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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안동 이야기

나무는 살아남았고, 사람들은 과거를 잃었다

by 낮달2018 2020.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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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시 길안면 ‘용계리 은행나무’ 기행

▲ 용계리 은행나무. 수령 700년인 이 나무는 수몰을 피해 15m 위로 들어 올려져 살아남았다.

100년, 한 세기를 넘으면 사람이나 사물은 ‘역사’로 기려진다. 백 년이란 시간은 단순히 물리적 시간의 누적에 그치지 않고 그 나이테 속에 한 나라, 한 사회의 부침과 희비와 온갖 곡절을 아로새기기 때문이다. 거기엔 물론 아직도 인간의 평균 수명이 100년을 넘지 못하는 까닭도 있을 터이다.

 

굳이 아흔아홉을 ‘백수(白壽)’라 부르는 까닭도 그 백 년이 쉬 다다를 수 없는 시간이라는 반증이다. 그러나 백 년을 넘기더라도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존재의 한계’라는 표현은 그런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압축적 표현이다.

 

백 년을 훌쩍 넘기는 사물로 눈을 돌려본다. 백 년을 넘겨 장수하는 사물 가운데 고건축을 제외하면 생명을 가진 것으로는 나무를 꼽을 수 있다. 보호수로 지정된 수백 년짜리 느티나무 등 당산나무는 어지간한 역사를 가진 마을마다 있다. 수령 2, 3백 년쯤은 기본이고 오래된 것은 4, 5백 년을 넘는다.

 

문화재청에 등록된 천연기념물 가운데 1천 살 안팎으로 추정되고 있는 나무는 10여 그루다. 가장 오래된 나무는 무려 1천400 살에 이르는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 사북리의 ‘두위봉 주목’이고 이 밖에도 경기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제주 표선 성읍 느티나무·팽나무 등이 모두 1천 살이 넘었다.

 

700살이 된 용계리 은행나무

 

안동시 길안면 용계리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700살쯤 되는 천연기념물(175호)이다. 600살 정도로 보는 지리산 ‘주목’과 속리산 ‘정이품송’에 비기면 백 살쯤 손위지만, 천 살이 넘는 위의 형님들에게 명함을 내밀기 어려운 처지다.

 

뜬금없이 용계리 은행나무를 떠올린 것은 용계리에 이르는 임동·길안 순환도로가 개통되었다는 안동시 반 회보를 읽고서였다. 안동에서 진보로 가는 길, 임동면 소재지에 못 미쳐 임하호를 건너면 무실[수곡(水谷)]마을이다. 여기서 이웃한 길안면의 용계리로 이어지는 18Km 길이 뚫린 것이다.

 

일요일 아침, 어느 길로 갈 것인가를 나는 잠깐 고민했다. 가장 가까운 길은 길안 쪽으로 드는 길이고, 임동의 무실을 거쳐서 가면 돌아가는 셈이 된다. 새벽안개 속에 은행나무를 만나는 것도 괜찮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길을 나선 건 7시가 넘어서다.

▲ 안동 세덕사(世德祠). 송암 탁순창이 조상을 모시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길안 구수리에 있다.

길안을 거쳐 청송 가는 길로 들어서 고개 하나를 넘자마자 만나는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꺾으면 이내 목적지에 이른다. 용계리 은행나무는 깨어나는 아침 햇살 속에 다소곳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700살 나이의 이 오래된 나무는 그러나 전혀 위압적이지 않다. 그것은 이 나무가 가지 사이로 푸른 하늘을 시원스레 보여주고 있는 까닭인 듯하다.

 

은행나무는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 때문에 가로수로 즐겨 심는다. 흔히들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수종이라 수백 년 묵은 나무들이 많다. 용계리 은행나무는 700살로 추정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정확한 나이는 잘라서 세어 봐야 한다고 한다.

 

높이 37m, 가슴높이 둘레가 14.5m나 되는 이 낙엽 교목은 선조 때 훈련대장을 지낸 송암(松庵) 탁순창과 각별한 인연을 맺었던 나무다. 그는 임진왜란 뒤에 낙향하여 이 나무 아래 축대를 쌓고 지역 사람들과 함께 행정계(杏亭契)를 조직하여 매년 7월 나무 그늘에서 유흥을 즐겼다고 한다.

▲ ‘상식(上植)’ 공사로 살아남은 용계리 은행나무

그때 이미 삼백 살이 넘었던 이 나무는 여느 나무와 다른 신목(神木)으로 기려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임진왜란 때 뒷산인 약산 봉수대를 지키던 봉수꾼 여남은 명이 왜병에게 쫓기어 마을로 내려와 이 나무에 올라 숨었다. 뒤쫓아 온 왜병은 숨은 봉수꾼을 보지 못하고 나무 그늘에서 쉬었다 떠났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마을의 수호신 노릇을 하는 오래 묵은 당산나무가 울음소리로 나라의 위기를 예고하고 슬퍼하였다는 얘기는 드물지 않다. 당연히 이 신목도 울음소리로 나라의 변란을 예고했다. 은행나무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국치(國恥)를 못내 서러워하여 울었고, 6·25 한국전쟁 때도 울었다고 전한다.

 

원래 은행나무는 암수가 서로 마주 보아야만 열매를 맺는다고 하는데 용계리에는 수나무가 없다. 그런데도 암나무만으로 한 해 은행을 서른 말가량 수확하였다 한다. 이는 나무 아래 맑은 냇물이 있어 그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수나무로 착각하여 결실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영험 많은 ‘신목(神木)’으로, 나무에 오른 사람이 나무를 해치지 않으면 떨어져도 다치게 하지 않는 ‘덕목(德木)’으로 기려지며 다시 400여 년, 마을을 지켰던 이 은행나무는 임하댐 건설 계획으로 일대 위기를 맞는다. 나무가 서 있던 길안초등학교 용계분교 교문 앞 개울가 100여 평 남짓한 터도 학교와 함께 물에 묻히게 된 것이다.

 

수몰 피해 15m 위로 들어 올려진 나무

 

700살이 가까운 고목이면서도 어느 한 가지 썩은 곳 없이 무성한 잎을 자랑해 일찌감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 나무를 수장시킬 수는 없었다. 고심 끝에 옮겨심기로 하고 전문가 자문을 받으니 곳곳이 난관이었다. 나무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이를 다룰 장비가 국내에 없고, 있다 하더라도 중장비가 들어갈 도로가 없으므로 수몰선 밖으로 이식은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궁여지책으로 나무를 그 자리에서 15m 위로 들어 올리는, 이른바 ‘상식(上植)’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 공사를 맡은 회사는 수목 이식 전문업체였는데, 공사비가 10억을 훌쩍 넘자, 당시 안동군에서는 ‘공기 3년, 하자 보증 기간 6년 이내에 나뭇가지의 고사율이 15%를 넘기면 공사대금 포기’라는 조건으로 계약하고 이를 공증까지 하였다 한다.

 

1990년 시작된 공사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난공사였다. 둑을 쌓아 나무 주위를 에워싼 뒤 대형 크레인으로 조금씩 나무를 들어 올리면서 3년 5개월 동안 흙을 메운 끝에 1994년 3월 공사는 성공적으로 완료되었다. ‘15m 상식’은 세계 최초이면서 최대 규모의 공사였다고 한다.

▲ 송암 탁순창은 임란 뒤 낙향하여 이 나무 아래 축대를 쌓고 지역 사람들과 함께 행정계(杏亭契)를 조직하였다.
▲ 은행나무는 아직도 밑동과 휘어진 큰 가지 부분을 쇠 지지대, 강철 와이어의 도움을 받고 있다.
▲ 수몰 전 아이들이 등하교 때 건넜던 시멘트 다리가 지금도 남아 있다.

총공사비는 20억 원. 이후 하자 보증 기간인 1999년까지 은행나무는 성공적으로 관리되었다. 그리고 다시 10년. 아직도 밑동 부분과 양쪽으로 휘어진 큰 가지 부분을 쇠로 만든 지지대, 강철 와이어의 도움을 받고 있긴 하지만, 나무는 그 건강한 생명력을 되찾았다.

 

공사 때 잘려 나갔던 가지 끝부분에도 새살이 돋았다. 올려 심을 당시 뿌리의 80%가 잘려 나가 스스로 영양과 수분 공급을 잘 해낼 수는 없었지만 이제 나무는 원기를 되찾은 것처럼 보인다. 밑동은 물론이거니와 사방으로 뻗은 가지들도 온전하다. 가지에 무성하게 달린 잎들은 검푸르게 빛나고 있다. 지금도 한 해 5천만 원을 들여 영양분을 공급하고 병충해 방제를 게을리하지 않은 결과다.

 

그러나 나이 탓에 은행나무가 옛 모습을 계속 유지해 나가기는 쉽지 않다. 이에 안동시는 용계리 은행나무에서 2천 개의 종자를 받아 이를 길러 시민들에게 2세 나무 2천 그루를 분양하였다. 2007년 식목일에 그를 기념하여 심은 은행나무 묘목 몇 그루가 어미 나무 뒤편 공터에서 자라고 있다.

 

다시 그 묘목들의 백 년을 상상하는 것은 만만치 않다. 일요일 아침, 용계리 은행나무가 누리고 있는 정적을 깬 틈입자에 불과한 나 역시 백 년은커녕 그 반도 온전히 채우지 못할 터이기 때문이다. 은행나무 주변을 천천히 돌면서 나는 400년 전, 탁순창과 이웃들이 이 나무 그늘 아래서 나눈 공동체의 정리를 생각했다.

▲ 폐교 정보. 용계분교는 1990년 3월에 문을 닫았다. ⓒ 안동교육청 누리집
▲ 폐교는 사람들에게서 모교뿐 아니라 과거를 빼앗아 간다. ⓒ 엔사이버백과

그러나 사람들은 과거를 잃었다

 

고향마을이 물에 잠기고 나서 훨씬 높은 지상의 땅으로 올라온 마을 사람들은 지금 임하호 주변에 띄엄띄엄 흩어져 살고 있다. ‘마을이 물에 잠긴 뒤 사람들은 하나둘 떠나갔지만, 은행나무가 이렇게 살아남았으니 마을이 영 없어진 건 아니’라고 사람들은 자위하지만, 은행나무는 예전의 그 나무 같지 않다.

 

예전에야 사람들은 은행나무 그늘에 모여 고단한 삶과 농사로 지친 심신을 달래고 이웃끼리 우의를 나누었으리라. 그러나 연둣빛 철책에 꽁꽁 둘러싸인 천연기념물은 단지 잃어버린 지난 시대의 표지로만 존재할 뿐이다. 거기서 따뜻한 농촌공동체의 흔적을 찾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이다.

 

도로로 이어지는 만만찮은 규모의 석조 아치 교를 건넌다. 저 아래 수몰선 아래, 20년 전만 해도 아이들이 등하교 때 건너다녔던 시멘트 다리가 보인다. 길안초등학교 용계분교장이 문을 닫은 것은 1990년 3월 1일이다. 그때, 낯선 본교로 가서 학업을 마친 아이들도 어느덧 서른을 훌쩍 넘겼으리라.

 

그들은 고향을 혹은 모교를 잃어버린 세대다. 하기야 1987년 이래 안동교육청 관내에 폐교된 학교는 무려 56개교다. 근대화와 도시화의 바람, 댐 건설 따위는 사람들에게서 과거와 추억을 빼앗아 가버린 것이다. 본교 운동장마다 두세 대씩 대여 있는 것은 학교를 빼앗긴 아이들을 나르는 노란색 스쿨 버스다. 그것은 마치 이 쓸쓸한 21세기를 압축하는 풍경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 무실마을의 고택 수애당의 담장과 중문.
▲ 무실 종택. 무실 문중의 입향조는 전주 류씨의 6대손 류성(柳城)이다.  시인 유안진도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

‘호미씻이’가 남아 있는 무실마을

▲ 무실마을 앞 임하호. 호숫가에 무궁화가 피었다.

임하호를 따라 용계리에서 임동면까지 꼬불꼬불한 산길을 40여 리 타고 가면 무실마을에 이른다. 무실은 전주 류(柳)씨 집성촌으로 수애당(水涯堂)과 무실 종택 등 오래된 고가가 많은 전통 마을이다. ‘무실’은 ‘물+실’에서 리을(ㄹ)이 떨어져 만들어진 이름인데, 행정구역 이름이 정비되면서 ‘수곡(水谷)’이 되었다.

 

용계리 은행나무가 과거의 표지로만 남은 데 비기면 ‘풋구’가 이루어지는 무실은 그나마 농촌공동체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다. ‘풋구’란 ‘호미씻이’의 다른 이름인데, 세 벌에 걸친 논 매기를 마치는 7월 중순께 치러지는 마을 잔치이다. 달리 초연(草宴)·풋구·풋굿·머슴날·장원례(壯元禮)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고된 농사일을 얼추 마치고 농사의 가닥이 잡혀가 농부들이 한시름을 놓을 때 벌이는 잔치인 풋구 날에 사람들은 한바탕 즐겁게 놀면서 농사일 때문에 미뤄 두었던 마을 공동사를 치른다. 장마에 패인 들길과 산길, 마을 길을 닦는 것도 이 무렵이다.

 

무실은 올해 풋구를 치렀던가. 무실마을도 수몰을 피해 더 높은 동네로 옮겨서 살아남았다. 다행히 한 마을을 이루고 사니 저 전근대의 세시풍속인 풋구도 명맥을 이은 것이다.

 

마을 고샅길은 깨끗하고 호숫가에 다듬어진 산책로 군데군데 핀 무궁화 사이로 흐린 하늘과 임하호가 건너다보인다. 호수를 가로지른 수곡교를 건너 나는 다시 소란스러운 도시를 향했다.

 

 

2009. 7. 27. 낮달

 

 

나무는 살아남았고, 사람들은 과거를 잃었다

안동시 길안면 '용계리 은행나무'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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