹고 사는 연예인들이 존재하는 한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는 팬들과 그들의 열광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저마다의 방법으로 대중 스타를 사랑하는 방식도 그간 숱한 변화를 겪어 왔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팬들은 개별적 존재에서 조직화한 대중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특히 쌍방향 소통이 가능한 인터넷의 발달이 그것을 빠른 속도로 변화시킨 게 아닌가 싶다.

 

예의 광고주는 ‘김현중을 아끼고 사랑하는 팬 일동’이다. 글쎄 해당 면에 실은 전면 광고가 얼마짜리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이 광고가 조직화한 팬클럽의 막강한 힘을 보여준 사례라고 생각한다. <디시인사이드> ‘꽃보다 남자’ 갤러리 등을 중심으로 모인 이들 팬은 전면 광고를 싣기 이전에도 <꽃보다 남자> 종영을 앞두고 아름다운재단에 350만 원을 기부해 ‘개념’ 팬클럽으로 여러 매체에 보도되기도 했던 모양이다.

 

연예인 팬클럽에 대한 대중의 시선은, 한때 이들을 ‘오빠 부대’나 ‘누나 부대’라 부르기도 했을 만큼 그리 곱지 않았다. 이들은 쓸데없이 시간과 돈을 소비하는 ‘넋 나간 젊은이’쯤으로 치부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삶’과 ‘놀이’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면서 그것은 ‘젊은이’들뿐 아니라, ‘늙은이’들도 팬으로 편입시키기 시작했다.

 

기실 이 글을 쓰고 있긴 하지만, 대중문화, 특히 연예인들의 팬 문화에 대한 시각은 나 역시 무척 보수적이다. 청소년기 시절에 나도 특정 연예인을 좋아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것은 ‘열광’이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미지근하기 짝이 없는 형식이었고, 성년이 되면서 대중문화와는 점차 멀어졌다.

 

그래서였던가.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의 스타에 대한 열광이나 경도를 은근히 얕잡아 보기조차 했다. 연예인들의 자취를 따라 부나비처럼 배회하는 소년 소녀들을 마치 ‘텅 빈 머리를 스타와 관련한 잡다한 정보로 가득 채우고 있는 멍청이’처럼 바라보기도 했다.

 

공개방송마다 객석을 가득 채우고 있는 방청객들, 이른바 ‘게릴라 콘서트’에 모인 자발적 청중들을 삐딱한 경이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시간이 남아돌아 한낮의 방송국 공개홀에서 시간을 죽이든, 방송국과 방송 프로그램의 제작과정을 구경하려고 찾아온 이든, 이들이 없으면 ‘꽉 찬 그림’은 불가능하다. 좋든 싫든 그들을 프로그램 구성의 주체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10대의 스타 숭배의 결과이든, 4, 50대의 소일과 흥미를 위해서든 이들의 존재는 대중문화를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주체라고 보아야 옳다. 이들의 존재를 대중문화의 주체가 아니라, 마치 종속변수처럼 바라보는 것은 ‘연예’를 ‘딴따라’라 부르는 대중문화에 대한 폄훼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한겨레> 지면에서 젝스키스, 빅뱅의 대성, 소녀시대의 멤버들, 개그맨 정형돈을 만나게 하는 이들, 잘 조직된 팬클럽은 따라서, 이제 더는 한갓진 ‘오빠 부대’나 ‘누나 부대’가 아니다. 그들은 대중문화의 진화나 발전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아이콘일지도 모른다.

 

이들은 비록 특정한 연예인에 대한 선호만으로 조직된 불특정 다수의 대중이지만, 정치·사회적으로 일정하게 각성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다. 또 주류의 문화에 대한 민중적 대응력을 스스로 길러가는 자생력도 갖추고 있다.

 

미디어 전문 언론 ‘미디어스’(http://www.mediaus.co.kr/)는 연예인 광고와 관련한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특히 연예인 팬클럽 광고는, 한국 사회에서 신문이 읽을거리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사적인 의사를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공간으로 확장할 수 있는 여지를 보여준다. 신문을 통해 일방적으로 정보를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공간이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지면을 통해 밝힌다는 점에서 “‘소통의 장’을 한겨레가 마련해 주고 있다”는 한겨레 쪽의 주장은 일리가 있어 보인다.”

 

사적인 의사 표현의 공간 확장으로서든, 소통의 장으로서든 한겨레의 생활광고가 갖는 의미는 작지 않다. 나는 이제야 연예인 팬클럽과 그들의 광고와 같은 공개적 활동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대중문화의 영역을 조금씩 넓혀가고 있다는 걸 인정하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성격은 확연히 다를지 모른다. 그러나 지난해 촛불집회 때 인터넷 다음카페 ‘소울드레서’와 ‘82쿡닷컴’ 등에서 <경향신문>과 <한겨레>에 낸 지지 광고와 연예인 팬클럽 광고는 서로 넘나들 수 있는 성격을 공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패션 동호회 카페인 ‘소울드레서’나 요리·생활 사이트인 ‘82쿡닷컴’이 어느 날 선이 분명한 정치·사회적 태도를 드러내는 것은 사회적 이슈에 대한 시민 일반의 관심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예전과 달리 요즘 연예인들은 특정 이슈에 대한 호오나 의견을 비교적 적극적으로 표명한다. 말하자면 ‘청맹과니 광대’에서 ‘개념 있는 예술가’로의 변화다.

 

따라서 이들을 지지하는 팬클럽이 같은 입장과 의견을 표명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편으론 탈정치화로 가는 듯하면서도 자기 의견을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는 새로운 세대의 특성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한겨레> 생활광고를 장식하는 의견광고는 자신의 정치·사회적 입장을 개진할 수 있는, 맞춤한 의견 표현의 공간에 목마른 시민들의 표현의 장이다. 내밀한 사적 의사를 공개적으로 표명함으로써 시민들은 자신들의 사랑과 우정을 확인한다. 마찬가지로 연예인 팬클럽은 광고를 통해 대중과의 소통의 영역을 넓혀간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위기에 서 있다는 2009년, 시민들이 만들어가는 대한민국의 새로운 풍속도일지 모르겠다.

 

 

2009. 4. 30. 낮달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